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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퇴계의 정치학 강의 / 물러나는 길

퇴계의 거처가 토계(兎溪)에서 퇴계(退溪)로 바뀐 뜻
[솔바람과 송순주 16]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인 연산군 7년에 태어나 중종과 인종, 명종을 거치며 뛰어난 학문과 성실한 생활로 관직에서 승승장구하던 톼계 이황이 고향으로 물러가려는 뜻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한 것은 46살 때이다.

 

이 때에 이황은 그의 고향인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조그만 암자를 지어 자신의 학문연구의 처소로 삼는데, 이를 계기로 동네이름도 토계에서 퇴계로 바꾸고 스스로의 호(號)도 그것으로 한다. 토계(兎溪)라는 말은 토끼가 뛰어노는 골짜기라는 뜻이라면 퇴계(退溪)는 ‘물러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 되어 이 조그만 골짜기는 미물이 뛰어 노는 자연적인 공간에서 갑자기 사람, 그것도 높은 뜻을 지닌 선비가 주인공이 되는 인문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그리고는 지금부터 450년 전인 1569년 4월 퇴계는 서울에서부터 고향집으로 아주 내려간다. 거기서 터를 잡고, 중앙 정계의 소용돌이를 멀리하고, 자연 속에서 우주와 인간의 근본을 보다 철저히 찾아내고 이를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뜻있는 분들이 이 귀향을 기리기 위해 재현단을 만들어 올해 4월에 서울에서부터 안동 도산 토계까지 걸으면서 선생의 마음과 뜻을 기리는 행사를 가졌다.

 

 

당시 퇴계는 아직 70전이었지만 이 행사에는 70을 넘어 80을 바라보는 김병일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이광호 전 연세대 교수 등 40여명의 정정한 노젊은이들이 대거 참여해서 긴 길을 걸어내셨다. 중간 중간에 머물면서 퇴계의 생애와 사상을 다시 돌아보는 강연회에서 강연과 토론도 가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퇴계는 벼슬하려는 생각보다도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고 제자를 교육시키는 데 힘쓰고자 했다. 퇴계가 이렇게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은 것은 학문에 대한 열정과 몸의 허약함 때문이었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너무 어지러웠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

 

퇴계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한 영산대학교 배병삼 교수는 퇴계의 거처가 토계(兎溪)에서 퇴계(退溪)로 바뀐 데서 큰 의미를 찾아낸다. 우선 그가 계(溪), 곧 골짜기로 (의식적으로) 들어간 것은, 스스로 두 가지의 큰 덕목을 몸소 실천하려는 것으로서, 첫째는 자신을 낮추는 겸양이며, 둘째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이를 해결해주려는 노력, 곧 배려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율곡이라는 호를 쓰는 또 다른 학문의 거봉인 이이(李珥)와 더불어 일종의 ‘계곡’이란 개념의 정체성으로 드러나는데, 조선왕조 초기의 정도전(1342~1398)의 호(號)가 봉우리를 뜻하는 삼봉(三峰)이었고, 퇴계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상논쟁을 펼쳤던 기대승(1527~1572)의 호가 고봉(高峰)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골짜기의 개념이 상당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봉우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뭔가를 적극적으로 획득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과는 달리, 골짜기라는 개념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선비들이 정계에 나아가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다가 때가 되면 적절히 물러나서 재야에서 다시 수양을 하면서 정신적인 스승이 되어야한다는 일종의 순환개념을 깨닫고 이를 표방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곧 퇴계는 현실정치에서 벗어나 학문의 세계로 물러난 사람이 아니라 ‘물러나는 길(退路)’을 건설한 적극적인 정치행위자, 실천자라는 것이다. ​

 

퇴계가 살아온 조선시대는 고려말, 조선 초에 도입된 성리학이 뿌리를 내리면서 사람의 본성과 우주의 근본원리를 깨달은 인간들(선비)이 세상에 건강한 삶의 표본을 제시하고 주변 사람들(백성)은 이에 감화되어 따르는 것이 미덕인 사회였다. 그것이 스스로를 닦고 집안을 다스려(修身齊家:수신제가) 그러한 기풍이 나라를 넘어 천하에까지 이르는(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의 사상, 곧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시스템으로 확립된다.

 

그런데 이러한 건국초기의 시스템, 곧 군주는 군림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천명(天命)을 받드는 책임자이며, 이러한 군주의 위상을 선비들이 지켜주는 시스템이, 왕권중심의 현실정치 속에서 희석되어 군주의 밑에 들어가서 권력을 향유하는 훈구파들과의 충돌이 잇따르게 되니 그것이 바로 사화(士禍)라는, 인위적인 선비계급의 숙청에 의한 정변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화는 조선의 국가이념,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강력한 의문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사화가 발생한 이유로, 사람은 많은데 자리가 한정되어 있어 인사적체가 심한데도 이를 해결할 관리들의 퇴로가 차단되어 있다는 점에 생각이 미친다.​

 

“오늘날은 신하가 벼슬을 버리고 물러날 수 있는 길이 영영 막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물러나기를 청하는 이가 있으면 허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뭇 사람들의 분노와 시기를 사게 되어 갖은 핍박을 받고, 다시는 물러나 피하지 못하고 그들과 한데 휩쓸리고 맙니다. 이렇기 때문에 선비가 한번 조정에 서게 되면, 모두 낚시에 걸린 고기 꼴이 되는 것입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가운데) ​

 

그래서 퇴계는 40대 이후 물러가서 머물 암자를 세운 고향 동네의 이름도 퇴계로 바꾸고 이러한 ‘퇴로의 건설’에 50대 이후의 활동을 집중한다. 곧 퇴계는 정치로부터 떠나서 학문의 세계로 간 것이 아니라 ‘정치로부터 물러나는 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만들 때에야 인사적체와 재정위기로 인한 사화의 재발을 막을 수 있고, 또 물러나서는 스스로 닦아 공부를 하는 시스템 속에서만 논어와 맹자가 약속한 선비들에 의한 도덕적으로 완결된 소통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물러난다는 것은 정치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봉우리에서 골짜기로 내려오는 것이며, 이러한 골짜기에서 정치는 정쟁적인 형태가 아니라 올바른 생각을 열어주면 그 생각을 주변과 사회에서 따라주는 것이다.​

 

퇴계는 이같은 정치형태가 실현될 때에 인재의 적재적소 배치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고 본다. 물러난 이는 행촌에 머물거나 또는 수련하여 다시금 세상에 나아가는 나선형적인 순환구조, 이것이 바로 퇴계가 본 정치학의 비전이며, 고차원의 정치라고 배병삼 교수는 설명한다. 퇴계를 단순한 유학자나 사상가, 교육자의 상을 넘어서서 정치인으로서 그의 생각을 꿰뚫어 본 배병삼 교수의 강의는 신선하다고 하겠다.

 

퇴계의 그림자는 컸다. 임진왜란 이후에 재야에 산림이 형성된 것도 그 영향이라고 볼 수 있고, 그가 가르치고 실천한 ‘물러가는 길’, ‘물러나는 법’은 조선의 정치구도를 새롭게 만들었다. 배병삼 교수는 이렇게 결론을 낸다.

 

“그가 남긴 정치적인 언설은 적지만 그의 정치적 행동은 조선의 정치구도를 재편했다는 점에서 개혁적이기를 넘어 혁명적이며, 이념의 해설자이기를 넘어 체제의 건설자로 평가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의 정치구도를 보면서 이 같은 물러남의 법, 물러나는 철학, 물러나는 길이 없으므로 해서 정치인들이 죽자 살자 싸움을 하는 것은 아닌지, 지식인들이 이러한 물러남의 철학을 모르고 있기에 물러나는 때를 놓치고 일신과 가족을 망치고 우리의 정치풍토와 국민들의 자존심에까지 먹칠을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450년 전 퇴계가 열어간 물러남의 정치, 이 길을 다시 알려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