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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아내가 지은 거나 마찬가지지’, 손시향 <검은 장갑>

우리 가요사의 햇살 같은 존재 손석우의 걸작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28]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래도 눈은 내렸다. 계엄령이 떨어지고 알 수 없는 총소리가 밤하늘을 찢고 눈만 뜨면 어리둥절한 뉴스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군인 이름들이 언론매체를 도배질하던 그 겨울에 육군본부에도 궁정동에도 무주공산 청와대에도 눈은 내렸다.

 

처음 겪어보는 극단의 회색이었다.

하늘도 사람들의 발걸음도 음악 선율도 온통 회색조(調)였다.

“김대중이가 잡혀갔대.” “김영삼이 김종필이도 가택연금 당했다는구먼.”

사람들의 수근거림마저 우중충하던 세모(歲暮)였다.

 

<손시향 - 검은 장갑. 지나가다가 밖으로 음악 소리가 새 나오기에 이 노래가 생각나 들렀소이다. 혹시 음반이 있으면 들려주시오.>

 

음악실에서 바라본 입구 쪽 자리는 멀기도 하려니와 음악실 유리에 조명 빛이 반사돼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슴푸레 보이는 형상이나 글씨체나 신청곡으로 보아 노신사임이 분명했다. 아직 교대시간이 조금 남긴 했어도 뒷 진행자의 양해를 얻어 서둘러 음악실을 나왔다.

 

“저어,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도 이 노래를 좋아합니다만 음반이 없어 들려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할 수 없지. 아쉽긴 하지만 그게 어디 디제이 양반 탓이오? 괜찮으니 앉아서 차나 한잔합시다.”

참으로 온화하고 세련된 분이었다. 옷차림새나 몸짓이나 빈틈없는 교양이 흘렀다.

 

실은 내가 그 노래를 만든 손석우요. 그날을 회상하며 상념에 잠겨 걷다보니 나도 모르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구려. 젊은이! 내가 보기엔 젊은이가 성의가 있어 보이니 음악과 오래 할 것 같소. 그래서 내 <검은 장갑>을 만들 때의 얘기를 들려주리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20년 전으로 필름을 감았다.

 

<그날도 오늘처럼 함박눈이 내렸지. 그땐 KBS가 남산에 있었는데, 방송녹음을 마치고 제자들과 차나 한잔하고 헤어지려고 맞은 편 ‘산길다방’을 찾았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음악 얘기로 화제가 모아졌고, 음악의 소재가 토론의 주제가 되었지.

 

토론이 길어지기에 내가 나서 ‘음악의 소재가 정해진 것은 없어. 그림을 예로 들어보자구. 아무거나 다 소재가 될 수 있잖아. 심지어 쓰레기더미까지도. 노래도 마찬가지야. 그냥 우리의 일상을 자연스레 담아내야 듣는 이가 감동하는 거야. 여기 김성옥이가 끼고 있는 이 검정색 장갑도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지’

 

그렇게 자리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왔는데 영 개운치 않은 거야. 내가 본을 보여야만 낯이 서겠더구만. 오선지에 ‘검은 장갑’이라고 제목을 써놓긴 했으나 통 가사가 안 떠오르는 거야.

밤늦도록 끙끙대고 있는데 아내가 차를 끓여 오더군. 찻잔을 내려놓으며 악보를 힐끔 훔치던 아내는 ‘어머, 당신 우리 연애할 때 얘기를 쓰시는군요.’ 하더니 눈 내리는 창가로 다가가 감회에 젖는 게 아니겠어.

 

‘그 해엔 웬 눈이 그리 많이 오는지. 눈 내리는 날이면 당신은 어김없이 나를 불러냈고, 밤이 이슥하도록 같이 있었으면서도 헤어지기 싫어했죠. 내 검은 장갑을 꼭 잡고….’

 

이렇게 된 것이라오. 내가 지었다기보다 아내가 지은 거나 마찬가지지.>

 

 

검은 장갑

 

헤어지기 섭섭하여

망설이는 나에게

굿바이 하며 내미는 손

검은 장갑 낀 손

할 말은 많아도

아무말 못하고돌아서는 내 모양을

저 달은 웃으리

 

 

서양음악의 다양한 리듬과 격조를 가요에 도입한 손석우는 국내 첫 드라마 주제가 작곡가로도 기록된다. 1920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목포상고를 나와 호남은행에서 행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1941년, 중학생 시절부터 그의 재주를 지켜보던 작곡가 김해송이 추천하여 기타 연주자로 가요계에 입문한 뒤, 탁월한 이론가 김해송에게 배우며, 작곡가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56년에 나온 드라마 <청실홍실>의 주제가를 시작으로 내놓는 곡마다 선풍을 일으켰다. 특히 58년 작 <검은 장갑>에 이어 60년 작 <이별의 종착역>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손석우의 분신으로 남아있다. “만약 김해송 선생을 만나지 않고 화가를 만났으면 화가가 되었을 것이요. 문인을 만났으면 문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회고하였듯이 재주가 많은 그는 작사와 음반표지 도안에도 빼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우주가 아무리 넓고 세상이 복잡하게 돌아가도 역시 우리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는가? 영원할 것 같던 그의 잔잔한 미소도 100살을 코앞에 둔 지난 11월 12일 “부고”라는 마지막 소식을 전하고 떠났다.

 

“손석우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손석우와 찰떡콤비를 이루어낸 손시향은 1938년 손용호라는 이름으로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고와 서울 농대를 나온 재사(才士)다. 고교 동창인 강신영이 영화배우로 성공하여 신성일이란 이름을 드날리자 자신도 영화배우를 꿈꿨으나, 대학 재학시절 KBS 노래경연에 참가했다가 입상하는 바람에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1958년에 손석우의 회심작 <검은 장갑>으로 데뷔하자마자 인기가수의 반열에 오른다. 훤칠한 외모와 샹송풍의 부드러운 음색으로 “한국의 이브 몽땅”이라는 수식어까지 얻은 그는 “손석우의 아들” 답게 손석우 작품이 아니면 일절 부르지 않는 지조를 보이기도 했다.

 

<검은 장갑>의 여세로 <비 오는 날의 오후 세시>(59년) <이별의 종착역>(60년)을 연이어 히트시킨다. 특히 <이별의 종착역>은 그의 상징이 되었고, <비 오는 날의 오후 세시>는 배우로서의 그의 꿈을 실현시켜준 작품이다. “마카오 신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잘생긴 그는 그 영화를 통해 배우로 데뷔한다.

 

1960년 제4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진(眞)의 영광을 거머쥔 뒤 영화배우로 활약한 손미희자가 그의 여동생으로 수려한 가계(家系)를 자랑하기도 했다. 1960년대 어느 날 미국 마이애미로 이민 가서 아직까지 그곳에 살고 있다. 고국과 그 시절이 그리울 때도 되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