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태산이 가로막힌 것은 천지간 조작이요 님의 소식 가로막힌 것은 인간 조작이로구나 우수 경칩에 대동강 풀리더니 정든 님 말씀에 요 내 속 풀리누나 차마 진정 님의 생각이 그리워 못살겠구나“ 서북지방에 전해지는 민요입니다. 오늘은 저 민요 속 가사처럼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24절기 가운데 둘째 우수(雨水)지요. 우수란 말 그대로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뜻인데 아직 꽃샘추위가 남아있지만, 저 멀리 산모퉁이에는 마파람(남풍[南風])이 향긋한 봄내음을 안고 달려오고 있습니다. 예부터 우수 때 나누는 인사에 "꽃샘잎샘에 집안이 두루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이 있으며 "꽃샘잎샘 추위에 반늙은이(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도 있지요. 이 꽃샘추위를 한자말로는 꽃 피는 것을 샘하여 아양을 떤다는 뜻을 담은 말로 화투연(花妬姸)이라고 합니다. 특히 이 무렵에는 농사일 한발 앞서 장을 담가야 합니다. 장 담그는 일은 시골 살림에서 매우 종요로운 일인데 이웃과 장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이야기하며 '쌀 있고, 장 있으면, 들에서 푸성귀 뜯어 먹고도 살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하지요. 장은 음력 정월 장을 최고로 칩니다. 이때 장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그대들은 다투지 말라. 나도 잠깐 공을 말하리라. 미누비ㆍ세누비 누구로 하여 젓가락같이 고우며, 혼솔(홈질한 옷의 솔기)이 나 아니면 어찌 풀로 붙인 듯이 고우리요. 바느질 솜씨가 그다지 좋지 못하여 들락날락 바르지 못한 것도 나의 손바닥을 한번 씻으면 잘못한 흔적이 감추어져 세요(細腰, 가는허리)의 공이 나로 하여금 광채 나니라." 이는 규방의 부인이 바느질(침선)에 사용하는 자, 바늘, 가위, 실, 골무, 인두, 다리미를 의인화하여 인간 세상을 풍자한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 한글 수필의 인두(인화낭자) 부분입니다. 이젠 잊혔지만, 예전 어머니들이 바느질할 때 쓰던 도구 가운데 화롯불에 묻어 놓고 달구어 가며 옷감의 구김살을 눌러 펴거나 솔기를 꺾어 누르는 데 쓰던 인두를 아십니까? 인두는 무쇠로 만들며 바닥이 반반하고 긴 손잡이가 달렸지요. 형태는 인두머리의 끝이 뾰족한 것, 모진 것, 둥근 것 따위가 있는데 특히 인두머리가 뾰족한 것은 저고리의 깃ㆍ섶코ㆍ버선코ㆍ배래ㆍ도련 등의 정교한 곡선을 만드는 데 썼습니다. 또 마름질할 때 재단선을 표시하려고 금을 긋는 데에도 썼는데 지금은 그 역할을 초크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40년 오늘(2월 11일)은 일제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시작한 날입니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제령 제19호)하여 일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의 하나로 강제로 조선 사람의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것이지요. 그런데 창씨개명을 접수하기 시작한 이틀 만에 87건이 접수되었습니다. 특히 그날 아침 관리들이 문을 여는 시각을 기다려 가장 먼저 달려가 ‘향산광랑(香山光郞, 가야마 미츠로)’이란 이름으로 등록을 마친 사람은 조선 최고의 작가라는 이광수였습니다. 그는 창씨개명을 한 변명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郞)’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은 우리 이천만 겨레를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와 승리를 얻은 세계 여러 나라 앞에 우리가 독립할 것임을 선언하노라.” 위는 3.1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도쿄 2.8독립선언서의 일부분입니다. 1910년 조선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한일강제병합"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로부터 9년 뒤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청년들은 조국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1919년 1월 도쿄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한 뒤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월 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과 일본정부, 일본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지요. 그러나 이들은 가차 없이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나라밖으로 파견된 사람을 뺀 27명 실행위원 모두가 검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체포되지 않은 참가자들이 조선에 잠입하였고 이후 3.1 독립선언 준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3.1만세운동의 불씨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한해 가운데 보름달이 가장 크고 밝다는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은 예부터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 해 동안 이루어야 할 일을 계획하고 비손하며 점쳐보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동국세시기》에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운수가 좋다."고 하여 이날은 남녀노소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며 저마다 소원을 빌었습니다. 대보름날은 다채로운 세시풍속이 전합니다. 특히 정월대보름에는 “복토 훔치기”란 재미난 풍속이 있는데 부잣집 흙을 몰래 훔쳐다 자기 집 부뚜막에 발라 복을 비손하는 것입니다. 또 “용알뜨기” 풍습이 있는데 이는 대보름날 새벽에 가장 먼저 우물물을 길어오면 그해 운이 좋다고 믿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곡식 안내기”가 있는데 경남지방의 풍속으로 농가에서는 새해에 자기 집 곡식을 팔거나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날 곡식을 내게 되면 자기 재산이 남에게 가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지요. 그밖에 대보름 세시풍속은 더위팔기, 쥐불놀이, 다리밟기, 달집태우기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정월대보름 먹거리로는 오곡밥과 나물을 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를 시작하는 날로, 봄이 온다는 입춘(立春)입니다. 입춘 무렵의 세시풍속으로는 봄이 온 것을 기리어 축원하는 입춘축(立春祝)을 집 대문이나 대들보ㆍ천장 따위에 붙이지요. 입춘축을 다른 말로는 춘축(春祝), 입춘첩(立春帖), 입춘방(立春榜), 춘련(春聯), 문대(門對), 춘첩자(春帖子), 춘방(春榜), 대련(對聯), 춘첩(春帖)이라고도 합니다. 입춘날 입춘시에 입춘축을 붙이면 “굿 한 번 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며, 전라도에서는 입춘축을 붙이면 “봉사들이 독경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여 입춘에는 꼭 하는 세시풍속이었습니다. 입춘축 가운데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으로 “입춘이 되니 크게 길 할 것이요, 만 가지 일들이 형통하라”라는 뜻이 담겨 있지요. 그밖에 쓰는 말로는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로 ”산처럼 오래 살고 바다처럼 부자가 되어라“,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곧 “마당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온다”라는 것도 있는데 온갖 좋은 말은 다 가져다 붙여놓습니다. 전남 구례에서는 입춘축을 "잡귀야 달아나라."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중기의 사대부 화가 낙파 (駱坡) 이경윤( 李慶胤, 1545∼1611)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에는 한 남자가 달을 보며 무심하게 거문고를 탑니다. 그런데 이 거문고는 줄이 없는 무현금(無絃琴)입니다. 줄이 없는 것이 거문고일 수가 있나요? 중국의 도연명이 음악을 모르면서도 무현금 하나를 마련해 두고 항상 어루만지며 ‘거문고의 흥취만 알면 되지 어찌 줄을 퉁겨 소리를 내야 하랴.’했다는 그 무현금이지요. 선비들이 마음을 닦기 위해 연주했다는 거문고. 그래서 줄이 없어도 가능했던가 봅니다. 거문고를 즐겼던 안평 대군(安平大君)과 임영 대군(臨瀛大君)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세조는 배우지 않았어도 거문고를 잘 타서 아버지 세종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피리를 불자 학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다는 세조는 그러나 거문고로 마음을 닦은 것이 아니어서 조카 단종을 죽였는지도 모릅니다. “아! 이 오동은 / 나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 서로 기다린 게 아니라면 / 누구를 위해 나왔으리오.” 위 시는 지금 전해지는 거문고 가운데 오래됐다는 ‘김일손 거문고’(다른 이름 ’탁영거문고‘)에 새겨진 것입니다. ’김일손거문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협정서를 바탕으로 대한제국에 강제로 빚을 얻도록 합니다. 또한 대한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 외교 고문을 들여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고문들은 대한제국의 재정, 금융, 화폐 제도 등을 재편하여 식민 지배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지요. 그러면서 1906년, 1,300만 원이던 일본에서 빌려온 빚이 1년 만에 1,840만 원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민족운동의 하나로 국채보상운동이 펼쳐졌지요.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제안된 것은 1907년 1월 29일 광문사 문회(文會) 특별회였는데 이 자리에서 서상돈은 모든 국민이 금연으로 돈을 모아 국채를 보상하자고 제의했고, 참석자들이 이에 찬성하면서 즉석에서 2,000여 원이 모금됐지요. 이렇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전국 곳곳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국채 1,300만 원은 우리 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이다. 2,000만 민중이 3달 기한으로 담배 피우는 것을 그만두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마다 매달 20전씩 거두면 1,300만 원이 될 수 있다. 설령 다 차지 못 하는 일이 있더라도 1원부터 10원, 100원,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가 밥반찬이나 군것질로 즐겨 먹는 오징어의 한자말은 ‘오적어(烏賊魚)’ 또는 ‘묵어(墨魚)’입니다. 오적어는 까마귀 오(烏)와 도둑 적(賊), 고기 어(魚)가 합쳐 생긴 말로 여기에는 재미난 유래가 있습니다. 오징어란 녀석은 물 위에 죽은 듯이 떠 있다가 날아가던 까마귀가 이를 보고 죽은 줄 알고 쪼려고 할 때 발로 감아 잡아서 재빨리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 잡아먹는다고 해서 오적어(烏賊魚)입니다. 그래서 오징어는 까마귀 도둑이 된 것이지요. 또 다른 별명 묵어는 먹물을 지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징어와 관련된 말에는 ‘오징어묵계’라는 것도 있습니다. 조선후기에 쓰인 요리서 《소문사설(謏聞事說)》에 보면 오징어묵계 얘기가 나옵니다. 이 책에 보면 “오징어는 뱃속에 먹물이 있어 그것으로 글씨를 쓸 수 있다. 다만 세월이 지나면 글씨 흔적이 사라져 종이 위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예전에 간사한 백성이 이것으로 문서를 만들어 사람을 속였으니 송사를 맡은 관리는 알아두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그래서 믿지 못할 약속이나 지켜지지 않은 약속을 “오징어묵계라”합니다. 특히 젊은 남녀가 한 사랑의 맹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치욕스러운 역사입니다만, 명성황후는 일제의 흉계에 의해 무참히 죽어간 조선의 국모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합했고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명성황후 유물은 남은 게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2010년 10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펴낸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를 보면 명성황후가 쓴 많은 한글편지와 아름다운 시전지(시나 편지를 쓰는 종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 실린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이기대 학술연구 교수 글에 따르면 현재까지 찾아진 명성황후 편지는 모두 134점 정도이며 이 편지글은 오늘날 귀한 유물입니다. 그동안 실물이 확인된 황실 여성 최초의 한글편지는 인목대비 김씨(선조 비) 것이 있으며, 이밖에 남아있는 것은 장렬왕후 조씨(인조 비), 인현왕후 민씨(숙종 비), 인선왕후 장씨(효종 비), 혜경궁 홍씨, 순명효황후 민씨(순종 비) 등이 쓴 편지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시 한문에 찌든 사대부가와는 달리 한글을 살려 편지를 썼고, 교지 글도 한글로 쓰는 등 글줄깨나 하던 학자들 대신 한글을 사랑하였으며 이것은 그동안 한글 연구와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