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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에 뿌리내린 성씨들 ➀ 파평윤씨

파주문화통신 (21)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조선 중기(1530)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영조 41)까지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아 책으로 엮은 <여지도서>에서 파주의 성씨를 보면 파주에는 지(智), 윤(尹), 방(邦), 백(白), 피(皮). 봉성지역엔 서(徐), 염(廉), 야(夜), 차(車). 적성지역에는 유(劉), 신(申), 김(金), 노(盧), 최(崔), 현(玄), 조(趙), 서(徐), 양(梁). 교하 지역에는 노(盧), 김(金), 옥(玉), 박(朴), 윤(尹), 전(田). 심악지역엔 이(李), 박(朴), 전(全). 석천지역에는 야(夜), 염(廉), 차(車), 호(扈). 등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파주 관적 성씨인 윤, 야, 노, 염, 김씨 외에도 여러 성씨가 오래 전부터 파주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파평윤씨 정정공파 시제

파주 지역은 오랜 옛날부터 ‘서교(西郊)’라고 불려지면서 고려와 조선을 이어 도성 근처에 있고,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터를 잡은 토착세력들 또한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 기득권을 놓치지 않고 주요 사림들을 배출하거나 왕실과의 혼맥을 통하여 정치적인 주도권을 이어나갔다.

 파주는 고려 때는 수도 개성과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가까워 서울 도성과의 접근성이 용이해 사족들이 벼슬생활을 할 때는 경저(京邸)를 두고 서울에서 생활하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는 향저(鄕邸)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고, 사후에는 이곳에 묘역과 위토를 마련하여 후손들이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오래된 동족마을이 형성되는데 이를 용이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지리적 조건으로 한강과 임진강을 끼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한강과 임진강의 지류인 곡릉천과 문산천 등은 큰 하천이 배로 이동할 수 있는 편리한 교통 여건을 만들어 주었으며 이 수상교통을 통해 서울 도성 출입과 납세, 수조가 용이하게 이루어졌고, 다른 경기지역의 사족들과의 교류와 소통 또한 수월하였던 것이다. 

   
▲ 파평윤씨 족보

이밖에 잦은 범람으로 농지로 활용하지 못하던 하천 주변을 사족들이 보와 둑을 쌓고 개간하여 드넓은 농토를 소유하여 농장을 경영하면서 파주지역에 뿌리를 내리기도 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안목, 안원 등이 임진강 유역을 개간하여 농장을 크게 경영하면서 별서를 두고 정착하여 후손들이 퍼져나간 순흥 안씨는 개간으로 인해 후손들이 정착하여 뿌리를 내린 경우이다.
 

   
▲ 문중 분암 성재암에서 발견된 족보 편찬용 목판

 조선시대에 이러한 지리적 여건을 이용해 정착한 성씨들은 임진강 유역 사목리에 장수 황씨,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교하 곡릉천 주변 송촌리에 교하 노씨, 양천 허씨, 문발리에 경주 이씨, 와동리 파평 윤씨 등이 있으며 문산천 주변으로는 능산리 아가뫼마을 함안 조씨와 내포1리 강릉 김씨, 내포4리와 당동리 창녕 성씨, 위전리 수원 백씨, 도내리 청송 심씨 등이 있다.

 파주에 사족들이 입향하여 정착하는 계기를 살펴보면, 대체로 개간으로 인한 입향, 혼인으로 인한 입향, 사패지를 기반으로 한 입향, 관직으로 인한 입향, 정치적 영향으로 인한 입향 등이 있다.

   
▲ 한식절사 때 문중 종인들이 제배하고 있다.

혼인으로 인한 입향의 경우는 월롱면 일대에 수원 백씨와의 혼인으로 정착한 함안 조씨와 영월 신씨와의 혼인으로 들어온 창녕 조씨, 그리고 안동 권씨 권근의 집안과 혼인하여 파주에 입향한 대구 서씨, 우계 성혼 집안의 창녕 성씨와의 혼인으로 정착한 평산 신씨 등이 있다.

 사패지로 인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는 성씨는 파평 윤씨, 장수 황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연안 이씨 등이 있으며 정치적 영향으로 인한 입향은 강릉 김씨, 개성 내씨, 창녕 성씨, 거창 신씨, 진주 류씨 등의 경우를 일례로 볼 수 있다.

 필자는 2008년도 5월 부터 파주시 읍면동 별로 마을성씨 조사표를 배포하여 수집한 자료와 문중 임원들의 인터뷰, 문중 소장 자료, 족보 등을 토대로 주요 세거성씨들의 입향 동기와 정착과정을 정리해 보았다.

 앞으로 몇차례에 걸쳐 파주에 세거해 오는 성씨들의 입향과 정착과정. 그리고 인물에 대해 연속적으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우선 파주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를 살펴보기로 한다.
 

             파평 윤씨(坡平尹氏)

파평 윤씨의 시조는 고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윤신달(尹莘達)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어 고려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다고 한다. 윤신달은 경주대도독부 대도독(慶州大都督府 大都督)으로 임명되어 재직한 후 그곳에서 사망하여 경북 영일군 기계면 봉계동에 안장되었다.
 

   
▲ 시조 윤신달의 전설이 있는 파평용연

삼한공신을 시조로 한 파평 윤씨는 윤관 대에 와서야 비로소 명문의 가문으로 등장하는데 윤관의 7대손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등 꾸준하게 인재를 배출하여 조정의 고관 및 요직에 포열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문벌귀족인 인주 이씨(仁州李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 등의 거족들과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고려 후기까지 고려 정계를 주도해 나갔다.

 윤관은 고려 중기 문과 무를 겸비한 재상으로 동북면의 여진족을 정벌하여 9성을 쌓고 공험진에 비를 세워 우리의 영토임을 알린 인물로 문하시중, 지군국중사가 되어 파평의 다른 이름인 영평현(鈴平縣) 개국백에 봉하여짐으로써 후손들이 파평을 본관으로 삼았다.
 

   
▲ 고려 때 문화시중을 지내고 동북9성을 탈환한 윤관대원수의 묘역

윤신달의 후손은 5세 관(瓘)에 이르기까지는 독자로 내려와 파가 없다가 관이 아들 7형제를 두었는데 둘째와 일곱째는 대를 잇지 못했고, 셋째와 넷째는 출가스님이 되어 후사가 없다. 첫째 언인(彦仁)과 다섯째 언식(彦植), 여섯째 언이(彦頤)의 후손이 이어져 내려왔다.

 첫째 아들 언인(彦仁)의 후손들은 함안(咸安)파와 남원(南原)파가 되었고, 다섯째 언식의 후손들은 언식의 증손자 덕산군(德山君) 은형(殷衡)을 시조로 하여 덕산파가 되었다. 문강공 언이의 손자인 인직(仁直)은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공으로 신령(新寧)파 시조가 되었다. 문강공 언이의 8세손 혁(赫)은 고려 충숙왕의 부마가 되어 야성군(野城君)에 봉해져 야성파라 불렸다. 야성은 지금의 경북 영덕(盈德)의 옛이름이다.

파평윤씨는 여덟 개의 큰 집안의 파가 있어 팔대방파(八大房派)라고 하였는데 남원파와 함안파를 제외한 여섯파는 모두 문숙공의 여섯째 아들 문강공 언이의 후손들로 구성된 파들이다.

여섯파 중 문정공파(文定公派)는 언이의 큰 아들 인첨(鱗瞻)을, 대언공파(代言公派)는 언이의 6세손 안적(安 示+啇)을, 소정공파(昭靖公派)는 언이의 9세손 곤(坤)을, 판도공파(版圖公派)는 언이의 8세손 승례(承禮)를, 소부공파(小府公派)는 언이의 6세손되는 암(諳)을, 태위공파(太尉公派)는 언이의 6세손 되는 안비(安庇)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 향사에서 다섯분의 불천위 조상께 한식절사 예를 올리고 있다.

 파평 윤씨 가운데서 주로 판도공파와 소정공파에서 대대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파평윤씨의 약 80%를 차지한다. 파주지역에도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판도공파는 승례(承禮)의 아들 대에서 다시 1남 규(珪)의 제학공파(提學公派)· 2남 보로(普老)의 부윤공파(府尹公派) 4남 번(璠)의 정정공파(貞靖公派)로 갈라지며, 그 중 정정공파가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집안이다.

정정공파의 시조는 번(璠, 1384년~1448년)으로 고려말 판도판서 승례(承禮)의 넷째 아들로서 3남 8녀 중 제7녀가 수양대군에게 출가하여 후에 정희왕후가 되자 공조참의․경기도도관찰사·대사헌․ 판중추원사를 역임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묘는 교하읍 당하리 정정공파 묘역에 있으며, 아래에 부인 인천이씨 묘가 있다.
  

   
▲ 파주 정정공파의 중시조가 되는 정정공 윤번. 세조 정희왕후의 아버지이다.
 
당하리 정정공파 묘역에는 윤번의 3남 사흔(士昕)과 중종 비(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아버지 여필(汝弼),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아버지 지임(之任), 을사사화의 주역 원형(元衡)의 묘소 등 정정공파 후손의 묘 100 여기가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정정공파의 후손들은 주로 번의 셋째아들 사흔(士昕)의 후손들이 퍼져 번의 묘역이 있는 당하리와 근처 와동리, 야당리에 모여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데 현재 200여호가 거주하고 있으며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 한식절사 때 읽었던 축문

 소정공파의 시조는 윤곤(尹坤 ?~1421년)으로 판개성부사 승순(承順)의 아들이다. 이조판서․ 우참찬까지 지냈으며 시호는 소정(昭靖)이고 묘는 파주읍 연풍리에 있다. 소정공파의 후손들은 문산 운천리 대덕골 및 파주 여러 지역에 퍼져 거주하고 있다.

파평윤씨는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전국에 221,477가구, 713,947명, 파주지역에 1,331가구 4,3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린경제/한국문화신문 얼레빗=권효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