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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정신'을 되살리자

하늘의 이치를 알고 세계의 중심에 서라

“세종정신”을 되살리자 8, 《칠정산내편》을 펴낸 까닭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세종이 임금이 된지 4년째 되던 1422년 음력 11.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이 일어날 때가 되자 세종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은 초저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종은 하얀 옷을 입고 인정전의 제단 위에 올라가 일식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많은 신하들도 하얀 옷을 입고 임금 곁에서 임금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다 

   
▲ 고려 사람들은 물동이에 물을 담고 해가림(일식)을 보았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 개기일식 모습(왼쪽), 일식장면을 관찰하는 모습(《일식과 월식 이야기》- 나일성.이정복)

일식 계산을 담당한 이천봉 과학자는 더욱 초조했다. 미리 계산한 것에서 어긋나면 큰일 나기 때문이다. 결국 일식은 계산한 시간보다 무려 15분 늦게 일어났다. 이때는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원리를 파악하여 표준 시간을 정하는 것은 중국 황제의 권한이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만든 천문학책인 역법서를 들여다 사용하니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하늘은 중국의 하늘이 아니었다. 

역법서를 중국에서 들여온다 해도 조선 하늘의 움직임을 알고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조선 임금만의 특권이었기에 세종은 하늘이 돌아가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따라서 일식을 정확히 맞춰야 임금의 권위가 올라가는 것인데 15분 차이가 났으니 많은 신하들은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 할 수박에 없었다. 그래도 15분 차이는 있지만 해가 다시 나타나자 임금이 해를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안타깝게도 일식을 계산한 이천봉은 곤장을 맞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종은 하늘의 움직임을 정확히 알기 위해 과학 연구와 과학 기구 개발에 더욱 힘을 쏟게 되었다. 훗날 세종은 그 꿈을 온전히 이루었다. 궁궐에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천문 관측소 간의대를 설치하고 종합과학연구소인 흠경각을 지어 조선의 과학 수준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흠경각은 세종의 침실 옆에 있어 세종은 여기에서 밤낮으로 연구하였다. 이곳에는 각종 천문 기기를 비롯하여 세계 최고의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등이 설치되어 백성을 위한 과학 연구를 수행하였다. 

세종은 기본적으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다스린다는 천명사상을 실천하였다. 오늘날의 기상대와 같은 서운관에 천문과 지리, 날씨, 시간 측정 등 맡기고 중국의 과학기술을 우리 풍토에 알맞게 수정 개량 보완하여 토착화하였다.

이 사건이 있는 뒤 23년 뒤인 세종 27(1445)에 세종의 과학 연구와 과학 정책의 핵심 인물인 이순지는 세종의 명에 의해 동양 과학을 총정리한 책인 제가역상집을 펴내면서 끄트머리에 이렇게 썼다. 

임금의 정치는 하늘의 이치를 파악하여 때를 맞추는 것[관상수시(觀象授時)]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우리나라 날씨 살피는 자들이 그 방법을 소홀히 한 지가 오래인지라, 1433년 가을에 우리 전하께서 거룩하신 생각으로 모든 천문 기계와 책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모두 지극하게 정묘하고 치밀하시었다. - (줄임) - 진실로 이 책에 의하여 이치를 연구하여 보면 생각보다 얻음이 많을 것이며, 더욱이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게 힘쓰시는 정사가 극치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세종의 명에 의해 동양 과학을 총정리한 책인 《제가역상집》, 이순지가 1445년 펴냈다.

   
▲ 우리 풍토에 적합한 천문 책으로 일식 같은 천지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계산해내는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1444년 이순지와 김담이 펴냄

세종은 자주적이면서 실용적이고 민본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천문 · 역법을 추진하여 명나라 황제가 내려주는 대통력보다는 우리 풍토에 적합한 천문 책으로 일식 같은 천지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계산해내는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펴냈다. 중국의 천문 달력에 원나라의 <수시력>, 이슬람의 <회회력>을 융합하여 만들어낸 우리 고유의 천문 달력인 셈이다. 세종 24년인 1442년의 일이었다. 훈민정음 창제 1년 전이다. 

칠정은 오행인 불물나무쇠흙에다가 해와 달을 가리킨다. ’일주일요일을 생각하면 된다. ’역법(曆法)‘‘() 대신 쓴 것인데 하늘의 흐름, 이치를 뜻한다. 그 당시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과 같은 나라였으므로 중국에서 쓰는 을 쓸 수 없어 ()‘이라 한 것이다. ’을 측정하고 정리하는 것은 중국 황제의 고유 권한이었기에 용어 하나도 조심스럽게 쓸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세종이 천문 연구를 본격적으로 벌인 것은 세종 14(1432)이었다. 세종은 경연에서 해, , 별의 이치를 논하다가 우리나라는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고, 모든 제도는 중국을 따르고 있으나 천문을 관측하는 과학기구가 갖추어지지 못했다.”고 염려하면서 정인지에게 고전을 연구하여 천체관측기와 계산하는 기계를 창안하고 제작하여 측정과 시험에 대비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곧 정초와 정인지를 비롯한 학자들은 천문 기계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여 이천은 장영실과 과학기구를 제작하고 시설 및 설비 건설 등을 맡아 천문관측대인 간의대를 비롯하여 천문 기구와 시계 등을 설치하는 일을 감독하였다 
 

   
▲ 경복궁 흠경각, 임금이 관상수시를 실천하는 집, 지금 복원된 흠경각에는 자격루 같은 천문기상기구가 없다.

   
   ▲ 그림 오수민

세종 19(1437) 4월까지는 5가지 천문의기와 10 가지 시계가 거의 제작되었다. 더욱이 종합과학연구소인 흠경각은 다음해인 20년 정월에 이룩되었고, 간의대에서는 매일 밤 서운관원 5명이 교대로 관측활동을 하였다. 임금 직속 종합과학연구소인 <흠경각>은 바로 임금이 잠을 자는 강녕전 가까이에 있었다. 이 건물 안에는 자격루를 비롯한 많은 기기들이 있었고 세종은 수시로 이 연구소를 드나들었다.. 이 연구소 건물이 완성되자 김돈은 이렇게 기록했다.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연유를 측량하지 못하며, 위로는 하늘 돗수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만들은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세종실록143817- 

김돈은 다시 마무리하기를, “하늘을 본받고 때를 좇음에 흠경하는 뜻이 지극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중하게 여기시니, 어질고 후한 덕이 마땅히 중국 주나라와 같이 아름답게 되어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