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산수유나무는 지금으로부터 천여년 전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새댁이 그 씨앗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나무라고 한다. 이런 유래를 갖고 있는 산수유는 전남 구례군 산동면 달전마을에 처음 씨앗을 심어 구례군 일대에 퍼지게 되었다. 구례군 산동면이라는 마을 이름도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유래한다. 긴 겨울을 지내고 봄이 되면 어느꽃 보다도 먼저 피어 지리산 남쪽 경사면을 온통 노랗게 물들이는 산수유꽃으로 지금 구례 산동면은 화사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산수유를 처음 심은 구례군 산동면 달전마을에는 맨 먼저 씨앗이 뿌려진 할아버지 나무와 조금 늦게 씨앗이 움튼 할머니 나무가 앞 뒤에 서있다. 천년을 살아온 그 자태는 지금도 당당하고 우람하며, 나무의 균형도 매우 잘 잡혀있는 모습이다. 춘삼월 봄꽃이 피어나는 계절인 지금이 산수유꽃의 절정기다. 천년 산수유 시조목이 있는 달전마을에는 시조목을 중심으로 작은 공원이 마련되어 있고, 산동마을에 핀 수만그루의 산수유꽃을 보고자 찾아온 사람들이 많다. 해마다 이 무렵 산수유 축제를 하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역시 축제는 멈추고 꽃을 보러온 사람들도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모습이 모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안성은 높은 산이 없이 낮은 구릉지역에 올망졸망한 산들이 많은 평탄한 지형으로 영남에서 충주를 지나서 서울로 올라오는 교통의 요지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오고가며 한양으로 하룻거리 발품을 남겨두고 마지막 숨을고르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발품을 팔아야하는 교통상황에 따라 안성지역 곳곳에는 사람들이 쉬어가면서도 마음을 의지하고자 곳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세우는 기도처도 많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 가운데서 죽산면 죽주산성 근처 매산리 석불을 찾아 보았다. 매산리 석불은 서있는 모습의 미륵불로 그 조성연대는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후삼국을 거치는 혼란기에 많은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어가는 참혹한 시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아비귀환, 혼란한 시대를 정리하고 이땅에 미륵불이 나타나 극락세계가 열리기를 기원하였다. 미륵경전에 따르면 말세를 지나면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하여 미륵불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이에 따라 여기 저기 미륵불을 모셨다. 매산리 석불도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거대한 바위에 전신과 머리 위에 사각관모까지 쓴 미륵불로 조성했다. 매산리 미륵불의 모습은 얼굴이 매우 긴 모습이며, 이마 위의 머리카락부분도 높고, 그 위에 넓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는 아주 깊은 산골이다. 주변 산세가 높은 악산은 없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볼 때 승용차로 가기에도 먼 거리다. 물걸리(物傑里)는 만물이 모여드는 곳이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의 각종 생산물이 모여들어 동창(東倉)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동창(東倉) 곧 동쪽 창고에 그득하던 물산이 있던 동네라서 그런지 지금도 동네가 제법 크다. 이곳에서 태어나 밭농사를 지으면서 살던 농민 전덕재 (81세) 씨는 젊은 시절인 1967년 밭갈이를 하던 중 쟁기에 걸려나온 금동여래입상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를 정직하게 문화재당국에 신고하였다. 이후 이곳은 강원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물걸리옛절 보호구역 내에 석탑과 석불 및 광배 등 5점의 보물(1971.7.7.지정)로 지정되었다. 이를 살펴보면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 불대좌(불상을 안치하는 좌대)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부처님 좌대와 부처님 뒤에 세워진 보호 석판), 보물 제545호 삼층석탑 등이다. 이 밖에도 금동불상 여러 구가 발굴되었는데, 금동불상들은 국립춘천박물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설악(雪嶽)에 폭설이 내렸다. 눈 소식을 듣고 달려간 설악은 온통 눈, 눈, 눈 세계였다. 승탑에도, 대웅전에도, 요사채에도 온통 흰눈의 세상이었다. 강원도 속초시 설악산 내 설악동에 있는 신흥사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강원도 내 대부분의 사찰을 관리하고 있는 큰 절이다. 신흥사의 창건은 신라 진덕여왕 6년(652) 자장율사가 구층탑을 조성하고 설악산 내 계조암과 함께 창건하였는데 당시 절의 이름은 향성사였다. 그런데 창건 후 얼마되지 않은 698년 불에 소실된 뒤 자장율사를 이어 701년 의상대사가 향성사를 중건하고 그 이름을 선정사라고 고쳐 불렀다. 이때 의상대사는 아미타삼존불(아미타불,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조성하여 아미타 불국토로 가꾸었다. 그리고 그 맥이 1000년을 이어왔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구층탑이 소실되고 이어서 1642년 인조20년 화재로 절의 전각들이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버렸다. 이후 인조 22년(1644) 영서 연옥 혜원 등 세 스님들이 다시 중창불사를 발원하던 중 하루는 세 스님의 꿈속에 동시에 나타난 신인(神人)이 절터를 알려주면서 이곳에 절을 지으면 수만년이 지나도록 온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갑자기 폭설이 설악산에 내렸다. 지난 2일(화) 부터 이틀 동안 속초시에 내린 눈은 약 100cm에 이른다. 겨울에도 눈구경 하기가 쉽지 않은데, 봄이 시작될 무렵의 폭설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생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조건 집을 나섰다. 차를 두고 지하철에, 고속버스에 걷기를 거듭하여 세시간 여 만에 설악산국립공원 입구에 닿았다. 눈이 많이 내렸지만 이미 봄이 되어 기온이 높다보니 시내는 빨리 녹아서 조금 질퍽거리는데 설악산국립공원이 가까워질수록 도로와 상가에 상상을 초월하는 눈이 쌓였다. 그야말로 폭설이다. 신흥사쪽에는 차량이 통제된지 이미 오래되어 오로지 걸어서만 국립공원입구까지 갈 수 있었다. 옛날 같지 않아서 많은 눈을 보기 어려운 요즈음, 이번 속초에 내린 눈은 평생 보지 못할 만큼의 눈이었다. 며칠이면 다 녹아 없어지겠지만 은세계에 빠진 설악은 잠시나마 세상의 시름을 잊을만큼 아름다웠다. 눈 쌓인 아름다운 세계도 사실 잠깐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도 우주의 시간에서 본다면 잠깐일 것이다. 온통 흰눈에 덮인 설악을 올려다보며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이 과연 존재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2000년에 가까운 한국불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전국 어디나 절터가 없었던 곳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절들이 있었다. 지금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지역과 가까워 큰 절이 없는 지역인 연천이지만 이곳에도 많은 절들이 있었고 그 규모도 꽤 큰절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연천 오봉사와 스님의 승탑을 찾아본다. 오봉사는 연천 한탄강변 재인폭포 근처에 있는 고찰이었다. 오봉사는 신라시대 창건한 천년 고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불에타서 옛 자취는 대부분 사라지고, 오직 스님의 승탑 1기만이 외롭게 남았다. 그런데 신라말 이후 한국의 불교는 선종(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님과 같이 된다고 믿는 종파)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은 타계한 뒤 화장하여 유골 중 수습된 사리를 모아서 승탑을 만들었다. 이런 전통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면서 스님들의 승탑은 바로 그 스님의 업적과 덕행에 따라 당대의 예술적 감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승탑만 보아도 당시 제자들이 얼마나 스님을 존경하였는지 신도들은 스님의 깨달음의 정도가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하곤 하였다. 따라서 큰절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성주풀이는 집안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는 전통민요로 집을 지을 때나 새집으로 이사를 할 때 축원하며 부르는 한민족 대표민요로 본래는 무당이 부르는 노래였다. 여기서 "성주"는 집안을 지켜주는 "수호신"을 뜻한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다 보면 성주의 본향이 어디인가를 물으면서 그곳은 안동의 제비원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제비원에는 크나큰 소나무가 있으며 그 소나무의 솔씨를 받아다가 심어서 성주목으로 키워서 집을 지을 때 대들보로 삼는다고 한다. 그러면 집안에 행복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대표적인 민요인 성주풀이가 유래한 안동 제비원의 "이천동마애불"이 있는 "연미사"를 지난 토요일(6일) 찾았다. 연미사가 있는 안동시 이천동은 옛부터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 소백산을 넘기 전에 많은 선비들 상인들이 쉬어가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제비원(요즈음으로 치면 호텔)로 쉬어가는 사람들이 하룻밤 묵으면서 험한 산길 소백산 산짐승 산적들을 만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고, 또 선비들은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라면서 마애불에 소원을 빌었다. 그런데 이곳 제비원에는 연(燕=제비)이라는 처녀와 제비가 된 목수 욱바우골 와공과 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임진왜란을 겪은지 30여년 만에 또 다시 당한 외침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병자년(1636년)에 당한 오랑캐의 침략'이란 뜻으로, 임진왜란 후로도 전쟁 대비보다는 당쟁으로 국방에 대한 대비가 철저하지 못한 결과로 또 다시 침략을 당하여 임진왜란 때는 당하지 않았던 치욕을 당하였다고 하여 한국역사상 최악의 치욕이라고 한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추운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송파구 삼전동으로 내려와 청나라 황제가 있는 선양을 향하여 삼배구고두(三跪九叩頭禮)(세번 큰절을 하면서 무릅을 꿀고, 머리는 아홉번 땅에 부딪치는 절)의 예로 항복한 뒤 청나라와 화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에서는 청나라는 변방에서 일어난 오랑캐이므로 청나라와 화친하는것은 조선이 사대해야 하는 명나라를 배반하는 일로 청나라와는 화친을 극구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척화파라고 부르는데, 그 중 맨 앞에서 전쟁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홍익한, 윤집, 오달재로 이들을 역사에서는 삼학사(三學士)라고 부른다. 인조가 항복한 뒤, 척화파의 3인은 선양으로 끌려간 뒤 청황제로부터 이제라도 마음을 돌려 청나라를 상국으로 받들 수 있느냐는 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경기도 하남시는 고대 삼국시대 백제가 처음 도읍지로 삼았다는 설이 있는데, 그 근거로는 하남시 이성산성이 백제시대 쌓은 성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고대사를 연구한 학자들의 의견이 모두 같지는 않지만, 백제의 처음 도읍지가 바로 한강이 흐르는 남쪽의 요충지인 이곳에 산성을 쌓아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그 근처에 왕궁과 관가를 짓고 성을 쌓아 백성들이 살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근거가 옳다면 도읍의 근처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신앙의 중심처로 서기 400년 대에 지어진 절도 있었을것이나, 현재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근처에서 절터가 발굴된 적은 없다. 그런데 확실히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하남시 이성산성 아래에는 오래된 절터가 있고, 그곳에 고려시대 초기로 평가되는 석탑도 있어, 어쩌면 그 절의 시작은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남시 춘궁동에는 고골 저수지 옆에 석탑이 2기가 서있는데, 하나는 5층이고 다른 하나는 3층이다. 두 석탑은 바로 옆에 세워져있지만,그 규모가 서로 달라 같은 시대에 세워진 것 같지는 않다. 탑의 규모로 보아서는 예부터 매우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보원사는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에 있었던 큰 절이었다. 보원사의 창건은 백제 후기로 생각되는데, 보원사터 근처에는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용현리마애삼존불》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용현리마애삼존불》은 백제 후기에 세운 보원사의 주변 기도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원사에 대한 기록은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 체징의 탑비에 나오는데, 보조선사 체징은 827년(흥덕왕2)에 보원사에서 구족계(비구와 비구니가 받는 계율)를 받았다고 한다. 또 신라 후기 효공왕8(904) 보원사는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로 융성하였다고 최치원이 법장화상전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런 보원사는 고려초 광종26년(975)에 당대 고승인 법인국사 탄문이 입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정종 2년(1036)에는 보원사의 계단(戒壇)에서 승과고시로 경전시험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계단(수계를 받는 제단)이 어디였는지 알 수 없으나 보원사에도 통도사 금강계단이나 금산사 방등계단 처럼 계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조에 이르러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상왕산에 보원사가 있다고 한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 사세가 계속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