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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조영남, 화가로도 돌아왔는데

연륜의 깊이와 생각의 너비가 드러나는 그런 활동 기대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90]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동족상잔의 비극 70주년을 맞은 지난해 6월 25일, 그 의미를 되새기는 보도들이 줄을 잇는 가운데 사회면 한쪽에는 이런 기사가 떴다. “조영남 그림 대작 사건, 대법원 무죄 확정”. 이 소식은 그 4년 전인 2016년 3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것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조용히 다뤄졌고 사람들의 기억에도 “아 그렇게 되었나? 그렇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을 주고 다시 역사 속으로 들어간 듯했다. 그러다가 최근 모 언론이 조영남 씨로부터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받아 연재를 시작함으로써 다시 세간에 작은 관심을 일으키고 있다.

 

80년 초반에 KBS TV뉴스에서 미술분야를 담당했던 필자는 지난 2016년 상반기에 “조영남 씨가 무명의 후배 가수를 시켜 화투짝 그림을 그리게 해 비싸게 팔아먹었다”라는 주장으로 사건이 터져 나오고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보통 사람 이상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미술 담당기자였기 때문도 있지만 바로 더 4년 전에 백남준문화재단에서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 씨를 조명하는 책을 펴낼 때 조영남 씨의 글을 받아서 책에 함께 실었고, 그때 서울 청담동에 있는 조 씨의 집을 방문해 거기서 간단한 출판기념회를 가진 인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건의 의미를 나름대로 분석하는 칼럼을 미리 썼지만, 사건의 진행 중이어서 덮어놓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 조영남 씨의 이야기가 다시 등장하게 되자 옛날 글을 다시 들춰보며 이 사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조영남 씨 사건은 지난 2009년부터 2016년 3월까지 송 모 씨 등 무명화가에게 대작(代作)하도록 했고 그렇게 넘겨받은 그림에 배경색을 일부 덧칠하거나 자신의 서명만을 추가해 구매자 17명에게 그림 21점을 팔아 판매대금으로 약 1억 5,355만 원을 받았다는 것이고, 그것이 “구매자들에게 대작 여부를 알리지 않고 마치 자신이 그린 것처럼 행세해 그림을 판매한” 것이기에 사기죄라는 것이었다.

 

1심에서는 조 씨가 대작 여부를 알리지 않은 게 구매자들을 속인 사기에 해당한다며 유죄였는데, 2심에서는 “친작 여부가 구매자에게 반드시 중요한 정보라 단정할 수 없다”라는 점과 “대작이 미술계 관행인지는 법률적 판단에 속하지 않는다” 점을 들어 무죄를 선고했다. 그런데 지난해 6월 25일에 대법원이 항소심의 판단이 옳다고 함으로써 사기 혐의가 무죄로 최종 결정된 것이다.​

 

조영남씨가 화투 그림을 발표한 것은 1973년의 첫 전시회였다. 그렇다면 그가 공식적으로 ‘화가’로서의 길을 간 것이 40여 년이 넘었다는 이야기다. 가수로서는 자신이 부른 노래보다는 남의 노래를 자신의 스타일로 다시 부른 곡들이 많았는데, 가수로서 화가를 겸업을 선언한 그의 그림, 화투짝을 이리저리 배열하고 키우고 한 그림들을 사람들이 산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화투짝이라는 소재자체가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그림은 전업 작가들의 것과 달리 기발하다는 느낌에, 유명 가수도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 “대단하네!”라는 감탄, 그러기에 언젠가는 크게 뜨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영남 씨는 원래부터 재주가 넘치는 예능인이었다. 수많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사회를 맡아 인기를 끌었고 몇 권의 수필집과 종교문제, 사회문제에 대한 책도 발표했는데, 이 과정에서 《맞아 죽을 각오로 쓴 100년 만의 친일선언》이란 책으로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다방면에서 인기를 얻은 것을 보면 그가 넘치는 재주와 끼(氣)의 소유자였음은 분명하다.

 

그는 시인 이상(李箱) 탄생 100돌을 맞아 2010년에 내놓은 책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李箱은 異常 以上이었다)》에서 가수는 노래만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반쯤 시인이라고 말했고, 고교시절 미술부장을 한 경력으로 그림을 그리고 미술에 대한 책도 내는 등 문학과 미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관록을 보여왔다.

 

 

“벌판한복판에꽃나무가하나있소…”라는 이상의 시(詩)를 설명하면서 조영남 씨는 서울 한복판에 ‘조영남’이란 이름의 꽃나무가 하나 있는데​

 

“매우 독특한 꽃나무이기 때문에 그 꽃나무는 노래도 열심히 부르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글도 열심히 쓰고 있다. 그러나 타고난 재주 없이 마구잡이로 노래, 그림, 글 따위의 재주를 부리다 보니 아무도 알아주질 않는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것은, 타고난 재주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이를 한 그릇에 담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기 전에 꼭 쓰고 싶었다는 이상에 관한 책을 통해 그는 이상이 활동하던 1930년대 우리나라의 문단뿐 아니라 세계 문학계에 대한 만만치 않은 지식과 내공을 보여준다. 그가 쓴 다른 책들도 나름대로 그 방면의 문제들을 콕 찝어내고 있다.

 

“이상은 다른 시인들처럼 자연이나 풍경이나 사소한 감정, 혹은 삶 따위에 경탄하거나 호들갑 떨지도 않았고,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삶의 역경에 징징대지도 않았고, 보들레르처럼 악에 받쳐 분노를 터트리지도 않았다”라는 대목을 보면 그가 얼마나 사물의 핵심을 잘 파악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은 그가 ‘딴짓 애호가’였기에, 노래나 다른 데서 잘 나가는 사람이 남의 영역에 들어와서 설친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그리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미술계에서 다른 사람이 작업을 도와주는 것은 관행이었다. 내가 아는 화가도 큰 그림의 밑작업을 도움을 받는다. 조각의 경우에도 큰 석조작품 등은 개념과 얼개만 제시하고 구체적인 작업은 석공들이 하는 것이 보통이다. 현대미술에 있어서는 더욱 그 작업 보조원이나 조수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그런 만큼 이번에 ‘대작 여부’는 더는 시비의 소지가 없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법원은 미술작품의 가치 평가 등은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법 자제 원칙을 지켜야 한다”라는 대법원의 판결 그대로 위작이든 아니든 법이 들어가 재단할 일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진 것 같다. 이번 판결은 고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논란의 종식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조영남 씨는 재판정에서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너무 오래 화투짝 가지고 만지다가” 쫄딱 망했다고 비꼬아 말했지만 이제 사기그림이라는 비난은 받지 않고 그림 자체로 평가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화투짝이 예술적인 소재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 차원은 넘어섰고, 이제는 어떤 그림을 좋아서건, 투자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건, 사 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것으로 그 작품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리라.

 

최근 인기연예인인 솔비가 아이스크림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내놓았는데, 일부 표절이란 지적에도 높은 값으로 판매된 것도 이런 현실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조영남 씨는 이제 오랜 법정 시간을 넘어서서 그림이든 노래든 방송이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 놓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조 씨도 벌써 칠십 중반을 넘은 나이이기에, 아마도 이제는, 벌판의 꽃나무처럼 혼자서 세상을 이곳저곳 마음대로 돌아다니던 것을 멈추고, 그동안 벌인 일을 정리하고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와 가는 방법을 정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그가 언론에 뭔가 이야기를 남기자고 한뜻이라 생각된다. 차제에 그가 어떤 새로운 것보다는 긴 인생을 살아온 연륜의 깊이와 생각의 너비가 드러나는 그런 활동을 기대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