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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청빈이 아닌 청부사상을 실천한 청백리

[무신 선비 열전 2] 정무공 최진립 장군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교수]  한국 선비는 평소에 6예를 닦고 수련과 지식을 연마했던 실천 지식인이요 지도 계층이었다. 학문이 다하면 과거를 보아 조정으로 나가 배움을 실천했으며 나라기 위기에 쳐 했을 때 선비들은 분연히 일어나 목숨 걸고 저항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말의 의병이 좋은 그 예이다. 남명조식 학파에서는 50명의 의병장을 배출했다. 대한민국의 건국도 따지고 보면 선비도 활동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선비는 무위도식의 한량이나 경제적 무능력자, 고집불통의 원리주의자 등으로 매도되고 왜곡되어 왔다. 일제의 간악한 통치전략으로 선비 도를 매몰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물론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문치주의에 치중하여 양반 구도에서 문신 위주로 일관했다 그러나 국난을 당하자 문신들은 지리멸멸한 모습을 보여주며 실천 없는 명분론에만 집착했고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문신들은 그 자리에 눌러 앉았다. 문신 등이 절의나 충의를 지키다 자기를 희생이나 순교를 하는 경우는 정쟁(당쟁)패배에서만 보여 주었을 뿐이다. 무신선비열전 두 번째 기술한다

   
▲ 정무공최진립(崔震立 1568~1636)장군전망(戰亡)터와 지명 유래비

근거기록 -인조 34, 15(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 526(계사) 1번째 기사/

“'정세규(鄭世規)가 험천(險川)에서 전투를 치룰 때 좌영장최진립(崔震立), 우영장심일민(沈逸民), 별장 황박(黃珀), 중군 이건(李楗), 참모관 이경선(李慶善), 방량차사원(放粮差使員) 이상재(李尙載), 군기차사원김홍익(金弘翼), 심약(審藥) 이시량(李時亮)을 대동하고 갔는데, 심일민은 힘껏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을 뻔 하여 벗어났고, 최진립 이하는 모두 진중에서 죽었습니다. 해조에게 표창하고 증직하게 하고 심일민은 관직을 상으로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유래비설치 지적도 - 버스 정류소에 기부체납 방식으로 설치, 전절역은 동천역에다 동천 정무역이라 병기한다. 청원예정)

   
 ▲ 수지선 4개 역 이름은 선현을 기리는 것으로

동막(東幕)과 동막천, 동막마을은 동천동 머내에서 고기리로 올라가는 중간에 있다. 동막이란 이름은 원래 수지읍이 수진면으로 있을 때 상손곡과 더불어 동막리로 있던 것이 지금의 머내 일원이었던 원천동과 합하여 동천리가 되면서 지금의 동막마을로 남게 되었다. 동막마을 앞으로 흐르는 물이 용인-광주경계인데 이곳에 지나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주막이 있었고, 이 주막이 동막마을에서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쪽에 주막이 있는 동네라고 불리던 것이 동막이 됐다는 것이다.  

머흐내 (險川)와 머내 :

영조 년간에 발간한 용인현 읍지에 보면 험천에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험천의 정확한 위치는 여러 가지 고증에 의해 동막 마을 아래에 해당된다. 고어(古語)"머흐다"라는 말이 있는데 험하다는 뜻이며 " "는 천()을 뜻하므로 한자의 의역하면 험천이 된다. 머흔내가되고 속음 탈락되면서 머내로 변형된 것인데, 한자로 다시 의역하니 원천(遠川)으로 표기한다. 

철령 높은 봉에 구름이 머흘레라 (하구나)
고신 원루를 비 삼아 띠워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 뿌려본들 어떠리 (이항복)


어와 저 조카야 밥 없이 어찌 할고
어와 저 아자바 옷 없이 어찌 할고
머흔 일 다 일러사라 돌보고저 하노라(정철)

머내는 옛 원천동의 일부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동막리(東幕里)와 원천동(遠川洞)이 통합하여 동천리가 되면서 원천동은 머내로 남게 되었다.(동막동의 동자와 원천동의 천자를 따서 동천동이라 했음) 또한 원천(遠川)이란 동막 천과 윗손골서 내려온 물이 머내위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 물줄기는 그 발원지가 다 광교산이다.
 

험천현 전투와 지명의 유래

대동여지전도에는 원우천이란 지명이 있는데 용인 향수산에서 발원하여장천물을 받고 탄천으로 흐른다. 동막천과 성복천이 합수되어 흐른다. 이곳은 교통의 요지로 1770년 신경준의 도로고의 의하면 조선시대의 팔도 육대로(八道六大路)중 한성과 부산진을 잇는 제4도로 북으로는 15리의 판교와 남으로는 10리의 사원(死院-구흥 또는 보시원 잘못)의 중계지여서수진면(지금의 수지)2개 주막 중 하나가 이곳에 있었다 한다. 주막은 파발 말들이 잠시 들려 휴식과 음식을 들고 갈 수 있는 곳으로 수진 면에는 풍덕천 주막과 머내 주막이 기록에 나온다. 수진,수지, 탄천, 원우천 등의 지명이 보인다, 낙생면과동막골 

동막동[일명 동원동], 용인시 원천동의 일부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동막동(東幕洞)과 원천동(遠川洞)을 합하여 낙생면 동원리가 되었다. 동막천으로 따라 서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동원터널로 이어지는 용인서울고속도로 옆을 통해 동원2교로 이어진다. 동천2교를 지나면 용인 땅이다. 저수지 물길을 따라 저수지 아래 철조망에서 길로 수문을 따라온 길과 만나 낙생 저수지 뚝으로 철망을 따라 이어진다.  

동천2교 다리를 건너면 동막골 끝 마을이다. 동막골에는 예부터 수지 동막골에는 천하대장군 장승을 분당 동막골에는 지하여장군 장승을 만들어 두 마을이 하나됨을 보이는 한 마을이 동막골이다. 용인 동천동동막골 성남 조원동 동막골 사람들이 한데 모여 소 한마리로산제를 지냈으며 두 장승아래 수원 30, 용인 50, 안양 30리라고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를 겸한 장승을 만들었다. 지금은 성남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