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히말라야 산길을 함께 걸은 현철 씨도 보통 여행객은 아니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미소만 짓고 말을 안 했다. 그러다가 약간 친해지자 아주 조금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안동이 고향이며 40살 비혼인 그는 어느 날 절에 갔다가 차를 정성스럽게 따르는 스님의 모습을 보고 감전된 듯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나와 절에서 오랫동안 지냈는데, 무슨 사연이 있어서 스님이 되지 못하고 종무소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최근 무슨 사건이 일어나, 절을 떠나 정처 없이 여행 중이라고 한다. 중이 싫으면 절을 떠난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 같은데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현철 씨가 추천한 카페에서 우리는 차를 마시고, 간단히 점심 식사를 주문하여 먹고, 히말라야 산도 바라보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산길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병산은 여기 저기 전화하느라고 바쁘고, 나는 혼자서 달라이 라마 사원으로 갔다. 세 번째 방문이다. 이번에는 사원 안에 있는 티베트 박물관을 자세히 관람하였다. 티베트 박물관에는 티베트의 자연 환경, 역사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지애 보살은 달라이 라마의 통역사로 오랫동안 자원봉사를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지애보살은 달라이 라마와 관련되어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뉴스를 많이 알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를 수행하는 비서는 형님의 아들(그러니까 조카)이라고 한다. 달라이 라마 사원의 주 수입원은 달라이 라마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하는 강연의 강연료라고 한다. 어느 날 달라이 라마는 측근들에게 “나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에서 강연할 때에는 미안한 마음이다.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로 오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토마스 머튼(1915~1968)은 미국 가톨릭교회의 수도사였는데, 죽기 몇 주 전인 1968년 11월 태국에서 열린 수도원 장상(수도원장)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는 이때 다람살라로 가서 달라이 라마를 만났는데, 달라이 라마는 3일 동안이나 모든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머튼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당시 다람살라의 티베트 불교도들은 미국에서 생불이 왔다고 칭송했으며 달라이 라마는 그 후 가장 존경하는 기독교인으로서 머튼을 꼽았다고 한다. 청전 스님은 다람살라에서 살고 있는 유일한 한국 스님으로서 달라이 라마의 애제자로 알려져 있다. 티베트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새벽 3시에 잠이 깨어 일어나서 《사피엔스》를 읽었다.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인간종은 물론 자기보다 더 강한 거대 동물들을 제압하고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것은 “다수가 유연하게 협동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어를 사용하고 도구를 쓰다가 어느 순간 협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똑똑해지기 시작했고, 인지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인지혁명’은 《사피엔스》의 제1부 제목인데, 나로서는 생소한 용어였다. 호모 사피엔스 사이의 협동이 가능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유발 하라리의 견해에 따르면 협동을 가능하게 한 것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들을 믿을 수 있는 능력” 덕분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국가, 신, 돈, 인권 등의 개념을 믿고서 정치 체제, 종교, 교역망, 법적 제도 등의 협동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들은 허구, 곧 지어낸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생소한 설명이다. 매우 위험해 보이는 설명이다. 유발 하라리의 주장을 곰곰이 음미해 보면,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신’은 실체가 아니고 허구 곧 지어낸 이야기이며 따라서 신이라는 개념에 근거한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로자 씨의 말에 따르면 오전의 법회에는 자기도 참석했는데, <중관심론>이라는 티베트 경전을 4일째 강독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의 법회는 라디오와 유튜브로 생중계되는데 여러 나라 말로 실시간으로 동시통역된다. <중관심론>은 한국말로도 번역된 티베트의 경전이다. 로자 씨와 대화하면서 인도에 대해서도 새로운 정보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종교라고 한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근친상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있다고 한다. 인도의 시골을 여행하는 외국인 여성이 봉변을 당했다는 기사도 가끔 보도가 된다. 2015년 기준 세계의 종교별 인구통계를 보면 기독교(천주교 포함)가 24억으로 1위, 무슬림이 17억으로 2위, 힌두교가 10억으로 3위, 불교가 5억으로 4위를 차지한다. 힌도교와 무슬림은 공통적으로 여성을 차별하는 종교라고 볼 수 있는데, 뜻밖에 지구상에는 많은 여성들이 남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헌법에서는 남녀평등이지만 관습으로는 여자가 차별을 받아왔는데, 상속법이 개정되고 호주제도가 폐지되면서 남녀는 거의 평등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티베트 불교는 크게 두 세력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관세음보살의 현신인 달라이 라마를 추종하는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아미타불의 현신인 판첸 라마를 추종하는 세력이다. 달라이 라마의 추종자들은 1959년에 인도 다람살라로 망명했다. 그러나 판첸 라마의 추종자들은 중국 공산당과 타협해서 지금도 티베트에서 종교 활동을 하고 있다. 2019년은 달라이 라마가 망명한 지 60돌이 되는 해이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2018년 초에 뉴델리에서 인도 망명 60돌 사전 기념행사를 대규모로 열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을 의식한 인도 정부가 반대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행사 장소를 다람살라로 옮겨야 했고 인도 정부의 주요 인사 대부분은 이 행사에 불참했다. 최근 인도 정부가 티베트 망명 정부와 거리를 두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달라이 라마에게 고민거리이다. 달라이 라마는 2014년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기가 죽으면 환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달라이 라마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환생자를 공인할 승려(판첸 라마)가 필요한데 중국이 지명한 현재의 판첸 라마를 티베트인들이 인정하지 않으므로 환생 제도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제3대 달라이 라마로 알려진 소남 갸초(1543∼1588)가 몽골의 동부 튀메드부의 군주인 알탄칸(俺答汗, 1507~1582)으로부터 1577년에 초대를 받았다. 징기스칸의 17대 후손인 알탄칸은 소남 갸쵸에 대한 얘기를 듣고 깊은 신심이 일어났다. 알탄칸의 궁전에 도착했을 때 만 명이 넘는 엄청난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소남 갸초가 몽골에 머물면서 알탄칸의 전생을 보니 쿠빌라이칸의 환생이고 자신은 쿠빌라이칸의 스승이었던 샤카 팍파였다. 과거 전생인연이 다시 스승과 제자 인연으로 돌아온 것이다. 알탄칸은 티베트에서 온 소남 갸초를 스승으로 받들면서 칭호를 올렸다. 그때 올린 이름이 ‘달라이 라마’이다. '바다'를 뜻하는 그의 이름 '갸초'가 몽고어로 '달라이'이고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뜻한다. 그러니까 해석하면 달라이 라마는 ‘바다 같은 스승’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소남 갸초는 겸손의 의미로 자신의 스승, 그리고 스승의 스승에게 1대, 2대 달라이 라마의 칭호를 봉헌하고 자신은 3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다. 롭쌍 갸초(1617-1682)는 티베트 불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중국이 1950년에 티베트를 합병한 이후 발포ㆍ고문ㆍ아사ㆍ처형ㆍ수용소에서의 강제 노동 등으로 죽은 티베트인은 모두 1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자료마다 피해자의 수치가 약간 다른데, 이 수치는 다람살라 사원 안에 있는 티베트박물관 전시물에서 필자가 직접 확인한 숫자다. 티베트인은 모두 6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므로 전체 인구의 1/5 정도가 죽은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이 중국을 싫어하는 까닭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 중국에는 시짱(西藏),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광시좡족(廣西壯族), 닝샤후이족(寧夏回族), 네이멍구(內蒙古) 등 5개 자치구가 있고,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등 30개의 자치주가 있다. 중국 정부는 55개 소수 민족에 대해 우대 정책으로 불만을 억누르는 한편, 분리 독립 운동은 철저히 탄압하는 ‘당근과 채찍’ 정책을 써왔다. 우선 소수민족에게는 독자적인 언어와 종교, 문화를 인정하는 자치권을 부여했다. 한족은 엄격한 ‘1가정 1자녀’ 원칙이 적용되었지만 소수 민족은 2명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3~4명의 자녀도 출산할 수 있었다. (1979년에 도입된 1자녀 정책은 36년 동안 시행되다가 2015년에 폐지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수색대는 라모 돈둡과 함께 라싸로 길을 떠나려 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이 지역의 회교도 중국인 군 지도자 마부팡이 엄청난 금액의 몸값을 내기 전에는 아이를 데려갈 수 없다고 떼를 써서 길을 떠나기 전까지 18달이란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라모 돈둡이 4살 때인 1939년 여름에 부모님과 형 그리고 수색대와 순례자들로 구성된 긴 행렬이 라싸를 향해 떠났다. 라모 돈둡의 행렬이 라싸에 도착하기까지는 3달이 걸렸다. 행렬은 수도에서 3km 떨어진 되구탕 평원에서 정부 고위 관료들의 영접을 받았다. 다음날 라모 돈둡을 달라이 라마로 추대하는 의식이 포탈라궁에서 거행되었다. 포탈라궁의 새 주인이 된 라모 돈둡은 지혜의 바다라는 의미의 ‘텐진 갸초’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다. 티베트 사람들은 그를 쿤둔이라고도 불렀는데 그 의미는 살아있는 부처라는 뜻이다. 외국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를 호칭할 때에는 존자(HH: His Holiness)라는 말을 앞에 붙인다. 즉위 뒤 달라이 라마는 기본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교육 과정은 불교학 박사 과정의 모든 승려들과 동일한 과정으로서 논리학, 티베트 예술과 문화, 범어(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점심 식사를 끝낸 뒤에 병산이 한국으로 국제전화를 하였다. 통화를 끝내더니 지금 탈핵 깃발을 들고 한국에서 매일 걷고 있는 강원대의 성원기 교수가 내일 (2월 24일) 판문점에 도착한다고 전해준다. 성원기 교수는 나도 잘 아는 분인데, 국내를 걸으면서 탈핵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분이다. 성원기 교수는 어떤 인물인가? 강원대학교 전자공학과 성원기 교수는 삼척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사는 시골집 근처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원전이 집 근처에 세워지면 자기와 가족은 안전할까? 사고라도 나면 얼마나 위험할까?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원전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원전의 위험성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지만 그가 원전 건설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국에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원전 마피아와 싸울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는 답답했다. 그는 미약함과 무기력함을 느끼면서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미약한 개인이지만 자기 집 근처에 들어설 원전을 막기 위하여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는 2013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부산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귀향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합창이 끝나고 달라이 라마가 퇴장한다. 옆과 뒤에는 붉은 가사를 입은 승려들이 따랐다. 경호원들도 뒤따랐다. 사원의 서쪽에 달라이 라마의 숙소 건물이 있다. 달라이 라마가 법당에서 걸어 나오자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를 보려고 몰려왔다. 달라이 라마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고, 인사를 나누고, 말을 걸기도 하면서 아주 천천히 퇴장하였다. 다행이 우리는 달라이 라마가 퇴장하는 경로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의 손을 잡아보지는 못했지만 얼굴은 뚜렷이 볼 수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인자해 보였다. 근엄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는 이제 누군가 옆에서 부축해야 하는 노인이었다. 그는 1935년 생이니 올해로 만 84세가 되었다. 세월의 흐름은 티베트의 위대한 종교 지도자라고 해서 피해가지는 않았다. 지구가 한 해에 한번 해를 중심으로 크게 도는 순환 운동은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이 피할 수가 없다. 지구가 해를 돌면서 세월이 계속 흐르고……. 그도 이제는 기력이 쇠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도 머지않아 죽고 오늘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날이 올 것이다. 달라이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