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저항정신의 으뜸 석주 권필 시비를 찾아서

행주산성 역사공원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외척 중에 새로 귀하게 된 사람이 많아
붉은 대문이 궁궐을 둘러쌌네
노랫소리, 풍악소리에 놀음 잔치 일삼고
갖옷과 말은 가벼움과 살찜을 다투네
단지 영화로움과 욕됨을 따질 뿐이지
옳고 그름은 수고로이 묻지도 않네
어찌 알리오 쑥대 지붕아래서
추운 밤 쇠덕석 덮고 우는 백성을 !
(詠史, 3: 155) 


뭔가 예사롭지 않은 글이다. 구중궁궐에서 호화호식 하면서 추운 밤 한뎃잠 자는 백성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석주 권필의 시는 매양 이렇다.  


충주의 비석 돌 유리처럼 고우니
수천 명이 뜯어내고 수만 바리 실어내네
물어보자 그 돌 실어 어디로 옮겨가나
실려가서 세도가의 신도비 된다 하네
그런 집의 신도비는 어느 누가 지어내나
글씨체도 굳세고 문장력도 기이하지
한결같이 적는 내용 이 어른 살았을 때
받은 자질 배운 학식 또래 중에 빼어났도다
임금을 섬김에는 충렬하고 강직했고
집안에 지낼 적엔 효순(孝順)하고 인자(仁慈)했다
<권필, 충주석(忠州石) 가운데 일부> 


   

             ▲ 고양 행주산성 아래 역사공원(행주나루터) 안에 있는 권필 시비


   
               ▲ 석주 권필의 생애를 적은 시비 뒷면 -해적이(연보) 이윤옥- 


권필의 눈에는 천년만년 돌비석에 이름 석 자를 남기려고 발버둥 치는 관리들이 가소롭기만 하다.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강직한 선비의 자세로 짧은 44살의 생을 살다간 석주 권필은 지금으로부터 444년 전인 1569(선조 2) 1226일 고양 현석촌에서 아버지 권벽과 어머니 경주 정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에 능히 글을 지을 만큼 뛰어난 글재주를 지닌 선생은 조선왕조 창업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권근의 6세손이다. 선생이 살다간 조선 중기는 밖으로는 임진왜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고 안으로는 끊임없는 당쟁으로 인한 사대부사회의 분열이 극에 이르던 때였다.  


석주 권필은 19살에 진사 초시에 장원하고 복시에서도 장원하였으나 답안지의 글자 하나가 틀리다는 이유로 장원이 뒤바뀌는 불운을 겪게 되는데 이 또한 극심한 당쟁이 빚어낸 희생의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스승이던 송강 정철이 유배 길에 오르는 것을 보고 그는 한평생 벼슬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혹독한 가난과 곤궁 속에서도 높은 벼슬과 부귀영화 보기를 썩은 흙만도 못하게 여기며 꼿꼿한 자세로 시와 술을 벗 삼았다. 특히 선생의 지배층에 대한 비판의식은 날카로웠으며 이들을 소재로 풍자시를 쓸 때에는 그 기상이 서릿발 같았다 

   
                                     ▲ 권필(權韠)의 시문집 ≪석주집(石洲集)≫


석주 선생의 대표작은 궁류시(宮柳詩)가 있고 또한 지체 높은 벼슬아치들을 찬양하는 신도비(神道碑)를 질타하는 충주석(忠州石)’도 풍자시의 쌍벽으로 꼽힌다.  


궁궐 버들 푸르고 꽃잎 어지러이 날리는데(宮柳靑靑花亂飛)
성 가득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양 떠네(滿城冠蓋媚春暉)
조정에선 입 모아 나라의 태평함을 축하하는데(朝家共賀昇平樂)
누가 포의(벼슬없는 선비)의 입에서 위태로운 말이 나오게 했나(誰遣危言出布衣) 


이 시는 1612년 친구 임숙영이 왕실의 외척인 유희분 등의 방종을책문(策文)에서 공격하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 격분하여 지은 시이다. 이 한편의 시로 그는 장독(杖毒, 매를 심하게 맞아 생긴 상처의 독)에 걸려 귀양길에 오르다 동대문 밖에서 44살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석주 권필과 동갑내기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석주소고서(石州少稿序)’에서 석주를 평하길 나의 벗 권여장(허균이 부르던 권필의 호)은 약관에 시를 높이 받들어 그 아취가 옛사람보다 낫다고 할 만한데 세상에서 이를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 나는 매양 오늘날 시에 능한 사람을 일컬을라치면 반드시 여장이다.”라고 말 할 정도로 석주의 시세계를 높이 평가했다.  


오호라! 세상에서 시로써 선생을 보는 것은 얕은 짓이다.”라고 우암 송시열이 석주별집발(石州別集跋)에서 밝히듯 석주 권필은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소설도 남겼다 



   
                       ▲ 바로 가까이에 있는 생육신 추강 남효온 시비


허균과 권필은 당대의 빼어난 시인일 뿐만 아니라 고전소설사에서도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는 맞수라 할 수 있다. 허균의 대표 소설은 홍길동전이며, 권필의 대표작은 주생전(周生傳)’이다. 허균이 신분갈등이라는 사회적 주제를 가지고 정공법으로 더 나은 삶을 설계했다면, 권필은 애정갈등이라는 남녀 사이의 문제를 통해 다분히 우회적으로 현실 삶의 불안을 떨쳐내려 했다. 주제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두 작품에는 속박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오롯이 담겨 있다.” 라고 이형대 교수는 두 사람의 작품세계를 견준다. 


석주 권필이 시대의 아웃사이더로 한 평생을 살다 갔다고 후대 사람들은 평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석주 권필만큼 시대의 한가운데서 날카로운 비판의식의 칼을 휘두른 사람도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고양시에서는 2009314일 석주 권필 선생의 고향인 현석촌(, 행주산성 역사공원)에 시비를 세웠으며 석주 선생을 자랑스러운 고양인으로 선정했다(2008). 


권율장군의 대첩비가 우뚝 솟은 행주산성 아래 아담한 행주 공원에는 생육신 추강 남효온의 시비도 나란히 세워져 있어 사계절 흐르는 한강의 물빛만큼이나 투명한 삶을 살다간 두 큰 유학자의 삶을 되돌아보는데 그만이다. 더불어 행주산성 부근에는 꽤 괜찮은 찻집과 먹거리 집들도 있어 나름 의미 있는 답사가 될 것이다.
 

<가는 길>
고양시 행주산성 아래 행주나루터 쪽 역사공원 안에 시비(詩碑)가 서 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2(행주산성 관리사무소 031-8075-4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