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박노해 시인이 12년 만에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를 냈습니다. 박 시인은 저번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낸 이후 써온 시 가운데 301편의 시를 고르고 골라 온통 짙은 파란색의 두툼한 양장 케이스에 담아 세상에 내놓았네요. 표지에서는 푸른색의 남자가 파란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별들 사이로 두 줄기의 별똥별이 파란 궤적을 그리며 내려오고 있군요. 파란색의 디자인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면서도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저쪽의 그리움으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나눔문화에서 저에게 시집을 보내왔는데, 나눔문화 연구원들이 내가 좋아할 만한 시가 수록된 쪽 3군데에 붙임쪽지(포스트잇)를 붙여서 보내왔습니다. 시집을 받을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시에 붙임쪽지를 붙여 보내는 연구원들의 정성에 이번에도 감동을 먹습니다.^^ 붙임쪽지를 붙인 세 시 가운데 하나는 시집 제목과 같은 ‘너의 하늘을 보아’입니다. 역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에 붙임쪽지를 붙여놓았네요.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이 《삼킴곤란,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라는 책을 냈습니다. 우리문화 지킴이인 김 소장님은 인터넷신문인 <우리문화신문> 발행도 하면서, 그동안 《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 서울문화 이야기》 등 우리 문화에 관한 책들을 많이 내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낸 책은 제목부터 독특합니다. ‘삼킴곤란’이라니? 《삼킴곤란,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은 김 소장님이 자신의 투병기를 책으로 낸 것입니다. 김 소장님은 지난해 9월 11일 뇌졸중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었는데, 후유증으로 음식물을 삼키지 못하는 장애 곧 ‘삼킴곤란(연하장애)이 왔습니다. 그리하여 대학병원에서 그해 10월 25일까지 치료를 받다가 재활병원으로 옮겨 같은 해 12월 23일까지 거의 100일 가까이 입원치료를 받았지요. 그리고 올해(2022년) 3월 3일까지 집에서도 열심히 치료를 하여 삼킴곤란을 극복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치료받기에 급급한데, 소장님은 그때그때 치료일지를 기록하였다가 이를 책으로 내셨네요. 역시 매일 매일 독자들에게 <얼레빗>이라는 번개글(이메일)을 보내주시는 분이라, 이러한 투병생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온몸에 사십년 동안 쌓인 찌꺼기를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천 섬 되는 맑은 물에 씻어 버리리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그래도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리 남명 조식(南冥 曹植. 1501~1572) 선생이 1549년에 제자들과 거창 신원면의 감악산을 유람할 때 지은 시라고 합니다. 남명은 감악산 계곡물에 들어가 몸을 씻으며 이 시를 지었다고 하지요. 조선의 양반이 홀라당 벗고 계곡물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 같고, 아마 탁족(濯足) 곧 물에 발을 담그고 이 시를 짓지 않았을까요? 남명은 16세기 조선의 대유학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유학자가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다니요! 그만큼 자신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겠지만, 유학자의 시치고는 좀 과격하지 않나요? 그러나 항상 은장도 같은 칼을 갖고 다니면서 때로는 칼끝을 턱 밑에 괴고 혼미한 정신을 일깨우기까지 하며, 또 자신이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옷깃에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도 달고 다녔던 남명이라면 능히 이런 시를 지을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不作蘭畵二十年(부작난화이십년) 난초를 그리지 않은 지 20년이나 偶然寫出性中天(우연사출성중천) 우연히 그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네 閉門覓覓尋尋處(폐문멱멱심심처) 문 닫아걸고 찾고 또 찾은 곳 此是維摩不二禪(차시유마불이선) 이것이 유마의 불이선이로구나 若有人强要爲口實(약유인강요위구실) 만약 누군가 억지로 설명하라 한다면 又當以毘耶無言謝之(우당이비야무언사지) 당연히 유마거사처럼 말없이 사양하리 추사 김정희 선생이 자신이 그린 ‘不二禪蘭(불이선란)이라는 난초 그림의 왼쪽 위 여백에 쓴 글입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문인화를 그리면 대개 그림 여백에 화의(畵意)를 써 놓지요. 추사는 한동안 난(蘭)을 그리지 않다가 20년 만에 어떤 계기가 있어 난초를 그리게 되었나 봅니다. 그림 왼쪽 아래 여백에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시위달준방필, 지가유일, 불가유이 : 애초 달준이를 위해 아무렇게나 그렸으니, 단지 한 번만 가능하고 두 번은 불가하다)’라고 쓴 것으로 보아, 추사는 달준이를 위해 이 난초 그림을 그렸나 봅니다. 달준은 추사 말년에 추사를 시중들던 시동(侍童)입니다. 불이선란도는 과천의 추사박물관 외벽에 크게 그려져 있듯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최종고 전 서울법대 교수님이 낸 《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이란 책을 보았습니다.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에 관하여 글을 쓴 세계작가들에 대한 책이지요. 최 교수님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모교에서 33년 동안 법사상사를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졸업한 이후에 교수로 오셨기에 제가 배울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최 교수님이 최근까지 서울법대 문우회 회장을 하셨고, 저도 2017년에 문우회 회원으로 가입하였기에 문우회 모임에서 가끔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 오래전에도 한 번 뵌 적이 있네요. 제가 사법연수원 다닐 때 졸업 논문을 무엇으로 쓸까 고민하다가, 성경에 나오는 법사상을 한 번 정리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하여 도움을 얻기 위해 서울대로 최 교수님을 찾아간 적이 있지요. 그때 최 교수님이 좋은 점에 착안하였다고 격려도 해주셨는데, 준비하다가 졸업논문 제출 시한까지 제대로 된 논문을 완성한다는 것은 도저히 제 능력 밖이라 포기했었네요. 그런데 어떻게 최 교수님이 《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이란 책을 쓰게 되셨을까요? 머리말에서 최 교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거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不二禪蘭(불이선란) 不作蘭畵二十年(부작난화이십년) 난초를 그리지 않은 지 20년이나 偶然寫出性中天(우연사출성중천) 우연히 그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네 閉門覓覓尋尋處(폐문멱멱심심처) 문 닫아걸고 찾고 또 찾은 곳 此是維摩不二禪(차시유마불이선) 이것이 유마의 불이선이로구나 若有人强要爲口實(약유인강요위구실) 만약 누군가 억지로 설명하라 한다면 又當以毘耶無言謝之(우당이비야무언사지) 당연히 유마거사처럼 말없이 사양하리 추사 김정희 선생이 자신이 그린 ‘不二禪蘭’이라는 난초 그림의 왼쪽 위 여백에 쓴 글입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문인화를 그리면 대개 그림 여백에 화의(畵意, 그림을 그리려는 마음)를 써 놓지요. 추사는 한동안 난(蘭)을 그리지 않다가 20년 만에 어떤 계기가 있어 난초를 그리게 되었나 봅니다. 그림 왼쪽 아래 여백에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시위달준방필, 지가유일, 불가유이 : 애초 달준이를 위해 아무렇게나 그렸으니, 단지 한 번만 가능하고 두 번은 불가하다)’라고 쓴 것으로 보아, 추사는 달준이를 위해 이 난초 그림을 그렸나 봅니다. 달준은 추사 말년에 추사를 시중들던 시동(侍童)입니다. 불이선란도는 과천의 추사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을 자행하고, 조선의 소녀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것을 보면 일본군이 포로에 대한 제네바 협약인들 제대로 지켰겠습니까? 박태석 변호사는 《일본의 노예》에서 일본군의 포로 학대에 관해서도 쓰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해 말하렵니다. 일본군은 필리핀을 점령한 뒤 1942. 4. 9. 약 8만 명에 이르는 미군과 필리핀 포로들을 루손섬의 마리블레스와 바각에서 바탄의 필라까지 도보로 이동시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합류한 포로들을 북쪽 산페르난도로 행군시킨 뒤, 산페르난도역에서 기차에 싣고 카파스까지 이동합니다. 기차에서 내린 후에는 마지막으로 캠프 오도넬까지 이동시키는데, 포로들이 보두 걸은 거리는 96.6km에서 112km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포로들이 캠프 오도넬까지 이동하는 동안 많은 포로가 죽어 나갔기에, 이를 바탄 죽음의 행진이라고 합니다. 일본군은 행군 도중 포로들에게 음식이나 물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아, 많은 포로가 죽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햇볕 치료는 해주었답니다. 햇볕 치료라고 하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치료는 해주었나 보다’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아닙니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일본의 노예》라는 책을 보았다. 지난해 12월에 나온 책으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진실을 파헤친 책이다. 보통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다룬 책들은 주로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을 발굴, 분석하여 다룬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해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에도 막부 시대의 가라유키상, 또 거기서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일본 전국 시대의 인신매매인 인취와 난취까지 다루고 있다. 여기서 ‘가라유키상’이란 외국인을 상대로 한 윤락녀를 말하고, ‘인취(人取)’란 전쟁터에서 사람을 전리품으로 납치해가는 것을 말하며, ‘난취(亂取)’란 전국시대 병사들에게 사람과 물건을 약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을 얘기한다. 이렇게 말하면 저자는 당연히 역사를 전공한 학자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박태석은 검사로 20년, 변호사로 15년을 살아온 평범한 법조인이다. 그런데도 박 변호사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피상적으로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여러 역사 서적들과 자료들을 탐독하고 심층 분석하여 글을 쓰고 있다. 어떻게 평범한 법조인이 이런 책을 쓸 수 있는지, 책을 읽으면서 연신 감탄하게 된다. 저자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나라 성씨에는 외국에서 온 성씨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많은 것이 중국에서 온 성씨지요. 그리고 고려 때, 원나라 지배를 받으면서 몽골인을 선조로 하는 연안 인씨 등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귀순한 김충선(사야가)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처럼 일본에서 들어온 성씨도 있구요. 그런가 하면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이지란(쿠란투란티무르, 청해 이씨)처럼 여진족에서 들어온 성씨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씨와는 별로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서양인의 피가 들어간 성씨도 있습니다. 덕수 장 씨의 시조 장순룡은 원나라 때, 고려에 정착한 회회족입니다. 원나라는 중앙아시아의 회회족을 제2계급으로 하여 자기들 통치에 이용하였는데, 소위 말하는 ‘색목인(色目人)’이 이들입니다. 그리고 하멜 일행이 조선에 표착하였을 때 하멜과 함께 탈출하지 않고 강진군 병영면에 주저앉은 네덜란드 선원들이 있는데, 이들을 시조로 하는 병영 남씨도 있습니다. 병영 남씨는 한국에 정착한 지 400년이 안 되어 이목구비를 보면 아직도 어딘가 서양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외에 고려 말에 베트남 왕족이 고려로 귀순해 와 성씨를 받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박노해 시인의 사진에세이 4집 《내 작은 방》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라 카페 갤러리(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0길 28)에서 사진전도 겸합니다. 그동안 박시인이 평화나눔 활동으로 중동, 남아시아, 남미를 순례하면서 찍은 사진 중에 37점을 엄선하여 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진에세이집 제목이 왜 ‘내 작은 방’일까요? 박 시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지요. “우리 모두는 어머니 자궁의 방,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위대한 방에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기쁨과 슬픔으로, 사랑하고 이별하고, 성취하고 저물어가면서 마침내 우리는 대지의 어머니, 땅속 한 평의 방으로 돌아간다. 살아있는 동안 한 인간인 나를 감싸주는 것은 내 작은 방이다. 지친 나를 쉬게 하고 치유하고 성찰하고 사유하면서 하루하루 나를 생성하고 빚어내는 내 작은 방. 우리는 내 작은 방에서 하루의 생을 시작해 내 작은 방으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하고 앞을 내다본다. 그곳에서 나는 끊임없이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다. 광대한 우주의 별들 사이를 전속력으로 돌아나가는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이 격변하는 세계의 숨 가쁨 속에서 깊은 숨을 쉴 나만의 안식처인 내 작은 방. 여기가 나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