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부 부 - 정낙추 온종일 별말 없이 풀 뽑는 손만 바쁘다 싸운 사람들 같아도 쉴 참엔 나란히 밭둑에 앉아 막걸릿잔을 건네는 수줍은 아내에게 남편은 멋쩍게 안주를 집어준다 평생 사랑한다는 말 하지 않고도 자식 낳고 곡식을 키웠다 사랑하지 않고 어찌 농사를 지으며 사랑받지 않고 크는 생명 어디 있으랴 한세월을 살고도 부끄러움 묻어나는 얼굴들 노을보다 붉다 우리 겨레가 아내와 남편 사이에 쓰는 부름말은 ‘임자’였다. 요즘에는 ‘주인’이라는 한자말에 밀려서 자리를 많이 빼앗겼지만 말이다. 알다시피 ‘임자’는 본디 ‘물건이나 짐승 따위를 제 것으로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여느 이름씨 낱말이다. 아내는 남편을 “임자!” 이렇게 부르고, 남편도 아내를 “임자!” 이렇게 불렀다. 서로가 상대를 자기의 ‘임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서로가 상대에게 매인 사람으로 여기고 상대를 자기의 주인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아내와 남편 사이에 조금도 높낮이를 서로 달리하는 부름말을 쓰지는 않았다. 토박이말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 김수업 선생은 “아내와 남편 사이에 높낮이가 없다는 사실은 가리킴말(지칭어)로도 알 수 있다. 우리 겨레가 아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기 러 기 - 김수열 아비는 저렇게 가야 하는 것이다 두 눈에 진물이 흐르고 기억 저편이 흐릿해져도 두 어깨 나란히 어린 식솔들 거느리고 앞장서서 먼길 가야 하는 것이다 힘겨워도 내색하지 않고 지나온 길 애써 지우며 차갑고 먼길 가야 하는 것이다 내일 10월 8일은 24절기 열일곱째로 찬 이슬이 내린다는 ‘한로(寒露)’다. 본격적으로 가을이 온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권50 「지(志)」4 역(曆)을 보면 “한로는 9월의 절기이다. 초후에 기러기가 와서 머물고”라는 대목이 보인다. 이제 바야흐로 기러기가 오는 계절이다. 기러기가 습성상 짝짓기를 처음으로 한 암수는 한쪽이 죽어도 다른 기러기와 짝짓기를 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금실이 좋은 새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통혼례에서는 목기러기가 등장한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가수 최양숙은 1971년 김민기가 작곡한 ‘가을 편지’ 음반을 청초한 목소리로 발표한다. 그리고 작곡가인 김민기가 이를 새로 녹음하여 1993년 자신의 음반에 싣는다. 가을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잘 표현한 명곡이다. 최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무 1 – 지리산에서 - 신경림 (앞 줄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홍익인간(弘益人間)’은 대한민국의 사실상의 국가 이념이자 교육이념으로,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라는 뜻이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따르면 홍익인간은 환인이 환웅을 인간세상에 내려보내면서 제시한 지침이었다고 한다. 또 《제왕운기》 전조선기에 따르면 환인이 환웅에게 삼위태백으로 내려가서 홍익인간 할 수 있는지 그 의지를 물었고, 그런 지시에 응하여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이어온 풍습을 보면 그 홍익인간을 충실히 따르려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그 예를 들면 24절기를 시작하는 ‘입춘’에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꼭 해야 일 년 내내 액(厄)을 면한다는 ‘적선공덕행’이란 풍속이 있다. 또 섣달그믐에는 아이들이 풍물을 치고 다니면 어른들이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부대에 담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갈 같 날 - 한밝 김리박 낮때와 밤때가 똑 같다 하느니 오면 앗 읽고 달 돋으면 임 생각고 고요히 깊어가는 갈 선비는 졸 닦고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서서히 음의 기운이 커지는 24절기 열여섯째 추분(秋分)이다. 《철종실록》 10년(1859) 9월 6일 기록에 보면 “추분 뒤 자정(子正) 3각(三刻)에 파루(罷漏, 통행금지를 해제하기 위하여 종각의 종을 서른세 번 치던 일)를 치면, 이르지도 늦지도 않아서 딱 중간에 해당하여 중도(中道)에 맞게 될 것 같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여기서 중도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바른길’을 말하고 있는데 우리 겨레는 추분이 되면 더도 덜도 치우침이 없는 중용의 도를 생각하려고 했다. 세상일이란 너무 앞서가도 뒤처져도 안 되며, 적절한 때와 적절한 자리를 찾을 줄 아는 것이 슬기로운 삶임을 추분은 깨우쳐 준다. 또 추분 무렵이 되면 들판의 익어가는 수수와 조, 벼들은 뜨거운 햇볕, 천둥과 큰비의 나날을 견뎌 저마다 겸손의 고개를 숙인다. 내공을 쌓은 사람이 머리가 무거워져 고개를 숙이는 것과 벼가 수많은 비바람의 세월을 견뎌 머리가 수그러드는 것은 같은 이치일 것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웃 사람 - 허홍구 동네 골목길을 지나다가 가끔 낯선 분의 인사를 받는다 ‘안녕하세요’ 하며 반갑게 웃음꽃 피우며 지나가신다. 어, 내가 아는 사람인가? 누구지 하고 궁금했었다 나는 모르겠는데 저분은 나를 어떻게 알까? 다음 만나면 내가 먼저 인사해야지 그래, 우리 서로 모른다 한들 어찌 이웃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낯설어도 같은 동네 가까운 이웃이다. 예전 농가에서는 한로, 상강 무렵 가을걷이로 한창 바빴다. 〈농가월령가〉에 보면 “들에는 조, 피더미, 집 근처 콩, 팥가리, 벼 타작 마친 후에 틈나거든 두드리세……”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를 보면 이때 가을걷이할 곡식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 일손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속담에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 "가을 들판에는 대부인(大夫人) 마님이 나막신짝 들고 나선다."라는 말이 있는데, 쓸모없는 부지깽이도 필요할 만큼 바쁘고, 존귀하신 대부인까지 나서야 할 만큼 곡식 갈무리로 바쁨을 나타낸 말들이다. 이렇게 바쁘게 일하다 허기진 농부들에게 기다려지는 게 새참 때였고 이때 빠질 수 없었던 것은 막걸리였다. 막걸리는 이른바 '앉은뱅이 술' 가운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가 을 볕 -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 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24절기 ‘처서’가 지나고 어제는 ‘백로’였다. 이제 바야흐로 가을에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볕이 따갑다. 그래야만 들판에 벼가 익어가는 소리가 분명해진다. 또 농촌에서는 그 땡볕에 고추를 말린다. 그뿐이 아니다. 처서가 지난 무렵 우리 겨레는 ‘포쇄(曝曬)’라는 걸 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민가에서 옷을 햇볕에 말리는데, 이는 오래된 풍속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농가월령가> 7월령에는 “장마를 겪었으니 집안을 돌아보아 곡식도 거풍(擧風)하고, 의복도 포쇄(曝曬) 하소”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에 포쇄별관을 보내 실록을 포쇄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었다. 또 선비들은 이때 여름철 동안 눅눅해진 책을 말린다. 포쇄하는 방법은 우선 거풍(擧風), 곧 바람을 쐬고 아직 남은 땡볕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달 팽 이 - 이시향 남의 말 듣는 게 좋아 달팽이는 느릿느릿 걷습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달팽이는 귀가 몸보다 커다랗게 되었습니다. 남이 한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달팽이관 안에 작아진 몸을 집어넣은 달팽이가 느릿느릿 걷습니다. 조선시대 으뜸으로 손꼽을 문예부흥기를 이루었던 세종 때 신하들 가운데 인품이나 경륜, 학식 등에 있어 세종에 버금갈 학자들이 많았음은 물론 선왕이었던 태종 때부터 정승 반열에 있던 노련한 정치인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세종은 크게 삐걱거림 없이 그들을 이끌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세종은 학문을 연구하고 정책을 토론하는 경연을 종요롭게 생각하여 재위 기간 무려 1,898회나 열었는데 매달 5회 정도 경연을 연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경연 석상에서 세종은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신하의 말이나,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 못마땅한 발언에 대해서도 이를 곧바로 공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세종은 일단 “경의 말이 좋다”라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뒤, “이런 면은 어떻겠는가, 이러이러한 점까지 고려하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라며 부드럽게 자기 뜻과 주장을 펼쳤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 복효근 어둠이 한기처럼 스며들고 배 속에 붕어 새끼 두어 마리 요동을 칠 때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먼저 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멘 책가방 지퍼가 열렸다며 닫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썰렁한 내 방까지 붕어빵 냄새가 따라왔다. 학교에서 받은 우유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종이봉투에 붕어가 다섯 마리 내 열여섯 세상에 가장 따뜻했던 저녁 ▲ 다섯 마리의 붕어빵, 가장 따뜻했던 저녁을 만들어줬다. (출처, 크라우드픽) 우리 겨레는 더불어 사는 일에 익숙했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예부터 가난한 사람이 양식이 떨어지면 새벽에 부잣집 문 앞을 말끔히 쓸었다. 그러면 그 집 안주인이 아침에 일어나서 하인에게 “뉘 집 빗질 자국인가?”하고 물었다. 그런 다음 말없이 양식으로 쓸 쌀이나 보리를 보내줬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보릿고개에 양식이 떨어진 집의 아낙들은 산나물을 뜯어다가 잘 사는 집의 마당에 무작정 부려놓았다. 그러면 그 부잣집 안주인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곡식이나 소금ㆍ된장 따위를 이들에게 주었다. 물론 부잣집에서 마당을 쓸라고 한 적도 없고, 산나물을 캐오라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상하다 - 허홍구 마주 앉으면 싸우는 놈들 있다. 눈살 찌푸리게 하고 짜증 나게 한다. 더럽고 험한 말 하는 입에는 악취가 풍기지만 저들만 모른다. 거짓말 같은 참말도 있다고 하더라만 참말 같은 거짓말도 있다고 하더라! 누구의 입에는 오리발이 붙었다 하더라 곳곳에 땅이 흔들리는 지진이 일어나고 산불이 나고, 산이 무너지고 이상하다. 세계 곳곳에 기후도 이상해져 간다. 사람도 세상도 점점 더 이상해져 간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세상이고 자식은 또 부모를 죽이는 미친 세상이다 무엇이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 무슨 까닭일까? 그냥 있을 건가? 물속을 헤엄치면서 사는 오리발에 있는 물갈퀴가 뭍에 사는 닭에게는 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 우리 옛 속담에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라는 것이 전한다. 닭을 잡아먹고는 '내가 먹은 건 닭이 아니라 오리다.'라고 뻔뻔하게 시치미를 떼며 오리발을 증거랍시고 보이는 것에 빗댄 표현이다. 특히 정치판에서 정당이나 정당 내 파벌의 우두머리가 소속 국회의원과 주요 당직자들에게 명절이나 선거철 등에 비공식적으로 또는 정기적이나 부정기적으로 주던 음성적 활동자금도 오리발이라고 했다. 판공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도깨비와 함께 막거리를 - 함민영 꿈에서 도깨비가 나랑 씨름하자고 하네 아홉 번 지고 할머니가 일러준 게 생각나서 열 번째 왼발로 감아 넘기니 넘어갔네. 그 도깨비 막걸리를 좋아하고, 메밀묵과 수수팥떡도 좋아한다네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절대 해코지하지 않으며 도깨비는 오히려 사람에게 신통력을 부려 도와준다네 그런데 문득 내 앞에 도깨비가 나타나 함께 막걸리를 마셨으면 좋겠네. 열대야에 잠 못 드는 한여름이다. 이때쯤이면 어릴 적 긴긴 여름밤에 모깃불 놓고, 옥수수를 쪄먹으며 옛날이야기, 도깨비 이야기 따위를 듣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때 들었던 도깨비는 '키가 팔대장 같은 넘', '커다란 엄두리 총각', '다리 밑에서 패랭이 쓴 놈', '장승만한 놈'이라고 했다. 도깨비는 먹고 마시며,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고 전한다. 심술을 부리기도 하는 데 힘이 장사며, 신통력을 가지고 있어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주거나 망하게 하기도 한단다. 이렇게 신통력을 가졌음에도 우직하고 소박하여 인간의 꾀에 넘어가는 바보 같은 면도 있다. 또 사람의 간교함에 복수를 하기도 하지만 되레 잘되게 도와주는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