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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49. 일제강점기 조선인 길들이기에서 온 말 ‘서정쇄신’


1958년 5월 8일(적십자의 날)에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병석에 있거나 은퇴한 교사들, 불우한 처지의 은사를 방문하거나 위로한 것을 시초로 스승의 날을 제정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며, 1963년 5월 26일에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J.R.C.)에서 5월 26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고 사은행사를 하였으며, 1965년부터는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로 변경하여 각급학교 및 교직단체가 주관이 되어 행사를 실시하여왔다.

스승의 날을 세종대왕 탄신일로 정한 이유는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이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우리 민족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그 뒤 1973년에 정부의 서정쇄신방침에 따라 사은행사를 규제하게 되어 '스승의 날'이 일시 폐지되었으나, 일부 학교에서는 이 날을 계속 기념하였고, 1982년 스승을 공경하는 풍토조성을 위하여 다시 부활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날은 기념식에서 교육에 큰 공헌을 한 교육자들에게 정부에서 훈장수여와 표창, 포상을 하며 수상자에게는 국내외 산업시찰의 기회가 주어진다.”   -다음- 

세종대왕이 태어난 날은 5월15일이다. 위대한 한글을 만든 우리들의 스승이라 그가 태어난 날을 스승의 날로 했다지만 오늘날 이 내용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형식적인 ‘스승의 날’은 커지고 세종대왕 탄생일은 스리슬쩍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세종의 탄신일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주제는 세종의 생일이 아니다. 스승의 날도 아니다. 스승의 날 설명 속에 나오는 ‘서정쇄신’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니, “서정쇄신(庶政刷新) : 여러 방면에서 정치 폐단을 고쳐 새롭게 함”이라고 천연덕스럽게 풀이해놓고 있다. 이런 식이니 국민이 그냥 한자말이려니 하고 들여다 쓰는 것 아닌가 묻고 싶다. 2010년 5월 11일 현재도 이 말은 ‘아주 좋은 말’ 인양 인터넷에는 숱한 예문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요즈음 정치의 계절이라 날개 돋친 듯 쓰이고 있으니 안타깝다. 

더욱 슬픈 것은 <망국 100년, 부패 척결의 새 전환점 돼야>라는 기사에서도 <서정쇄신>이란 말이 우리 겨레를 개조시키려 한 미나미 총독의 ‘조선통치 5대 목표’였음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조인스뉴스 2009. 12. 20’ 자에 실린 기사를 보자. 

“며칠 앞으로 다가온 새해는 한일병합 100년이 된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했다. 역사는 ‘과거가 현재에게 들려주는 대화’이다. 과거의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내년 8월 29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자는 주장도 있다. 대한제국의 멸망에는 여러 가지 인과가 있겠지만, 당시를 지켜본 서양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사회 지도층의 부정부패를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했다. <중략> 

유명한 여행 작가 이사벨라 비숍도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1897)』에서 비슷한 소감을 피력했다. ‘조선의 관리에게는 청렴결백의 전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국리민복에 무관심한 채 개인의 치부에만 주력하고 탐욕은 억제할 길이 없다. 과거제도는 뇌물, 흥정, 매관매직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고 공직 임명 기능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아무리 외국인의 피상적 관찰이라 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당시 일제는 조선의 부패 상황을 과장하면서 “극소수 흡혈귀 계급을 제거하고 피압박 조선 민중을 해방해야 한다”는 논리로 국권 침탈을 정당화하려 했다. 조선이 부패했기 때문에 일본의 합병 통치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논리는 국제사회에서 먹혔다. 합병 과정에서 주변의 어느 나라도 일본을 비난하지 않았던 슬픈 역사의 이면에는 그런 사정도 있었다."   

우리는 해방 이후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부패 척결을 위한 노력도 계속됐다. 서정쇄신, 특명사정반, 범죄와의 전쟁, 금융실명제, 수차례의 특별검사제 등 끊임없는 시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실제로 사회가 많이 깨끗해졌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4~5급 공무원들이 부패·비리 혐의로 구속되면 일간지 사회면 톱기사를 장식했다. 하지만, 이제는 전혀 다르다. 검찰이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고 현직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들을 수사했지만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언론과 사회의 감시망이 촘촘해졌고 누구라도 범죄 혐의가 드러나면 처벌을 면하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중략> 

우리가 100년 전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과거의 잘못을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는 비상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후략> 

용이 길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제에 나라를 내준 100년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다. 내부 부패를 없애고 서정쇄신을 하여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하필 서정쇄신이란 말인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이른바 내지인(일본인)을 위한 ‘식민지 조선 상황’을 알리려고 잡지 <모던일본>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일본 내에서 대박을 터뜨리자 이듬해인 1940년 <조선판> 특집을 만든다. 그 주된 내용은 ‘조선인의 참상’이 아니라 ‘살만한 조선인’ 이야기 위주로 그 가운데는 살결이 곱고 영양상태가 좋아 포동포동 살찐 조선기생 이야기 등등 일반 백성과는 괴리가 있는 글들이 많았다. 그 탓에 한반도 사정을 잘 모르는 동경의 지식인들은 조선의 사정을 엉터리로 알 수밖에 없었다. 곧 조선이 평화로운 삶을 구가 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고, 제국주의 일본과 조선이 사이좋게 미래건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잡지 <모던일본 1940, 조선판>에 보면 ‘역대 조선총독을 말하다’에서 이노우에오사무(井上收)가 미나미지로(南次郞) 총독의 탁월한 조선통치를 자랑하는 글이 나온다. 아다시피 1940년은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로 조선인은 ‘초근목피’와 ‘민족말살정책’으로 신음하는 중이었으나 이러한 민중을 외면한 채 조선기생들의 화려한 파티나 소개하고 있으니 이 책은 조선의 실상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또 왜곡한 책이다.  

여기에 ‘미나미지로의 신념’이란 게 있는데 그는 ‘조선과 만주’를 하나의 축으로 하는 동아 신질서 구축을 위해 불철주야 뛰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 신념을 5가지로 집약한 것 중에 ‘서정쇄신’이 나온다. 소름끼치는 그의 신념 5가지를 보자. 

1)국체명징(國體明徵)
2)선만일여(鮮滿一如)
3)농공병진(農工竝進)
4)교학진작(敎學振作)
5)서정쇄신(庶政刷新)

‘서정쇄신’이란 말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많이 듣던 말로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2권, 106쪽) 기사에 따르면 1939년 3월 31일 자 <만주신문>에 ‘혈서로 군관 지원한 조선인’의 주인공으로 대서특필된다. 내용인즉슨, 1937년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3년을 보내다가 군인이 되고자 일제가 세운 만주국 군관으로 1차 지원했다가 낙방하자 ‘붙여만 주면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 지원서를 보내 일본군부를 감동시켜 합격시켰다는 기사다. 1944년 4월 일본육사 57기생으로 졸업한 이후 한국의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을 하게 되지만 일본육군사관학교의 이력은 그의 사상과 철학을 지배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명치유신을 본뜬 ‘10월 유신’이나 ‘서정쇄신’ 같은 ‘조선통치 신념’을 그대로 들여다가 쓴 것을 보면 그에게서 우리는 일본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박정희대통령이 ‘서정쇄신’을 들여다가 1970년대 한국사회에 퍼뜨린 것을 모르는 순진한 백성은 여지껏 좋은 말인 줄 알고 즐겨 쓰는데 특히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이 말을 쏟아내고 있다. 기억을 더듬으면 시골 초등학교 교무실에 박정희 대통령 사진과 서정쇄신 문구의 액자가 나란히 걸렸던 기억이 새롭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새롭게 한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곰곰 생각 안 해도 알 수 있는 말 아닌가? 창씨개명과 황국신민화 등이야말로 대표적인 조선인 길들이기다. 조선인에서 일본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서정쇄신’임을 까마득히 모르고 아직도 금과옥조처럼 모시고 있으니 이를 기뻐할 자는 ‘미나미지로 총독과 그 일당’ 들일 것이다. “바까야로 조센징!(바보 자식들! 내가 너희를 일본인으로 고치려고 한 말인데 너희는 누굴 개조시키려고 이 말을 지금도 쓰냐? 하하핫...” 지하에서 미나미지로 그가 거만하게 웃는 듯해 자못 역겹다. 

이런 더러운 말을 국가원수가 들여다가 턱 하니 국가 철학으로 내걸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골 면사무소며 전교생 열 명도 채 안 되는 두메산골 초등학교 교무실에도 버젓이 미나미지로의 5대 조선통치 목표가 걸렸던 시절이 있었으니 이런 웃음거리가 어디 있으며 부끄러운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의 국어정책을 총괄하는 국립국어원조차 이 말의 ‘출처’를 확인하지 않고 그저 ‘정치를 새롭게 하는 말’로 풀어놓고 있다. 국어는 한나라의 철학이고 자존심인데도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고 있다니 이런 사전을 보고 자라야 하는 학생들을 생각하면 밤잠이 안 온다. 민족적 자존심이 없이 ‘말이면 다 끌어다 쓰는 꼴’은 겨레의 미래를 해치는 일이 아니던가!

더 가관인 것은 어떤 말이 일제 순사 나라 말이고 어떤 말이 우리 토박이말인지를 가려주어야 하는 기관이 손을 놓고 있는 점이다. ‘서정쇄신’이란 말은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쓰지 말아야 할 말이며 그 유래를 똑똑히 밝혀두어야 한다. 유래를 알면 쓰라고 해도 쓰지 않을 우리 국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