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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시간의 마음, 가을비 산조

가을비가 반란이라는 말에 가슴이 덜컥한다
[솔바람과 송순주 20]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가랑비 정도로 생각했던 가을비가 여름 소나기처럼 바뀌어 창밖을 계속 때리자 하루 종일 일이 안되고 시선이 계속 유리창 밖으로 돌아간다. 유리창에 부딪쳐서 깨어져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을 보면 마음은 어느덧 시인이 되어 누군가의 작품이라도 따라 부르고 싶어진다.

 

그리움에 지친 얼굴

표정하나 없는 회색 빛

그게 너의 진실인가 봐

목마름에 갈증을 느끼며

애타게 부르다

슬픔의 눈물방울 뚝뚝 떨구며

그렇게 넌 다가오고 있어

가까이 다가와선

내 마음 두드리지도 못하고

울밑에서 떨구고 서 있구나            .... 박명순/ '추우(秋雨)' 중에서

 

 

유리창을 때리는 비는 대개 말이 없다. 유리창으로 격리돼 있어서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그런 언어의 정지 속에서 느껴지는 말없는 가을비의 마음을 "가까이 다가와선 내 마음 두드리지도 못하고 울밑에서 떨구고 서 있구나"라고 하는 구절처럼 절묘하게 대변하면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그런 가을비를 바라보노라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센티해지는 모양이다. 우수수 부는 바람을 타고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그 자체가 마음의 빗장을 긁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기에 번잡한 세속을 피해 산 속에서 수양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을비는 쓸쓸함 그 자체이다.

 

九月金剛蕭瑟雨  금강산 늦가을 내리는 비에

雨中無葉不鳴秋  나뭇잎은 잎마다 가을을 울리네

十年獨下無聲淚  십 년을 소리 없이 흐느낀 이 신세

淚濕袈衣空自愁  헛된 시름에 가사만 젖었네            ....... 추우(秋雨), 혜정(慧定)스님

 

설악산 백담사에 머물던 만해 한용운 스님도 그런 센티해지는 인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秋雨何蕭瑟  가을비 왜 이리도 쓸쓸한 것인가

微寒空自驚  갑자기 으스스해 새삼 놀라는 걸

有思如飛鶴  생각은 하늘을 나는 학인양 하여

隨雲入帝京  구름 따라 서울까지 들어가느니

 

가을비에 관한 한 가장 유명한 한시는 '추야우중(秋夜雨中)'이란 제목의 고운 최치원의 것이다. 멀리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에 내리는 가을비에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설명인데, 최근에는 신라에 돌아와 있을 때에 만든 작품이란 주장도 새로 나오고 있다.

 

秋風唯苦吟  가을바람은 잉잉거리는데

世路少知音  세상에 날 알아주는 벗은 적구나

窓外三更雨  창 밖 깊은 밤에 비가 내리니

燈前萬里心  등불을 보며 마음은 만리 길

 

 

그런데 한시라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포근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운을 맞추어야 하는 관계로 감성적으로 곧바로 느껴지는 그 마음을 우리말처럼 쉽고 절절하게 담아내지는 못한다고 봐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을비에 관해 가장 인기 있는 시가 용혜원 시인의 작품이라는 점에 감히 항의할 수가 없다.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얼마만큼의 삶을

내 가슴에 적셔왔는가

생각해 본다 ....

 

봄비는 가을을 위하여 있다지만

가을비는 무엇을 위하여 있는 것일까

싸늘한 감촉이

인생의 끝에서 서성이는 자들에게

가라는 신호인 듯한데

 

온몸을 적실만큼

가을비를 맞으면

그 때는 무슨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내일을 가야 하는가            ......용혜원 / '가을비를 맞으며'

 

이상하게 가을은 남이 아니라 '나'에 대해 생각하는 계절이 아닌가? 정치와 경제가 어지럽고 소란스러웠지만 가을의 문턱에서 비를 맞으면 그런 외부적인 것보다는 한 해를 살아오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을비를 보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 반추하고 현실을 인식하는 데는 너와 나가 없다

 

사는 것이 이런 것임을 내 스스로 깨닫기까지

너무도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시간 뒤로 숨어버린 내 인생의 거울은

깨어진 조각 마냥

가을비 속에 버려져 있었다.              ...신재한 / '가을비 속의 상념' 중에서

 

꼭 짧은 시 형식이 아니라도 가을비를 묘사하는 데는 역시 우리말이 더 정갈스럽다. 더구나 한 여름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자제하면서 땀을 흘렸던 남성들은 가을비가 반란이라는 말에 가슴이 덜컥한다.

 

가을비는 연민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이자 더 머물 수 없는 청춘에 대한 회한이다. 가을비는 또 간이역에 잠시 쉬고 있는 완행열차다. 서둘러 갈 필요 없다는 듯 느릿느릿 간이역을 떠나면서 한숨 같은 기적소리를 울리는 완행열차의 쓸쓸한 뒷모습을 닮았다.

 

때로 가을비는 반란이다.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울컥하는 뜨거움을 불러내서 슬픔의 물결이 억새처럼 일렁이게 한다. 밤새 수런거리는 슬픔에 못 이겨 어디론가 떠나고 싶게 하고, 애써 잊고 달려왔던 세월들을 송두리째 지워버려 혼란스럽게 만든다.

                                                               .... 오광수 '비에 젖는 가을거리' 중에서

 

그러나 가을이라고 인생이 그리 다 끝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을비라고 해서 꼭 그리 궁상을 떨 일만은 아니다. 내리는 가을비 속에서 희망을 얘기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빗속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나'는 문득 가슴깊이 남겨 두었던 그 어떤 목소리가 생각나서 정신을 차리고 수첩을 뒤지기 시작했다;

 

빗길 따라, 걸어 온 세월을 따라

물이 드는 나의 나뭇잎

하나 둘 세어 볼 일이다

메마를수록 젖어들 줄 아는 또 다른 나의 순수 앞에

그냥 서 있어 볼 일이다

수평선 하나 저 만치 두고

가슴 깊이 깊이 남겨 두었던 그 목소리를 찾아

전화 한 번 걸어 볼 일이다              ...양영길 / '가을비 오는 날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