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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용이 된 문무대왕이 드나들었다는 감은사터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35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감포 앞바다에는 신라 30대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이라고 알려진 대왕암(大王巖)이 있고, 이곳으로부터 경주 방향으로 0.5㎞쯤 가면 양북면 용당리에 훤칠한 미남에 견줄 만하며, 위엄 있는 품새가 사람을 압도한다는 평가를 받는 신라시대 가장 큰 석탑인 13.4m의 국보 제112호 감은사터 동ㆍ서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폐사된 감은사(感恩寺) 절터입니다.

 

 

당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여 직접 대왕암의 위치를 잡았으며,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용당산 자락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으나 절을 다 짓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이후 왕위를 물려받은 신문왕(神文王)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682년 절을 완성한 뒤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감은사 금당 밑에 일정한 높이로 공간을 형성해 비워놓았으며, 이는 용이 된 제31대 문무왕이 바닷물을 타고 감은사 금당까지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들어맞지요. 이렇게 금당을 지은 까닭은 신문왕이 동해의 용이 된 아버지가 바닷물을 따라 금당까지 들어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이 감은사 터는 2기의 동ㆍ서 삼층 석탑과 정면 5칸, 측면 3칸이었던 금당의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을 뿐인데 사적 제31호로 지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