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전경목이 쓰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가 펴낸 《옛 편지로 읽은 조선사람의 감정》에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알 수 없는 편지 한 장이 있습니다. 원래 편지란 발신자와 수신자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글이지만, 이 편지의 끝에 보면 ‘누제(纍弟)가 이름을 쓰지 않은 체 머리를 조아려 아룁니다.’라고 썼습니다. ‘누제(纍弟)’는 귀양살이하는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 죄인이기에 자신의 성이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또 편지의 내용을 보면 귀양살이하는 사람이 지인에게 관찰사의 농락으로 유배지를 급하게 옮기게 되었다며, 하룻길을 갈 노비와 말을 빌려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죄수가 교도소에 있을 때나 이감하는 때는 모두 나라가 비용을 부담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처럼 유배 가거나 유배지를 옮길 때 거기에 필요한 말과 하인 그리고 여러 비용을 당사자가 스스로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웬만큼 부유하지 않고서는 이를 조달하기가 쉽지 않았지요. 더군다나 유배지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고, 장도 서지 않는 궁벽한 곳이어서 생활용품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근무하는 수령이나 근처에 사는 지인에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배달겨레치고 ‘윷놀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윷놀이’는 정초(正初)부터 정월대보름까지 가족과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전승ㆍ유지됐는데 지난 11일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새 종목으로 지정했습니다. 역사문헌에서 보면 ‘윷놀이’를 가리키는 말로 ‘저포(樗蒲)’, ‘사희(柶戲)’, ‘척사(擲柶)’라는 한자말이 있는데 우리 겨레의 우주관과 천문관을 바탕으로 음(陰)과 양(陽), 천체의 28수 등 형식의 완결성을 지니고 있지요. 또한, 윷가락의 다양한 지역적 분포(가락윷ㆍ종지윷 등), 윷판 없이 말로만 노는 건궁윷놀이 등 윷판의 다양한 형태, 놀이방법의 변형 등을 통해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여지가 높고, 현재에도 인터넷과 슬기말틀(스마트폰)을 통해 다양한 게임화가 이루어지는 등 변화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도 유연하게 전승되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사람이 윷이 되는 ‘인간윷놀이’가 생기고 윷판에 ‘임신’이나 ‘풍덩’ 자리가 생기는 등 재미난 변형도 나와 앞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이처럼 ‘윷놀이’는 ▲ 오랜 역사를 가지고 한반도 안에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 ▲《조선왕조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갓이 비록 낡았더라도 그것을 바르게 정제하려 해야 하고 옷이 비록 거칠더라도 그것을 모두 갖추려 해야 한다.” 이는 선비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사소절(士小節)》을 쓴 규장각 검서관(檢書官)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한 말입니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바로 격식을 갖추어 두루마기(또는 도포)를 입고 갓을 쓰거나 사모관대를 차려입고 옷매무시를 바르게 하는 '의관정제(衣冠整齊)'가 되겠지요. 실제로 조선 사람들은 의관정제를 모든 일의 근본으로 보았고 그것이 곧 한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는 바탕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은 갓과 함께 갓을 보관하는 “갓집”을 정말 소중히 생각했지요. 갓집의 형태는 보통 두 가지인데 하나는 겉모습이 갓과 비슷한 형태로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추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사진에 보이는 갓집은 덮개가 갓과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밑바닥은 동그란 모양과 네모, 팔각, 12각형도 있지요. 1866년 한국에서 순교한 프랑스인 드브뤼 신부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조선 사람 방에 들어가면 윗자리와 아랫자리가 있는데 처음에는 이것을 구분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명금일하대취타(鳴金一下大吹打) 하랍신다.” 이는 <대취타>를 시작할 때 철릭(무관이 입던 공복으로 허리에 주름이 잡힌 옷)을 입고 전립(戰笠, 무관이 쓰던 벙거지)을 쓴 집사(執事)가 지휘봉이라 할 수 있는 등채를 들고 호령하는 소리입니다. 이는 징을 한번 크게 울려서 관악기를 크게 불고, 타악기를 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대취타>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임금의 행차나 군대의 행진 그리고 개선 등에 사용한 대규모 연주입니다. 악기는 징ㆍ장구ㆍ북ㆍ나발ㆍ소라ㆍ태평소 등으로 편성되지요. <대취타>는 ‘무령지곡(武寧之曲)’, ‘구군악(舊軍樂)’이라고도 부릅니다. 여기서 ‘무령지곡’은 씩씩하고 편안하다는 뜻으로 조선시대의 공식 이름입니다. 그리고 ‘구군악’은 구한말에 신식군대가 생겨난 이후 붙여진 이름으로 보입니다. <대취타>는 군대에서 군사 훈련 때 사용한 것 말고도 외국의 사신들과 관련된 의전용으로 쓴 것으로 보아 요즘 외국 대통령이 오면 군악대가 나가서 연주하고 사열하던 것과 비슷합니다. 또 김세렴(金世濂, 1593~1646)이 쓴 《해사록(海槎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비록 금성 탕지(金城湯地, 방비가 견고한 성)가 있다고 해도 만약 백성이 없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하물며 북도(北道, 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는 곧 옛날 임금의 고향이다. 여러 대의 임금이 돌봐준 것이 여느 곳보다 천만 배나 더하였는데, 내가 즉위하고부터 덕이 부족해 하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지 못하고 성의가 얕아 백성들을 감복시키지 못하는지라, 수해와 가뭄으로 굶어 죽는 참사가 없는 해가 없었다. (가운데 줄임) 이는 모두 내가 민생을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보지 못하고 때맞추어 민생들을 구제하지 못한 소치니, 하얀 쌀밥이 어찌 편하랴?“ 이는 《영조실록》 영조 6년(1730년) 3월 26일 치 기록입니다. 영조는 매우 검소하게 살았던 임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벼슬아치들과 사대부 여인들의 사치 풍조를 개탄하며 이를 바로잡고자 스스로 먼저 검소한 태도를 보였지요. 특히 왕실에서 고급스러운 비단을 쓰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옷과 이불도 모두 명주로 만들어 썼습니다. 그는 자연재해인 수해와 가뭄조차도 자신이 덕이 없어서 그렇다는 마음으로 아파하고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최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이는 동아일보 1945년 12일 27일 기사의 제목입니다. 광복 뒤 독립정부 수립을 원했던 한국 사람들은 동아일보의 보도를 계기로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반대성명을 발표함은 물론 신탁통치 반대 집회를 온 나라에서 격렬하게 일으켰습니다. 일제강점기 35년의 고통을 끝내고 찾은 광복인데 다시 외국의 간섭을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해냄에듀에서 펴낸 《한 컷 한국사》에서는 이 동아일보 기사는 물론 조선일보 등 다른 신문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을 왜곡한 가짜뉴스를 보도했다고 지적합니다. 이에 따르면 1945년 12월 미국ㆍ영국ㆍ소련 세 나라 외무장관들은 이 기사와는 다르게 “한국의 독립을 위한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의 수립,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한 미ㆍ소 공동위원회 개최, 미ㆍ영ㆍ소ㆍ중 네 개 나라가 공동 관리하는 신탁통치를 최고 5년 기한으로 실시한다.”라고 합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국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한반도에서의 신탁통치는 오히려 미국의 일관된 정책이었고, 미국은 한국을 즉시 독립시킬 뜻이 없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마디로 미호종개 없는 미호천, 팥소 없는 진빵!!!” <애니멀파파> 블로그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블로그에 따르면 잦은 개발과 보 건설로 인하여 미호천의 특산종인 미호종개는 미호천에서 전멸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립문화재연구원은 미호종개 증식연구를 시작했고, 드디어 인공부화에 성공하여 지난 10월 19일 충청남도 부여군 지천에서 미호종개 어린 물고기 2천여 마리를 방류했습니다. 미호종개는 미꾸리과의 물고기로 금강수계의 미호천과 그 인근 물에서 살았는데 1984년 처음 알려졌지요. 한국 고유종이면서 세계적으로 희귀종인 이 물고기는 2005년 3월 17일에 천연기념물 제454호로 지정되었으며, 폐수와 골재채취 등으로 그 수가 크게 줄어 2012년에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1급으로 지정되어 환경부로부터 보호받고 있습니다. 미호종개는 몸 가운데는 굵지만, 앞쪽과 뒤쪽은 가늘고 깁니다. 보통 몸길이는 7㎝로서 머리는 옆면으로 납작하지요. 미호종개의 몸은 담황색 바탕에 갈색의 반점이 있는데 머리의 옆면에는 주둥이 끝에서 눈에 이르는 암갈색의 줄무늬가 있으며 몸의 옆면 가운데는 12∼17개의 원형 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시대 목조불상인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복장유물」 그리고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복장유물」을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 지정하였습니다. 이 두 불상이 조성될 때는 모두 통일신라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고 하지요. 이는 해인사가 802년 창건된 점에 비추어 볼 때, 법보전과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이 해인사 창건 시기와 머지않은 시점에 조성되었으며,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임을 말해 줍니다. 해인사 법보전과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도 뛰어난 조각기법을 보여주지요. 비로자나 부처의 수인(手印, 두 손의 손가락 모양)인 지권인(智拳印, 두 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린 뒤 왼쪽 집계손가락을 펴 세워서 위쪽 오른손 주먹 속에 넣은 모습. 이 수인은 불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있음)을 하고 한쪽 어깨를 드러낸 옷차림, 둥근 얼굴과 당당한 신체표현, 신체를 자연스럽게 감싼 옷 주름 등은 9세기 석굴암 불상을 연상시킬 정도로 조각의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입니다. 복장유물도 한국불교사, 미술사적 값어치가 매우 높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는 최만리를 비롯한 대다수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창제했어도 왕실이나 사대부들이 훈민정음이 언문이라며 외면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해지는 문헌을 보면 임금부터 왕실 어른들은 한글로 편지를 썼음을 알 수 있지요. 또 이렇게 왕실이 한글편지를 썼다면 사대부 벼슬아치들도 적극적으로 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정조임금은 어렸을 때부터 한글을 썼던 임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정조가 만 3~4살부터 46살 때인 정조 22년(1798년)까지 큰외숙모인 여흥민씨(驪興閔氏)에게 보낸 한글편지 16점을 모아 묵은 편지첩 《정조국문어필첩(正祖國文御筆帖)》이 그 확실한 증거입니다. 《정조국문어필첩》에 보면 5~6살 무렵 쓴 한글편지의 내용에 “가을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 알기를 바라오며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도 그리워하였사온데 어제 봉한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워하였사오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고 하시오니 기쁘옵나이다. 원손”이라고 되어 있어 어린 정조의 의젓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에겐 선조가 옹주에게 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개혁’은 한자로 ‘改革’이라고 쓰는데 여기서 ‘개(改)’는 고친다는 뜻이고, ‘혁(革)’은 가죽을 나타냅니다. 고대에 가죽은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의 계급과 신분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죽옷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계급이나 신분이 바뀐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뜻이고 지금은 ‘개혁’이라 하면 낡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로운 시대에 맞게 바꾸는 일을 말하지요. 지금으로부터 352년 전인 1670년 조선 중기의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완성하고 1770년 경상감영에서 펴낸 《반계수록(磻溪隨錄)》은 그야말로 개혁교과서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때는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이 일어나고 삼정(三政) 곧 나라 재정의 바탕을 이루었던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흉년ㆍ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풍년ㆍ추수기에 되받는 진휼제도에 관한 일)의 문란까지 겹쳐 농민들의 삶은 파괴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선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유형원은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며, 22년에 걸쳐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완성합니다. 그는 사회개혁가이기도 했지만, 이익이 쓴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