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2월 22일 뉴스를 보면 윤 대통령은 이날 주재한 제12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제1차 국민경제자문회의 마무리 발언에서 "거버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바로 레귤레이션이다. 마켓에 대해서 정부는 어떻게 레귤레이션 할 거냐, 마켓을 공정하게 관리하고 그 마켓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영어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영어 사대주의는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사실 윤 대통령의 영어 사랑에 관한 기사는 전에도 자주 눈에 띄었지요. 지난 6월 11 오마이뉴스에는 “내셔널 파크'라고 하면 멋있다고? 윤석열의 영어 사대주의”, 6월 28일 치 경남도민일보에는 “'열등감 보상'에서 발현된 윤석열의 영어사랑”, 또 7월 22일 오마이뉴스엔 “윤석열 대통령의 지극한 '영어 사랑'... 이쯤되면 '사대주의’”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였습니다. 심지어는 디지털타임즈 12월 25일 치엔 “‘사람이 먼저다’ 정철, 윤 저격…‘산타할아버지, 여기 영어 하는 사람 제발 가져가시라’”라는 기사까지 등장했습니다. 이처럼 말에 쓰는 단어 대부분을 영어나 외국어로 대체하고 토씨만 우리말을 쓰는 문체를 ‘보그체’라고 하고, 그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2월 18일 KBS ‘진품명품’ 프로그램에는 13세기에 빚은 영롱한 빛깔의 고려청자 향완이 출품되었습니다. 향완은 불교에서 공양할 때 쓰던 것으로 향로의 하나인데 우리가 흔히 보던 ‘청동은입사향완’과 달리 고려청자로 빚은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이 향완은 연꽃, 모란 그리고 구름과 같은 상서로운 무늬들로 가득했지요. 또한 상감, 역상감, 흑상감 등 고려청자 전성기 시절의 수준 높은 기술들로 새겨 놓아 이 의뢰품의 높은 값어치를 짐작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상감기법’은 고려청자에서 흔히 보던 기법으로 무늬를 새긴 뒤 무늬를 백토와 자토로 메워 무늬를 표현하는 기법입니다. 그런데 이 향완에서 보이는 ‘역상감기법’은 ‘상감기법’과는 반대로 무늬의 바깥 면을 파낸 뒤 백토를 넣어 무늬를 부각하는 것이지요. 이날 출연한 전문위원은 ‘역상감’으로 빚은 향완은 드물게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고려청자 향완은 추정가 2억 5천만 원이 되었습니다. 이날 출품된 고려청자 향완과 달리 1962년 국보로 지정된 ‘표충사청동은입사향완’은 청동에 ‘은입사’ 수법으로 무늬를 새긴 것입니다. ‘은입사’는 금속그릇의 표면에 무늬 모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황희(黃喜, 1363~1452)는 단연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종 시대에 18년 동안 정승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황희는 태종(太宗)이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지명할 때 반대해 태종의 분노를 사서 서인으로 폐해지고 유배에 처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세종은 황희를 등용하려 할 때 많은 중신이 반대하자 황희의 행동이 "충성스럽지 않다고 볼 수 없다"라며 이를 일축했습니다. 그런 황희는 왕권이 강했던 시절 임금의 일방적인 독주에 제동을 거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세종이 중년 이후 새로운 제도를 많이 제정하자, 황희는 “조종(祖宗)의 예전 제도를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라며 반박할 정도였지요.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임금 앞이라도 임금 비위를 맞추려는 게 아니라 주저 없이 아니라고 말했지요. 그런데도 세종은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을 빚었던 황희를 늘 중용했습니다. 그렇게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음에도 세종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세종 편에 섰지요. 세종은 말년에 궁궐 안에 내불당을 만들자 대신들과 집현전 학자들이 모두 반대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2월 13일 자 JTBC에는 “요정으로 쓰던 일본식 가옥서 '한복 홍보' 촬영을?”이란 제목의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부산시가 후원하고 부산섬유패션산업연합회가 만든 한복 홍보 영상이 일본식 건물인 적산가옥에서 촬영한 것이었는데 이곳은 해방 이후 '정란각'이라는 고급 요정으로도 쓰였던 곳이라는 뉴스였습니다. 주최 쪽은 “우리 문화의 일부고, 이런 곳에서도 한복이 더 빛났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진행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SBS 보도를 보면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가 ”최근 중국이 한복을 자국의 전통문화로 편입시키려는 '한복 공정'을 꾸준히 펼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은 중국에 또 하나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비판했습니다. 또한 누리꾼들은 "영상이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쳤을 텐데 아무도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게 참 답답하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복은 우리 겨레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뛰어난 문화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찍을 데가 없어서 일본식 적산가옥에서 한복 홍보 영상을 찍는다는 말입니까? 저런 행위가 늘어난다면 서경덕 교수의 말마따나 중국의 ‘한복 공정’에 놀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해바라기의 화가로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서양화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반고흐 자화상을 보면 귀 한쪽 없는 모습입니다. 그는 1888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귀의 일부를 잘랐다고 하지요. 그림을 잘 모르는 이들도 그런 고흐를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송곳으로 자기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화원 최북이 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최북(崔北, 1712~86)은 높은 벼슬아치가 와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윽박지르자 “차라리 나 자신을 자해할지언정 남에게 구속받아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라며 송곳으로 자기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습니다. 고흐와는 달리 최북은 본인의 확고한 의지를 가진 행위를 한 것이지요. 그렇게 꼿꼿한 정신으로 그림을 그렸던 그는 그림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그림값을 너무 많이 주면, 돈을 내던지며 비웃던 작가였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최북이 그린 <소채도>가 있습니다. 붉은빛 무와 가지, 그리고 오이를 마치 정물화를 그리듯 배경 없이 그려낸 이 그림은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이 듭니다. 특별한 물건이 아닌 삶에서 흔히 보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12. 11.) KBS ‘진품명품’ 프로그램에는 세로로 긴 서예작품이 하나 출품되었습니다. 바로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이 쓴 글씨입니다. 작품에는 의친왕이 아닌 ‘이강공(李堈公)’라고 쓰여 있어 고종황제 때 의친왕으로 책봉되었지만, 일본에 국권이 빼앗긴 뒤 왕이 아닌 ‘공(公)’으로 격이 낮춰졌음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의친왕은 조선 왕족 가운데 유일하게 항일운동에 참여한 인물입니다. 의친왕은 1919년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ㆍ최익환(崔益煥)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도중 그해 11월 만주 안동(安東)에서 일본 경찰에게 들켜 강제로 송환되었지요. 1919년 11월 20일 자 독립신문 기사에는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의친왕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낸 편지에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일왕의 아들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스물한째 ‘대설(大雪)’입니다. 한해 가운데 눈이 가장 많이 온다고 하여 대설이지만, 원래 24절기의 기준점 중국 화북지방과 우리나라는 지역이 달라서 꼭 이때 눈이 많이 오지는 않습니다. 김광균 시인은 “설야(雪夜)”라는 시에서 눈이 오는 정경을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라고 읊조립니다. 김광균 시인은 한밤에 홀로 서서 ‘그리운 소식’처럼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눈은 보리의 이불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눈이 보리를 덮어줘야 추위로 인한 피해를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눈이 오지 않으면 기우제처럼 기설제(祈雪祭)를 지냈습니다. 숙종실록 11년(1685) 11월 13일 자 기록 “절후(節候)가 대설(大雪)이 지났는데도 한 점의 눈도 내리지 아니합니다. 중신(重臣)을 보내서 기설제(祈雪祭)를 종묘(宗廟)와 사직단(社稷壇) 그리고 북교(北郊)에서 행하기를 청합니다.”라고 임금에게 청하는 부분이 보입니다.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카트만두라는 작은 왕국에는 '할단새'라는 전설의 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나운 할단새[鳥]도 이 대설 무렵만은 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國歌)’란 한 나라의 상징으로 통용되는 노래로써 주로 민족적ㆍ애국적 정서가 나타나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국가는 영국의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God Save the Queen)〉인데 1825년 국가로 지정되었지요. 또 한국의 국가는 안익태가 곡을 붙인 <애국가>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 불린 이후 널리 국가로 인정받았는데 최근 월드컵 경기에서 대한민국 대표선수들이 애국가를 부를 때는 감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며 국가를 애국가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애국가바로잡기국민운동 임진택 상임대표는 “우리가 국가로 부르는 애국가에는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ㆍ친나치 행각과 불가리아 민요 표절 혐의의 ‘감춰진 진실’이 있다.”라면서 “이제라도 법률적으로 정식 국가(國歌)도 아닌 현재의 애국가를 국가(國歌) 지위에서 내리고 새 애국가를 선정ㆍ보급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임진택 상임대표는 새로운 <애국가>로서 손색이 없는 현대의 노래들을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선생이 추천하는 노래들에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초경(初更, 초저녁)쯤 되어서 귀신(鬼神)이 나왔다고 소동이 벌어져 온 마을이 진동(振動)하니 허무한 일이다. 고을로부터 포 쏘는 소리와 두드리는 소리가 일각(一刻, 15분)이나 계속하여 온 마을이 소동하니 밤이 새도록 두렵고 무서우나 흔적이 없는 일이다.” 이는 370년 전 남평조씨라는 한 여성이 쓴 《병자일기(丙子日記)》의 정축년 7월 28일 기록으로 귀신 소동이 난 얘기입니다. 이 일기에는 남평조씨가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당하여 피난길에서 가족을 잃고 찾아다닌 이야기는 물론 종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힘들지만 꿋꿋하게 살림을 꾸려간 이야기, 이웃집에 불이 나거나 도깨비불 때문에 온 마을 사람이 소동을 벌이는 이야기, 종이 도둑 떼에게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온 이야기 같은 당시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일들이 마치 영상을 보듯 생생하게 담겨 있지요. 심지어는 적군이 밀려온다는 소문에 겁이 난 나머지 큰길로 나갈 수 없어서 작은 길로 밀려가다가 많은 피난민 행렬 속에서 아이들을 잃어버려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눈앞에 보는 듯하니 병자호란 당시에 백성들이 겪었던 고통을 조금이나마 알 듯합니다. 이 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는 시(詩)‘, 소설(小說), 수필(隨筆), 희곡(戲曲) 등을 아울러서 ’문학(文學)’이라고 합니다. ‘문학(文學)’은 본디 ‘글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공자가 처음 썼다고 하는데, 우리는 지금 ‘문학’을 그러한 뜻으로 쓰는 것이 아니며, 서양 사람들이 ‘리터러처(literature)’라고 하는 것을 일본 사람들이 ‘문학’이라 뒤쳐(번역) 쓰니까 우리가 그대로 가져와서 쓰고 있습니다. ‘문학’은 글 ‘문(文)’ 자 뒤에 배울 ’학(學)‘ 자를 붙인 말인데 예술을 뜻하는 말에 왜 배울 ’학(學)‘ 자를 붙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식 한자말로 ’음악(音樂)‘은 뒤에 즐거울 ’락(樂)‘ 자를, ’미술(美術)‘은 꾀 ’술(術)‘ 자를 붙였습니다. 모두 다 예술을 말하고 있는데도 예술과는 거리가 있는 글자를 붙여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평생 겨레말 사랑에 온몸을 던져 몸부림치다가 4년 전 세상을 뜬 우리말 사랑 으뜸학자 김수업 선생님은 살아계셨을 때 ’문학‘이 아닌 ’말꽃‘을 쓰자고 외쳤습니다. 김수업 선생님은 말합니다. “‘말꽃’은 입말, 글말, 전자말을 모두 싸잡은 ‘말의 예술’이라는 뜻을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