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진용옥 명예교수] 1702년(숙종28)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 이형상이 관내 순시와 한 해 동안 거행했던 행사 장면을 제주목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40폭의 채색도로 그리게 한 화첩이다. 매 화폭의 아래에 간결한 설명을 적고, 호연금서(19번)라는 이름의 그림 한 폭을 곁들여 총 41폭이다.당시 제주 관아, 성읍, 군사 등의 시설과 지형, 풍물 등을 기록화로 남겼으며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다. (보물 652-6호) 탐라순력도 14번 째 그림에는 2종 3개의 살꽂이 솔이 있다. 1자눈섶과 훅관정곡의 살꽂이소을 두 개가 있는 데 1자 논섶은 숫자로 기재되어 있다/ 이로선 1자 눈썹은 살꽂이 소의 개수구분 기호임을 알 수 있다. 탐라순력도에서 솔포나 솔판 그림은 제주목에 10군데. 정의현과 대정현에 11군데 등 모두 21곳에서 나온다 아래 그림은 24번째 그림 명월사회(斜會)에 나오는 과녁의 부분도이다. 솔포에 물림대와 조절끈으로 세워져 있으며 일자 눈썹은 태극이괘, 그리고 흑단정곡과 백적벡심으로 되어있다. 눈섶 부분에 왜 태극 이괘가 그려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주역에서 남쪽이고 헛개 태양을 상징할 수도 있어 두 개의 태양
[한국문화신문 = 진용옥 명예교수] 세종실록 卷131 오례(五禮) 무과전시의(武科殿試儀)의 살꽂이 솔 그림 주례에 기준한 정곡 관혁의 구조 세종실록에는 돼지를 그려 넣는다 했다 [웅후] ◎ 武科殿試儀[원문] 前二日, 兵曹宣攝內外, 各供其職。 前一日, 忠扈衛設帳殿於射壇南向; 幄次於帳殿之後, 掖庭署設御座於帳殿內南向; 訓鍊觀張步射之侯; 【遠侯距壇二百四十步, 以靑色布爲質, 崇廣丈八尺三分。 其廣而鵠居一, 鵠方六尺, 白漆皮方制之, 棲於侯中, 畫以豕首。 侯左右相距五十步, 竪旗爲標。 侯後五十步, 左右相距七十步, 竪旗爲標。 取遠至者中者。 及者。 中侯距壇一百八十步, 亦以靑色布爲質, 崇廣丈四尺, 鵠方四尺六寸有奇。 近侯去壇八十步, 以白漆皮爲質, 崇廣四尺六寸, 皆畫以豕首, 取中者。 세종실록 135권 오례 / 군례 서례 / 사기 / 웅후미후시후과녁 조 같은 실록이지만 약간 다른 서술의 살꽂이 솔이 나온다. 원후와 웅후와 미후를 3종으로 나누고 그림과 함께 해설이 있다. 왕의 살꽂이 솔은 붉은 빛에 곰의 머리를 그리고,. 종친과 신하는 청색포에 순록의 머리를 그리고 흰색가죽에 돼지머리 살꽂이 솔[豕侯]을 그려 붙인다 했다.
[한국문화신문 = 진용옥 명예교수] 국궁에는 활과 화살 그리고 살꽂이 솔[과녁]이 있다. 활은 손으로 쥐는 줌통을 시작으로 커브를 트는 오금, 활시위를 올리는 부분 고자가 있다. 발사 직전까지 화살을 올려 두는 출전피가 붙은 쪽이 윗장, 아랫쪽이 아랫장이다. 활시위 중앙에 화살을 매기는 부분을 절피라 한다.이에 대한 각의 명칭과 구조는 아래 그림과 같다. ▲ 그림 출처- 웬하키피디아 살꽂이란 솔 또는 과녁을 말한다. 표적[的]에다 가죽[革]을 붙여 관통[貫通] 하기를 바랬으니 관혁[貫革]이라 했고 독음은 과녁이다. 우리 문헌 자료에서 관혁(貫革)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왜어유해》(1781~1782, 上:40b)에서이다. 유성음인 ㄴ과 모음 사이에 있는 ㅎ이 탈락하면서 만들어진 과녁은 19세기 무렵에 나타나서 현대에 이르는데 우리 사전에서는 이미 어원 의식을 상실한 말로 보고 관혁(貫革)을 이 말의 원래 말로 처리한 것 이외에 별도의 관련을 맺어 주지 않았다. 16세기에는 관혁(貫革)의 의미를 갖는 고유어로 솔이 있었다. 관적(貫的 사적(射的) 표적(標的) 등이 비슷하게 쓰인다. 이때 관의 중앙을 관중, 적의 중앙을 적중이라 하며 모두 정확하게 ዎ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요약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 유적을 수몰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카이네틱 가변 차벽[댐] 방식이 검토되었으나 항구적 보존 인프라 구조에 대해서는 대안이 없다. 이 논문은 반구대 암각 주변에 고정식 물막이 뚝방 터널길을 설치하고 주위를 움푹 마당[sunken square]으로 조성한 다음 마당 지하에는 수중 지하 배수로 조성하여 수위를 조절하고 도로에서 계단을 타고 지하 통로를 구성하여 접근성을 확보하는 한편 수프라 콘텐츠로서 수중 고래 박물관(아쿠아리움)을 조성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 움푹 마당과 Y자형 물밑 통로 조성 개념- 위치정보-353612.6 1291037.4ⓒ술봉 이 이외 제 2안으로 H형 댐과 지하수로 [그림참조]방식을 제안하였다. 암각을 단순 그림보다는 그림문자 또는 순 암각 문으로 보아야 한다. 고리 소리와 고래잡이 연락신호 피리소리와 깃발 신호수와의 관계 등 수프라 콘텐츠를 먼저 규명해 둘 필요가 있다 이를 토대로 이야기 짓기(story telling)와 수중 음향효과 등을 증강현실(AR) 방식으로 제공 할 수 있다. 전시방법으로는 3D표시장치 암벽에 미디어 파사드 투시방법과 고래나 다른 동물을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문화재청은 광화문을 고종 때 중건 당시의 위치에 원형 복원하면서 누각 안에 걸려 있었던 종과 북도 관련 고증자료 등을 검토해 복원키로 했다고 알려졌다. 문화재위원회가 2005년 4월 20일 4개 분과 합동회의에서 광화문의 외형뿐만 아니라 건물 내부도 고증해 복원토록 해야 한다고 권고한 데 따른 것이다 합동회의에서 남문현(南文鉉건국대 교수) 문화재위원은 조선 초기 광화문 전각에 시간을 알리는 종과 북이 있었던 만큼 이 부분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태조실록》 4년(1395년)에 광화문 누각은 3칸으로 상하층이 있었으며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中嚴임금의 거둥을 알리는 신호)을 경계했다고 기록돼 있다 [원문 後築宮城, 東門曰建春, 西曰迎秋, 南曰光化門。 樓三間有上下層, 樓上懸鍾鼓, 以限晨夕警中嚴。 門南左右, 分列議政府、三軍府、六曹、司憲府等各司公廨] 이 기록에는 광화문이란 이름이 태조 때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종 52권, 13년(1431) 4`월 18일(임자) 1번째 기사에는 단지 광화문이 이룩되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남 교수는 광화문 전각에 있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문화재청에서는 사진 촬영술에 의하여 현판규격을 정하였다고 하였으나 33과 22cm의 오차가 나왔다. 두 번이나 거짓말을 했다. 광화문 복원에서 목제 문루(門樓)가 복원되고 2010년 준공식을 했지만 문화재 복원에 대한 신뢰가 급속히 추락하는 상황에서 목제 문루 복원에도 의구심이 들고 있다. 전체적 모습에서 어딘가에 불 안정한 모습과 비례의 불균형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목조 건축은 치수에 기반을 둔 디지털자료가 기본이지만 전제적 균형은 어림셈 수치에 기반을 둔 아날로그 비례 수치다. 조선의 목수를 대표하는 대목장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일인 건축 기사 실측 도면을 참고했다고 했지만 무너진 동편 광화문에서 실측 수치를 찾아냈던 고 강봉진 씨의 자료에 대한 언급이 없다. 강 씨는 불타서 무너진 광화문 문루의 흙더미에서 주춧돌의 정확한 위치와 기둥 간격을 확인하여 이를 콘크리트 복원에 그대로 적용했다고 한다. 복원된 문루가 비교적 안정되고 단아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이 때문으로 판단된다. 콘크리트를 떡 주무르듯 한 사나이로 평가 받은 구일옥 씨의 장인 정신이 더해 진 결과 목재의 질감을 잘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콘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들어가는 말 광화문 현판을 원점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2014년 5월 7일 문화방송 보도를 접하면서 그리고 숭례문 화재와 부실 복원을 목격하면서 허탈감을 넘어 절망감이 앞선다. 글쓴이는 2005년 디지털 복제는 문화재 복원이 아니다.는 칼럼을 중앙일보에 썼다. 수많은 복제품이 남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문화재청장이 사진 원판 영상을 디지털로 복원하겠다는 계획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내용이었다. 문화재 소위의 복원 쌍구 모본 방식 변경 청장이 갈리게 되자 현판 복원 방식도 변경 되었다. 디지털 복원은 문제가 있으므로 사진 원판 영상을 임태영 서체와 근접하게 복원한다고 하였다. 이른바 쌍구 모본(雙鉤模本) 방식이다. ▲ 광화문 현판 복원 소위원회 회의록(2010년 2월 24일) ▲ 동경대 소장 일제강점기 광화문 유리원판 사진. 갈라진 틈이 보인다. 쌍구 모본이란 서체의 윤곽선을 그리고 그 안을 칠하여 채워 넣는 방식이다.쌍구 모본이란 서예의 습작단계에서 대가의 서체를 본뜨거나 탁본에서 시행하는 방안이다. 유명한 광개토대왕비문은 일본군 사코 중위의 초기탁본이 쌍구 모본 방식으로 작성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방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문정공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20)선생은 영남과 기호의 양 학파에서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으며 서북지역 평안도 희천에서 환원당 문경공에 수학했고, 희천의 상현서원, 양현사에 제향 되었다. 근세의 안중근 의사와 함께 통일 한국의 대표적 인물이 될 수 있는 인연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정암 선생에 대한 북부 지역과 북인들 관심에 대하여 역사자료에 의하여 살피고 원격 위성 탐사, 현지방문 자료를 통하여 통일 시대의 미래 지향적 관점에서 기록하고 추론한다. 여기에 나오는 용어는 가능한 한 분단 이전의 용어를 사용한다. 예하면 남인과 북인은 조선시대의 정파 명칭이 아니라 각각 남한[남부한국]과 북선[북조선]의 주민을 지칭한다. 정암 선생과 서북지역의 인연 정암 선생은 개국 공신 조온의 5대 손으로 본시 훈척 계열이었지만, 문경공 김굉필에게 수학하면서 사림[士林]의 영수가 될 수 있었다. 김굉필은 유배 중이었음에도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우리나라 유학의 정통 학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성리학의 대중화 위훈삭제 소격서 혁파 전제 개혁 등 요즘 말로 경제 민주화를 시도했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를 구현하려다 전라도 화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2014년 8월16일 경복궁 앞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윤지충(바오로1759~1791)을 포함해 124위에 대하여 복자 시복식을 거행한다. 이에 앞서 1984년 한국인 103인 성인에 대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5월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식을 거행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이다. 한국 천주교는 1645년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 세자가 북경에 온 독일 선교사 마테오 리치 신부와 조우하고 수차의 교류를 통해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적 차원에서 전래되었지만 양명학과 실학으로 수용되었다가 서교(西敎)로 발전하면서 종교적 실체로 발전했다. 이어서 1784년 이승훈(1756 ~ 1801)은 북경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고 귀국했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드문 자발적 태동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7년 후에는 박해가 시작되고 최초의 순교자가 나왔다. 전라도 양반 가문 진사 출신인 윤지충은 제사를 거부하고 어머니의 장례를 천주교 예절에 따라 치른 이른바 '진산(충청도 금산)진사 사건'으로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육신의 부모보다 더 높은 부모, 임금보다 더 높은 하느님
[그린경제/얼레빗=진용옥 명예교수] 평양종은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다. 원래는 대동문 루 안에 매달려 있었는데 1714년에 평양성 북성을 고쳐쌓으면서 북장대로 옮겨갔다가 거기서 화재가 일어나 깨지고 1726년 약 4달 동안 청동을 녹여 부어 다시 만든 것이 지금 있는 평양종이다. 종의 크기는 직경 1.6m, 높이 3.1m, 무게 13.5톤이며 종의 겉면에는 중앙부에 세 줄의 띠가 들러 있고, 이를 중심으로 상부와 하부가 각각 2등분 그리고 천판을 합하여 5등분 되어있다. 맨 위의 고리부분을 용트림으로 새기고, 상단에는 관음보살상, 하단에는 8괘와 능형의 구름무늬를 새겼다. 종에는 여러가지 무늬와 종의 내력에 대하여 쓴 글 등이 새겨져있다 균형 잡힌 형태, 종머리에 틀어 올린 용틀임 조각은 통이 크면서도 섬세하다. 보통 때에는 밤 10시와 새벽 4시에 쳤다고 한다. 종이 밤 10시에 28번 울리면(이것을 인경이라고 하였다.) 평양성 내성 4개의 큰 문이 동시에 닫혀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새벽 4시에 33번 울리면(이것을 파루라고 하였다.) 성문이 열려 사람들이 통행하였다. 1890년대까지는 비상경보와 시간을 알려줄 때도 쳤다. 보물1호에서 국보유적 제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