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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공연과 전시

제주에 유배된 사람들의 고뇌와 아픔, 사랑

국립제주박물관, ‘낯선 곳으로의 여정- 제주 유배인 이야기’ 전시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가는 길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王孫草)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 꾼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이는 광해군이 제주 유배 시절 지었다는 칠언율시 ‘제주적중(濟州謫中)’이다. 권좌에서 절해고도 섬으로 내쫓긴 패자의 비통하고 고독한 심경이 잘 드러나는 이 시는 국립제주박물관의 ‘낯선 곳으로의 여정- 제주 유배인 이야기’ 전시에 소개되었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제주 섬’ 브랜드 문화를 이끌어가는 기획전시의 하나로 ‘낯선 곳으로의 여정, 제주 유배인’ 이야기를 선보였다. 이 전시는 섬이 가진 다양한 역사문화콘텐츠 가운데 ‘유배’에 초점을 맞춰 유배살이의 다양한 풍경을 소개한 것이다.

 

 

유배란 중죄를 지은 사람을 먼 곳으로 보내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로, ‘귀양’, ‘귀향’ 이라고도 한다. 제주는 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의 특성상 천혜의 유배지였고,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이용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유배인이 가장 많았던 지역이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제주에 유배 왔던 인물만 약 260여 명에 달하며, 알려지지 않은 일반인들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흔히 유배라고 하면 왕족이나 사대부 계층만 겪었던 형벌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유배된 사람들은 신분은 중인, 평민, 천민 등 다양했으며, 그 연유도 정치적 당쟁부터 도둑질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유배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와 애환, 제주 사람들과의 관계 등을 여러모로 조명한다. 전시는 크게 3부로 구성되며, 섬이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견뎌야 했던 유배인들의 고뇌와 아픔, 사랑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1부 <먼 길 낯선 여정, 제주 유배를 들여다보다>는 유배의 역사와 더불어 다양한 이유로 제주에 유배 온 인물들을 조명한다. 조선 제15대 임금으로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지만, 한순간 유배인의 신분으로 전락한 광해군의 《광해군일기》를 비롯하여 사대부였던 김정의 《충암집》, 주자학의 거두 송시열의 초상과 글씨, 제주의 마지막 유배인 이승훈의 재판기록 등이 소개됐다. 유명한 임금이나 사대부뿐만 아니라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일반인들의 유배기록이 있는 <대정현 호적자료>도 흥미롭다.

 

 

 

 

2부 <낯선 땅, 가혹하고도 간절했던 시간을 기다리다> 에서는 당쟁에 휘말려 3대가 제주에 유배된 가문, 유배생활 중의 사랑, 힘든 환경에서도 학문에 정진했던 유배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숙종 대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를 둘러싼 당쟁으로 유배된 김춘택 일가와 정조 시해 사건에 연루된 조정철 일가의 초상화와 문집, 조정철이 제주 여인 홍윤애를 위해 써준 ‘홍의녀의 묘’ 탁본도 전시됐다.

 

또한, 제주의 대표 유배인으로 유배 시절 추사체를 완성한 김정희의 <수선화 시 초고>, 충남 예산 김정희 종가에서 전래되는 벼루와 붓(보물 제547호)을 비롯해 김정희가 친구 권돈인에게 써준 <묵소거사자찬>(보물 제1685-1호) 등이 전시된다. 특히 <묵소거사자찬>은 제주에서 쓴 것은 아니지만 김정희 추사체의 일면을 담은 해서체의 경지를 볼 수 있어 주목할 만하다.

 

3부 <제주 유배, 그 후>에서는 유배인이 제주에 남긴 흔적과 제주 사람들과의 관계를 조명한다. 유학의 불모지였던 제주에 불어온 유학의 바람과 유배인에게 배워 과거시험에 합격한 제자들의 자료, 제주에 정착하여 가문을 일으킨 입도조 자료 등도 선보였다.

 

제주의 오현(五賢, 제주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제주 다섯 명의 현인)인 김정ㆍ정온ㆍ송인수ㆍ김상헌ㆍ송시열의 시문집과 오현의 사적을 기록한 <오선생사적>, 일제강점기 때 탁본된 <우암송선생유허비 탁본>을 통해 제주에 뿌리내린 오현에 대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제주향교에 보관 중인 유배인 제자들의 과거시험 합격 명단 <용방록>ㆍ<연방록>(도유형문화재 제10ㆍ11호), 김정희가 쓴 대정항교 <의문당(疑問堂)> 현판, 김만덕의 덕을 기리며 쓴 <은광연세(恩光衍世)> 현판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유배인의 삶은 대체로 척박하고 열악했으며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유배생활 동안 김정희는 자신을 부평초에, 김춘택은 자신을 지렁이에 비유했을 정도로 무너져내리는 자존감 역시 일상이었다. 그러나 긴 고통의 터널 끝에 유배가 풀린 유배인들은 중앙 정계에 복귀해 출세가도를 달리기도 하고, 제주에 정착하여 입도조(入島祖, 섬에 처음으로 정착한 각 성씨의 조상)가 되기도 했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섬, 제주에서의 유배생활을 담은 이 전시는 3월 1일까지 국립제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급작스러운 코로나19 여파로 휴관중에 있어 지금은 관람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