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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연구회는 왜 고분을 파헤쳤을까?

[맛있는 일본이야기 528]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에 ‘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蹟硏究會)’라는 단체가 있었다. ‘조선고적연구회’는 조선총독부의 행정지원과 일본의 재벌, 궁내부, 일본학술진흥원, 이왕가 등의 재정지원으로 활동하던 식민사학의 뿌리가 되는 조직이다.

 

1910년대 이 조직이 등장하기 전에 생긴 조선총독부 주도로 실행하던 고적조사사업이 조선내의 문화재 단순한 파악 수준이었다면 조선고적연구회는 각 지역에 해당 유적의 전문가를 상주시키면서 기존에 파악된 유적이나 유물이 발굴을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파헤치는 조직이라는 점이 다르다. 《청구학보(靑丘學叢), 5호(1931)》에 따르면 구로이타 가츠미(黑板勝美)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조선고적연구회는 고분(古墳) 발굴에 주력한 조직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학술적인 목적으로만 고분 발굴을 했을까?

 

 

도쿄 국립박물관 3층에는 “오구라 컬렉션(小倉 Collection)”이 기증한 우리나라 유물들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오구라는 1922년부터 1952년까지 조선에서 문화재를 약탈해갔는데 무려 1,100여 점이나 되며, 이 가운데 39점은 일본 국가문화재로 지정될 정도의 수준 높은 문화재들이다. 그런가 하면 앞 이름이 비슷한 “오쿠라 컬렉션”은 명치시대의 실업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가 만든 것으로 조선의 문화재를 다량으로 약탈수집하여 일본 최초의 “오쿠라 슈코칸(大倉集古館)”이란 개인 미술관을 만들었다. 오쿠라와 오구라를 비롯하여 일본인들에 의해 약탈된 무려 6만7천여 점의 문화재가 일본땅에서 고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많은 약탈 문화재들은 아마도 조선고적연구회의 활약에 따른 결과물이 아닐까?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조상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건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어서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우리땅에 보존돼 오던 고분이 일본인 손에 의해 파헤쳐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야 발굴 조사라는 명목을 들이대고 뒷구멍으로 문화재들을 약탈해간 왜놈들 생각만 해도 분통 터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