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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마사하루 기념관’, 일본이 나가사키 원폭 가해자

[맛있는 일본 이야기 561]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늘이 8월 5일, 슬슬 눈앞에 9일이 다가왔다. 8월 9일 하면 한국인들은 별 감흥이 없을지 모르나 일본인들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떠올린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시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한순간에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수많은 시민과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다.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피폭자들에게도 평생 치유될 수 없는 마음과 몸의 상처, 방사선으로 말미암은 건강장해를 남겼다. 우리는 이러한 희생과 고통을 잊지 않을 것이며 이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바친다. 우리는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의 실상을 나라 안팎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전할 것이며 이러한 역사를 교훈 삼아 핵무기 없는 영원히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할 것이다.” 1996.4. -국립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홍보물-

 

 

 

나가사키에는 두 개의 자료관이 있다. 하나는 일본정부 돈으로 만든 ‘국립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고 다른 하나는 양심 있는 시민들이 만든 ‘오카마사하루 기념관(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 그것이다. 국립 나가사키 자료관은 위 설명처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대해 ‘연합국이 일본 시민의 죄 없는 목숨을 앗아간 흉악한 짓’ 쯤으로 포장해놓고 있다. 이 자료관을 둘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일본이 100%로 피해자인 양 구성되어 있다. 정말 일본은 피해자인가!

 

어린 유치원생들을 데리고 온 교사는 침이 마르도록 ‘원폭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얼마나 악한 짓’을 했는지를 설명하기 바쁘다.

 

그러나 다른 한 곳, 양심 있는 시민들이 만든 ‘오카마사하루 기념관’은 다르다. 모든 전시를 일본을 가해국임을 밝히는 시각으로 꾸며놓았다.

 

 

“일본의 침략과 전쟁의 희생자가 된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은 전후 50년이 되도록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버림받아왔습니다. 가해의 역사를 숨겨왔기 때문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하여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만큼 국제적인 신뢰를 배신하는 행위는 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자원봉사들이 이곳의 설립목적을 말해준다. 그들은 말한다.

 

“이 평화자료관은 일본의 무책임한 전쟁 상태를 고발하는 데 전 생애를 바친 고 오카 마사하루(岡正治, 1918-1994) 씨의 유지를 계승하여 시민의 손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권력자들 눈에는 이곳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겠지만 이곳은 위대한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저희 평화자료관을 방문하시는 한 분 한 분이 가해의 진실을 확인하고 피해자의 아픔을 진심으로 헤아리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속히 전후 보상 실현과 전쟁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데 헌신해 주실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시민들의 호주머니로 만든 자료관이라 공간은 협소했지만 각 전시실에 전시된 전시물들은 알찼다. 1995년 10월 1일 문을 연 이 자료관을 있게 한 사람이 바로 오카 마사하루(岡正治, 1918-1994) 목사다. 그는 목사이자 나가사키 시의원을 지냈고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 대표를 맡으면서 조선인들의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지금이야 ‘일본이 전쟁 책임이 있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만, 패전 뒤 상당 기간 ‘일본의 책임론’은 금기였다. 그런 가운데 오카 마사하루 목사는 주머니를 털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나가사키에 숨겨진 조선인 피폭 문제에 매달렸고 실태조사를 위해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그는 항상 차별받고 있는 약자 편에서 서서 일본정부와 강제노역자들의 노동으로 배를 불린 악덕 기업을 향해 반성과 보상을 촉구해왔으며 만년에는 ‘일본의 가해 책임을 분명히 밝히고 현재도 남아있는 차별 철폐와 정부의 보상을 실현하게 하기 위한 자료관 건립’을 구상했으나 자료관 건립을 보지 못하고 1994년 7월 21일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기념관을 세우기 위한 토지문제와 건물 신축비 자금부족으로 애를 먹었으나 1995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중심이 되어 그의 뜻을 받드는 수많은 시민의 도움으로 토지 매입과 건축비를 마련 1995년 10월 1일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 문을 열었다. 설립기금 4,500만 엔은 25년 동안 월 18만 엔씩 갚는 조건의 대출금과 기부금 등으로 마련했으며 정치적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정부나 행정기관의 재정 지원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자료관은 회원들의 회비와 찬조금, 입장료로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으며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꾸려가고 있다. 8월 그리고 9일이 되면 나는 나가사키의 두 자료관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가해국 일본에서 버려진 조선인의 삶과 인권을 위해 뛰었던 오카 마사하루 목사의 ‘한국사랑 정신’도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