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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국한문 섞어 쓴 첫 주간신문 ‘한성주보’ 창간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2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35년 전인 1886년 1월 25일 <한성순보(漢城旬)報>의 복간형식으로 박문국(博文局)에서 우리나라 첫 주간신문인 <한성주보(漢城周報)>가 창간되었습니다. 이 신문은 창간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깨닫게 하는 것을 최대의 사명으로 삼았는데 1884년 4월 19일 김윤식(金允植)이 통리아문독판(統理衙門督辦, 조선 말기 외교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의 으뜸 벼슬)에 임명되면서 발간작업이 추진되었지요.

 

 

편집체재는 1단제로서 1면 16행, 1행 40자, 1호 16면 또는 18면씩 발행되었는데 규격은 세로 22.5㎝, 가로 16.5㎝였습니다. 특히 <한성순보>가 한자만을 쓴 데 반하여 이 신문은 최초로 국한문을 섞어 썼고, 내용에 따라 순한글 또는 순한문만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일부라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국민계몽에 한 발짝 내디뎠다는 것으로 평가를 받지요.

 

주보는 제4호인 1886년 2월 22일 자부터는 상업광고를 실었는데 독일인 상인 에드바르트 마이어의 세창양행이 광고주로 등장한 이 광고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광고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성주보〉는 개화문명에 앞장서서 그 사명을 다하다가 누적된 적자운영을 감당하지 못하고 1888년 7월 14일 창간 2년 6개월 만에 박문국의 폐쇄와 함께 모두 120여 호를 발행하고 폐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