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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정신'을 되살리자

역사 바로 세우기에 온 힘을 기울여라

“세종정신”을 되살리자 13, 《고려사》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1418년 세종이 임금 자리에 오른 지 네 달 정도밖에 안 된 1225(음력) 어느 날이었다. 신하들과 함께 경연을 하다가 세종이 이렇게 말했다 

고려사를 보니 공민왕 때부터의 역사 기록은 정도전이 들은 바에 많이 의존하다보니 어떤 것은 더 쓰고 어떤 것은 줄이고 하여, 역사 기록을 맡은 사관들의 처음 원고와 같지 않은 곳이 매우 많으니, 어찌 뒷세상에 기쁘게 전할 수 있으랴. 차라리 이런 역사책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라고 말하였다. 고려 공민왕 이하의 역사 기록이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로 말미암아 왜곡되어 실제 기록과 다름을 알고 지적한 것이다. 변계량과 정초도 임금의 말에 공감하여 함께 아뢰기를 만약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여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면, 뒷세상에서 누가 전하께서 정도전의 역사 기록을 바로잡고자 하는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문신에게 명하여 고쳐 짓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 그림 오수민

그 다음 해인 1419920일에 세종은 변계량 등에게 고려사를 고쳐 쓰도록 지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려사를 바로 쓰는 대사업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세종이 임금이 되자마자 역사바로잡기에 나선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 누구도 올바른 역사관이 없이는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없고 더욱이 임금이 잘못된 역사관을 갖는다면 나라의 불행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때는 조선이 세워진지 28년밖에 안 되었기에 역사바로잡기가 절실했던 것이다. 드디어 1421130일에 유관과 변계량이 교정한 고려사를 세종에게 바쳤다.  

세종이 정치적 관점에서만 역사바로잡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은 고려사에서 천재지변과 지진 등 자연 변화의 흐름도 다 기록하지 않은 것은 다시 실록을 상고하여 다 싣도록 하라고 했다. 세종 6(1424) 114일에는, “내가 일찍이 삼국사략, 동국사략을 보니, 신라에 일식이 있었는데, 백제에서는 쓰지 아니하였고, 백제에 일식이 있었는데, 신라에서는 쓰지 아니하였다. 어찌 신라에는 일식이 있는데, 백제에는 일식이 없었다 하겠는가. 아마도 사관의 기록이 자상한 것과 소략한 것이 다르기 때문인가 한다.”고 말했다.  

세종은 자연사까지도 매우 중요하게 총체적 역사관을 갖고 있었고 더욱이 객관적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날씨나 지진과 같은 큰 변화에 대한 기록이 매우 많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려는 세종의 역사관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세종의 명으로 시작하여 문종 때 펴낸 《고려사》-왼쪽, 고려사가 나온 그 다음해 펴낸 편년체 《고려사절요》

세종은 1425925(세종 729)에 평양에 단군 사당을 세우게 하는 등 역사 역사의 뿌리 세우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렇게 세종의 역사 다시 쓰기는 내내 이어진다. 14461011(세종 2850)에는 이계전과 어효첨에게 명하여 <고려사>를 고쳐 짓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려사는 처음 편찬한 것이 매우 간략하여 후에 다시 첨삭하였지마는, 빠진 일이 많이 있다. 요나라에서 고려의 세자에게 임금의 면류관과 곤룡포를 내려 준 일을 오히려 쓰지 아니하였으니 그 나머지를 알 수 있겠다. 지금 다시 교정해야 되겠다. 그대들은 여러 사관들과 더불어 사초를 자세히 상고하여, 태조에 이르기까지 주요 찾아 기록하라.  

1449128(세종 3153)에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을 불러, 고려사의 개정 편찬에 대한 것을 의논하고 춘추관에 전 고려사가 자못 간결한 것이 지나치니, 이제 자세히 보태어 넣으라고 하였다. 이런 역사바로잡기는 역사를 두려워하고 역사를 제대로 알려고 했던 세종이었기에 가능했다. 세종은 역사서 정리와 역사 공부를 철저히 하였다. 세종 20(1438) 1215, 세종은 경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경서와 역사책은 이론 지향의 경서와 활용 지향의 역사책이 서로 필요로 하는 것이니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학자들은 혹시 경서를 연구하는 데 끌려서 사학을 읽지 아니하고, 그 경서를 배우는 자도 혹시는 제자백가의 주석한 것에만 힘쓰고, 본문과 주자가 여러 사람의 주석을 모은 것을 연구하지 아니한다.  

경서는 경전에 가까운 책들도 무언가의 토대가 되는 뼈대이고 움직이지 않은 이론이다. 그러나 역사책은 실용적이면서도 삶의 총체적 기록이다. 이런 역사의식은 고대사까지 확대되어 민족에 대한 자주 정신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졌다. 세종 9(1427) 821일에 단군과 기자의 묘제를 다시 의논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의 묘를 세워 치제(致祭)하는 일을 모두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상세하게 정하여 아뢰라.” 

세종의 이러한 철저한 역사관은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역사적 사실과 지식을 백성들과 더불어 삶의 등대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세종은 임금이 되자마자 잘못된 고려사를 바로 잡게 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통치 내내 매달려도 못 끝냈을 정도로 역사 기술을 철저히 하고자 했다. 생전에 완성을 못하고 문종 때 와서야 완성된다. 문종 1(1451)에야 기전체 고려사가 완성되고 그 다음해 편년체 고려사절요가 완성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