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땅’과 ‘흙’을 가려 쓰지 못하고 헷갈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뜻을 가려서 이야기해 보라면 망설일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하다. 뜻은 잘 가려 쓸 수 있으면서 그것을 제대로 풀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아는 사람들이 이런 우리말을 버리고 남의 말을 뽐내며 즐겨 쓰느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다는 사람들이 가르치지 않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배우겠는가? 공부하고 글 읽어 안다는 사람들은 우리말 ‘땅’과 ‘흙’을 버리고 남의 말 ‘토지’니 ‘영토’니 ‘토양’이니, ‘대지’니 하는 것들을 빌어다 쓰면서 새로운 세상이라도 찾은 듯이 우쭐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똑똑하고 환하게 알고 있던 세상을 내버리고, 알 듯 모를 듯 어름어름한 세상으로 끌려 들어간 것일 뿐이었음을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땅’은 우리가 뿌리내려 살아가는 터전을 뜻한다. 우리는 땅을 닦고 터를 다듬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땅을 헤집고 논밭을 일구어 먹거리를 얻어서 살아간다. 삶의 터전인 땅에서 온갖 목숨이 태어나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다. 세상 온갖 목숨을 낳고 기르는 어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任賢使能(임현사능) :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일 시키다.(《세종실록》 14/4/28) ... 이것은 대체로 엎드려 〈성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신성(神聖)하신 우리 임금께서는 문(文)도 마땅하게 하시고 무(武)도 마땅하게 하시는 나라의 큰 법과 기율을 세우시어 태평성대(泰平盛代)의 기초를 더할 수 없이 높였으며,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부리시어 널리 문무를 겸하여 걷어 들이시는 길을 열었습니다. (《세종실록》 14/4/28) 任賢使能, 廣開兼收之路。 급제한 문과 김길통, 무과 조석강 등이 사은의 전문을 올리는 데서 나온 말이다. 여러 기록을 보면 대략 세종 11년부터 ‘오곡(五穀)이 모두 풍년이고 온 백성이 함께 즐거워합니다.’ 등 ‘태평성세(太平盛世)의 모습’(《세종실록》 11/8/24) 나오고, 14년경부터는 안정된 승평(昇平, 나라가 태평함) 그리고 30년에는 융평(隆平, 갈등 없이평온함)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조선왕조실록》 원문 기록 건수 (세종/전체). 균평(均平) 6/98, 승평(昇平) 90/1227, 태평(太平) 100여/375, 풍평(豊平) 5/7, 융평(隆平)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까지는 화관무(花冠舞)라는 춤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화관무란 글자 그대로 꽃으로 만든 화려한 관을 쓰고, 추는 춤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하한 서도의 춤 사범, 민천식은 황해도 해주 지역 기녀들이 추어오던 화관무라는 춤에 탈춤과 교방무(敎坊舞)의 양식을 더해 완성도 높은 춤으로 재탄생시켰다, 그것은 호방한 한삼의 뿌림이라든가, 유연한 몸놀림 등, 궁중무의 절제된 ‘규칙’이라든가 민속춤의 ‘자유로움’을 갖추고 있으며 서도의 삼현육각(三絃六角)으로 반주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춤이라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최승희, 김정순, 배뱅이굿의 이은관, 재담의 김뻑국, 김실자, 김나연, 외 수많은 춤꾼, 소리꾼 등이 그에게 춤과 노래를 배웠다. 민천식은 화관무 말고도 봉산탈춤을 세상에 알려서 동 종목이 국가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로 지정받는 데 크게 이바지하여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인정서를 받는 당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예인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 김나연(현, 화관무 명예보유자)은 말한다. 선생은 “춤을 가르치면서도 늘 애국심을 강조해 주셨어요. 화관무는 태평성대를 소원하는 춤이라는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돕다’와 ‘거들다’ 같은 낱말도 요즘은 거의 뜻가림을 하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쓴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들여다보면 그 까닭을 알 만하다. · 돕다 : 남이 하는 일이 잘되도록 거들거나 힘을 보태다. · 거들다 : 남이 하는 일을 함께 하면서 돕다. 《표준국어대사전》 이러니 사람들이 ‘돕다’와 ‘거들다’를 뒤죽박죽 헷갈려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 두 낱말은 서로 비슷한 뜻을 지녀서 얼마쯤 겹치는 구석이 있게 마련이지만, 여러 가지 잣대에서 쓰임새와 뜻이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도 ‘돕다’는 사람을 겨냥하여 쓰는 낱말이고, ‘거들다’는 일을 겨냥하여 쓰는 낱말이다. 앞을 못 보거나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을 돕고, 배고픔과 헐벗음에 허덕이는 사람을 돕고, 힘겨운 일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사람을 돕는다. 한편, 힘에 부쳐서 이겨 내지 못하는 일을 거들고, 너무 많고 벅차서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거들고, 정한 시간에 마무리를 못 해서 허덕이는 일을 거든다. 이처럼 사람을 돕고 일을 거든다고 하면 쓰임새가 옳지만, 일을 돕고 사람을 거든다고 하면 쓰임새가 틀리는 것이다. 그리고 ‘돕다’는 몸과 마음으로 주는 것이지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번 한센병(나병) 전시에서는 “재일조선인 입소자의 생활 실태, 식민지 조선의 격리 정책, 그리고 패전후 국적을 박탈당한 재일조선인 한센병 환자의 고통과 투쟁을 다뤘습니다. 나아가 한센병과 우생사상(優生思想), 부락차별, 문학, 그리고 기쿠치 사건 등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2020년 <한센병과 조선인-차별을 살아내고> 전을 열었을 때 코로나19가 창궐하여 '감염병과 차별'의 문제에 직면했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센병을 둘러싼 차별의 벽을 넘을 수 있을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이는 며칠전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 운영위원인 마츠자키 에미코(松崎恵美子) 씨가 보내온 자료 가운데 <한센병과 조선인 벽을 넘어> 소책자의 머리말이다. '한센병과 조선인?' 나는 소책자 제목을 보고 잠시 착각을 했다. 한센병과 조선인 이야기라면 몇 해 전 이미 기사를 쓴 적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마츠자키 에미코(松崎恵美子) 씨가 보내 온 자료를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이번 자료는 <한센병과 조선인>에 관한 두 번째 전시를 알리는 자료였다. 내가 전에 쓴 기사는 202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화관무란 꽃으로 만든 화려한 관을 쓰고, 추는 춤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쪽으로 내려온 민천식 명인이 기존의 화관무에 탈춤과 교방무의 양식을 더해 완성도 높은 춤으로 재탄생시킨 춤, 당시 그는 나라의 태평성대와 민족의 영원을 염원하며 이 춤을 연희하였다고 한다. 이 춤은 정갈하고 기품이 있으며, 호방한 한삼의 뿌림이나 유연한 몸놀림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궁중무의 ‘규칙’과 민속춤의 ‘자유로움’도 갖추고 있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또한 그 반주음악이 서도의 ‘삼현육각(三絃六角)’이란 점에서도 흥미롭다. 앞에서도 말 한 바와 같이, 1930년대의 민천식은 민형식이라는 이름으로도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서도의 명창이었다. 그런가 하면 춤에 대한 열정도 대단해서 황해도 해주ㆍ개성 등지의 권번에서는 민천식이란 이름으로 기녀들의 춤사범으로도 활약했던 인물이다. 당시 한국 무용계를 대표하던 최승희도 그에게 와서 춤을 배웠다는 점으로 그의 명성은 어느 정도 짐작이 될 것이다. 민천식의 제자 김정순이 전해주는 말이다. “최승희가 와서 며칠을 자면서 춤을 배우고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라며 인사를 하고 갔는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윤동주 시인이 릿쿄대학(立教大學)에서 공부한 지 8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가 남긴 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윤동주를 그리워하며, 그의 시와 생애를 마주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이번에는 오랜 세월 윤동주 시인의 연구를 거듭해 오신 우에노 준 교수님께서 강연을 해주십니다.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이는 오는 2월 18일(일), 도쿄 릿쿄대학에서 열리는 ‘시인 윤동주와 함께 2024’의 안내글이다. 이번 도쿄 릿쿄대학 추도회는 코로나19 이후 3년만에 처음으로 대면으로 열린다. 이날 추도회는 ‘시인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 모임(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과 릿쿄대학 평화커뮤니티 연구 기구가 공동 주최한다. 추도회는 오후 2시부터 거행되며 1부는 추도 예배, 2부는 교토예술대학 우에노 준(上野 潤) 교수의 ‘윤동주시의 금일성(尹東柱詩の今日性)’에 대한 특강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한편, 이보다 하루 앞선 2월 17일(토)에는 윤동주 시인이 숨져간 호쿠오카 형무소터에서 ‘윤동주 시인 추도 79주년 기념식’을 가질 예정이다. 후쿠오카 추도식은 오후 1시 45분부터 진행되며, 옛 후쿠오카형무소터인 백도서공원(百道西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2024년 갑진년 푸른 용해가 밝았다. 지난해 나라가 온통 어수선해 온 국민의 시름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제 밝아온 새해는 지난해의 시름을 떨쳐 버리고, 힘찬 한 해가 되기를 비손해 본다. 설날,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여 세배하고 성묘하며, 정을 다진다. 또 온 겨레는 “온보기”를 하기 위해 민족대이동을 하느라 길은 북새통이다. “온보기”라 한 것은 예전엔 만나기가 어렵던 친정어머니와 시집간 딸이 명절 뒤에 중간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던 “반보기”에 견주어 지금은 중간이 아니라 친정 또는 고향에 가서 만나기에 온보기인 것이다. 설날의 말밑들 설날을 맞아 먼저 “설날”이란 말의 유래를 살펴보자.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1628년)의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설날을 “달도일(怛忉日)”이라고 했다. 곧 한 해가 지남으로써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하는 말이다. 그리고 '사리다' 또는 삼가다.'의 `살'에서 비롯했다는 설도 있다. 여러 세시기(歲時記)에는 설을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표현하고 있는데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하라는 뜻으로 본다. 또 '설다. 낯설다'의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우리 겨레의 명절 설날이면서 십이지(十二支) 날 가운데 ‘갑진일(甲辰日)로 새해 ‘첫 용날’ 곧 상진일(上辰日)입니다. 이날 새벽 하늘에 사는 용이 땅에 내려와 우물에 알을 풀어놓고 가는데 이 우물물을 가장 먼저 길어다가 밥을 지어 먹으면, 그 해 운이 좋아 농사가 대풍이 든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부녀자들은 이날 남보다 먼저 일어나 우물물을 길어오기에 바빴지요. 《동국세시기》에는 이러한 풍습을 ‘용알뜨기’라 했습니다. 용의 알을 먼저 떠간 사람이 그 표시로 지푸라기를 잘라 우물에 띄워두면 다음에 온 사람은 용의 알이 있을 딴 우물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전라남도 어떤 지방에서는 첫용날에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지 않는데 만일 물을 길어오면 농사철 바쁜 때 큰비가 내려 홍수가 난다고 믿었으며, 어촌에서는 어장(漁場)에 해를 입는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지방에서는 첫 진일 전날에 집집이 물을 넉넉히 길어다 두었습니다. 또 첫용날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털이 용의 머리털처럼 길어진다고 해서 이날 여인들은 머리를 감았으며, 농가 아이들은 콩을 볶아서 가지고 다니면서 먹었는데 그렇게 하면 그해 곡식에 좀이 슬지 않는다고 믿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는개’는 국어사전에도 올라서 꽤 널리 알려진 낱말인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라고 풀이해 놓았다. 굳이 틀렸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알맹이를 놓쳐서 많이 모자라는 풀이다. ‘는개’는 ‘늘어진 안개’라는 어구가 줄어진 낱말임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개 방울이 굵어지면 아래로 늘어져 거미줄 같은 줄이 되어 땅으로 내려앉으며 비가 되는데, 이런 것은 비라고 하기가 뭣해서 안개 쪽에다 붙여 ‘는개’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는개’처럼 비라고 하기가 어려워 비라고 하지 않은 것에 ‘먼지잼’도 있다. ‘먼지잼’은 ‘공중에 떠도는 먼지를 땅으로 데리고 내려와서 잠재우는 것’이라는 뜻의 풀이를 그대로 줄여 만든 이름이다. ‘먼지잼’은 빗방울이 ‘는개’처럼 아주 작기도 하지만, 공중의 먼지만을 겨우 재워 놓고 곧장 그쳐 버리는 비라는 뜻까지 담고 있다. 자연을 이처럼 깊이 꿰뚫어 보고 감쪽같이 이름을 붙이며 살아온 겨레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먼지잼’과 ‘는개’ 다음으로 가장 가늘게 내리는 비가 ‘이슬비’다. 비가 오는 것 같지도 않은데 풀이나 나무의 잎에 내린 비가 모여서 이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