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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죽음을 강요당한 여인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32]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환향녀가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끌려간 여자들도 많지만 끌려가기 전에 죽은 여자들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가 ‘병자호란’이라고 간단하게 말하지만, 그 전쟁사를 미시적(微視的)으로 들여다보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서에 보면 ‘포개진 시신들 사이로 젖먹이들이 어미를 찾아 기어다니며 울고 있다’라는 처참한 표현도 나옵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는 많은 왕족들과 고위관료 가족들이 피난 가 있었습니다. 인종은 이렇게 피난시켜놓고 뒤따라 강화도로 들어가려다가 청군에 의해 길이 막히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었지요. 청군이 강화도에 들어왔을 때, 강화도는 그야말로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때 성리학의 허황된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사대부 여인들은 죽음을 택했습니다.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에 보면 유인립의 아내는 끝까지 버티다가 청군이 총을 난사해 몸의 살이 다 뜯겨나갔지만 꼿꼿하게 선 채 넘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호선의 아내는 토굴 안에 숨어 있다가 적병이 불을 질렀는데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타죽었답니다.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의 어머니 얘기도 나옵니다. 청군이 강화로 들어오니 윤증의 어머니도 목을 맵니다. 이 때 9살이었던 윤증은 손으로 옷과 이불을 정돈한 뒤 빈소를 정했답니다. 그리고 사방 구석에 돌을 놓고 숯과 재를 덮은 후 통곡하여 하직한 뒤 계집종의 등에 업혀 나왔습니다. 이 때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는 아버지와 함께 죽겠다며 강화도를 빠져나갔으나, 남한산성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살아남지요. 그 후 윤선거가 죽었을 때 윤증이 스승 송시열에게 비문(碑文)을 부탁하는데, 윤선거의 이 때 행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송시열이 성의 없이 써줍니다. 이 때문에 송시열과 윤증이 틀어지면서, 서인 중에 늙은 송시열 쪽을 따르는 이들이 노론(老論), 젊은 윤증 쪽이 소론이 되었지요. 물론 서인이 이렇게 갈라지는 데에는 그 외 여러 복합적 원인이 있지만요.​

 

얘기가 곁길로 샜는데, 어머니가 목 매 죽을 당시 윤증에게는 한 살 위의 누나가 있었습니다. 이 누나는 청군에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어려서인지 끌려가다가 노비로 팔려 의주에서 노비생활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1639년 이시매가 암행어사로 의주에 옵니다. 이시매는 윤선거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친구를 알아본 누이는 필사적으로 이시매를 만나려고 하였고, 그리하여 겨우 만난 이시매에게 품에 고이 간직했던 소첩(小帖) 하나를 보여줍니다. 간략하게 족보를 기록해놓은 것인데, 윤증이 헤어질 때 누이에게 준 것이지요.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이시매는 장탄식을 하며 윤증의 누이를 노비의 신분에서 살려냅니다.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적에게 사로잡혀 욕을 보지 않고 죽은 자와 바위나 숲에 숨었다가 적에게 핍박을 당해 물에 떨어져 죽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빠져죽은 여인들의 머리 수건이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

 

여인들의 머리 수건이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 같았다... 이 글을 쓰면서 그때의 여인네들의 비명이 제 귀에도 들려오는 것 같아, 울컥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들도 있었지만 남자들의 강요에 의해 목숨을 끊은 여인들도 많습니다. 지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강화검찰사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는 자신의 할머니, 어머니, 아내 등 일가의 여인들을 협박하여 자살하게 합니다. 그리고 지도 먼저 도망간 아버지를 따라 도망갑니다. 정선홍의 아내는 청군이 접근하자 친정아버지의 절친이자 왕족인 회은군 이덕인에게 살려달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회은군이 난감해할 때 남편 정선홍은 눈을 부릅뜨고 ‘빨리 죽는 게 낫다’라며 꾸짖었답니다. 그러자 아내는 칼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회은군이 정선홍에게 빨리 가보라고 할 때는 그 아내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아! 못난 남자들이 벌여놓은 전쟁판에 그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한을 품고 죽었어야 할까요?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조선시대 소설에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이라고 있습니다. 江都는 강화도를 말하는 것이지요? 《강도몽유록》은 어느 날 청허선사의 꿈에 강화도에서 죽은 여인 15명의 혼령이 나와 자기들의 한을 토로하는 소설입니다. 그 중 한 여인은 나라가 수치를 당했는데 충신으로 의(義)에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매서운 정조를 보인 것은 부녀자뿐이라고 합니다. 당시 남자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환향녀에게 정절을 더럽혔으니 이혼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야! 이 호로 자식들아! 너나 잘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