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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조선이라는 시대, 역사로 남은 여섯 여인

광해군 시대 김개시와 박근혜 대통령 시절 최순실
《조선왕조여인실록- 시대가 만들어낸 빛과 어둠의 여인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어을우동,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 김개시, 김만덕.

역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도 한 번쯤은 사극이나 소설에서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이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폭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조선’이라는 시대, 그 한계의 틈새를 비집고 자신의 재능과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여섯 명의 여인들. 그들의 삶은 당대에도 실록을 비롯한 각종 문헌에 이름이 남을 만큼 화제를 모았지만, 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각종 사극과 소설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그들이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온어롤북스의 책 《조선왕조여인실록- 시대가 만들어낸 빛과 어둠의 여인들》을 공동 집필한 4인의 저자들은, 요즘 시대에 살았다면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그들이 역사에 남게 된 것은 ‘조선’이라는 시대적 특수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그들을 그토록 남다른 인물로 만든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고,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심했던 시대에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는지, 각종 사료에 상상력을 더해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삶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범상치 않다. 고위공직자의 옛 부인으로 다수의 유력인사와 염문을 뿌린 여성, 고시 수석합격자 아들을 둔 화가, 수많은 유명인사와 자유로운 연애를 한 연예인, 한국을 넘어 중국과 일본에까지 문학 한류를 일으킨 시인, 대통령의 숨겨진 최측근으로 국정을 농단하다 정권 교체와 함께 축출된 비선실세, 전 재산을 재난 구호사업에 쾌척한 자수성가 기업인.

 

이런 면면이라면, 오늘날에도 언론에서 비중 있게 다룰 만하거니와 일부는 한동안 신문 1면을 장식하며 소위 ‘역사적 인물’이 되었을 법하다. 짐작하겠지만, 이들이 바로 이 책에서 다룬 어을우동,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 김개시, 그리고 김만덕의 현대판 모습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역사에 남을 세 사람을 뽑자면, 정계는 김개시, 문화예술계는 허난설헌, 재계는 김만덕이 되지 않을까. 특히, 김개시의 삶은 몇 년 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비선실세 사태와 겹쳐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비선실세’라는 단어는 조선시대에는 없던 표현이다. 비선실세는 국가적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권세를 가진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김개시는 정치하는 공식 관료는 아니지만, 광해군과 비밀리에 줄이 닿아 있어서 실질적인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광해군 시대 대북파 영수 이이첨은 ‘공식실세’였고, 궁녀 김개시는 ‘비선실세’로서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다. 굳이 권력 서열을 나눠보자면 1위는 광해군, 2위는 김개시, 3위는 이이첨이라 할 만하다. (P.84)

 

희대의 비선실세, 김개시는 광해군 때 인사권을 틀어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상궁으로, 매관매직을 통해 엄청난 양의 뇌물을 챙기며 국정을 농단했다. 임금의 고유 권한이자 국정운영의 핵심 동력인 인사권이 넘어가자 부지불식간에 모든 권력이 그녀에게 쏠렸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반정을 앞당기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김개시는 광해군을 배신한다. 반정 주동자 김자점에게 뇌물을 받고, 반정 후에도 자신의 안위와 권력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반정을 묵인한 것이다. 총명한 김개시가 자신의 권력 유지 가능성을 오판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우나, 결과적으로 광해군의 몰락과 함께 자신도 제거대상 1호가 되어 처형당한다.

 

정권의 몰락을 초래한 김개시의 국정농단은, 임금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독립적인 사고력과 판단력을 유지해야 하고, 국정의 핵심 현안을 직접 챙겨야 하며, 아랫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사결정 권한을 위임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어, 몇 년 전 대한민국은 비선실세 사태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김개시를 상기시키며 비선실세의 위험성을 엄중히 경고한다.

 

국가는 왕과 대통령의 사적 소유물이 아니므로 공적인 시스템을 통해서 운영되어야 한다. 광해군 시대 김개시와 박근혜 대통령 시절 최순실은 비선실세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공적 시스템’을 훼손한 것이다. 권세가들은 공식적 지위에 있으므로 그들의 행동과 말이 쉽게 드러나고 견제와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선실세들은 권력의 뒤에 숨어 있으므로 잘못이 심각한 상태가 될 때까지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이 모두 은폐된 채 벌어지기 때문에 권세가들의 권력형 비리보다 국정의 혼란과 위기는 심각하다.(p. 193)

 

한편, 문화계의 거장으로 남았을 허난설헌은 여성 대부분이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출신 지역과 성씨로만 불리던 시대, 진보적인 집안 분위기 덕분에 ‘허초희’라는 뚜렷한 자기 이름을 가졌고, 자라서는 남성들만이 사용하던 자와 호까지 스스로 지은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김성립과 15살에 혼인한 이후 27살에 요절할 때까지 평탄치 못한 결혼생활로 불우한 삶을 살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창작에 매진하여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허난설헌은 오늘날 태어났어도 어릴 때부터 문학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고, 사후에 출간된 시집이 중국과 일본에 번역 출간되어 한류열풍을 일으킨 역사적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김만덕 역시 성공한 사업가로 재계의 존경받는 거목이 되었을 법한 인물이다. 김만덕은 본래 양민이었으나 12살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 몸을 의탁하다가, 기방에 들어가 18살에 정식으로 기생이 된다. 그러나 5년 뒤 23살이 되던 해, 자신은 본디 양민이므로 기생 명부에서 삭제해 줄 것을 관아에 여러 차례 요청한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김만덕은 이때부터 오늘날의 유통업이자, 대부업이자, 숙박업이라고 할 수 있는 객주를 열어 33년간 부를 축적하고, 1795년 대기근 당시 전 재산으로 300여 섬의 쌀을 사들여 수많은 제주 백성을 살려냈다.

 

 

이를 보고받은 정조가 소원을 묻자 임금을 뵙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여 마침내 그 꿈을 이뤘고, 많은 관료들이 그녀를 칭송하는 글을 남긴 가운데 영의정 채제공은 《만덕전》을 지어 그 공을 기렸다. 말하자면 오늘날 대통령이 재난 구호사업에 큰 공적을 세운 여성 기업인을 청와대로 초청하고, 국무총리가 그녀의 전기를 출판한 것이다. 물론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현대사회에서도 퍽 대단한 일이니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겠는가?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여성도 이름이 있고,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지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러니 역사에 기록될 일은 더더욱 드물었다. 이처럼 이 책은 여성이 기록되기 어려웠던 시대, 남다른 행보로 그 자신이 역사가 된 여섯 인물의 이야기이다. 현직 역사교사 네 명이 공동 집필한 덕분에 인물마다 문체가 다른 것도 이 책의 묘미다. 1장 ‘시대와 밀당한 여인, 어을우동’ 편에서는 발랄하고 유쾌한 문체로 글맛을 돋우는가 하면, 2장 ‘시대의 현모양처, 신사임당’ 편에서는 다소 중후한 문체로 묵직함을 더하는 식이다.

 

여섯 명의 인물들이 저마다의 독특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가운데, 사극에서 여러 번 보았으나 그들이 왜 역사가 되었는지 잘 몰랐던 독자라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외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부록으로 담은 ‘조선왕조 속 못다 한 불빛들’에서는 역사에 꽤 정통한 이들도 몰랐을 법한 여성 인물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조선시대 여성과 관련된 글감을 찾는 이들이라면 눈여겨볼 만하다.

 

《조선왕조여인실록- 시대가 만들어낸 빛과 어둠의 여인들》

배성수·이봉학·고기홍·이종관 지음 〡 온어롤북스 〡 13,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