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 이어 김동석 교수(Don Kim)의 국악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대학 2년 때 조영남, 문호근, 이건용 등과 <서울음대 연극부>를 만들어 공연하기 시작하였고, 3학년 때에는 <중앙여자고등학교>의 가야금 강사로 위촉되어 한 학년 전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는 이야기, 군 복무를 마치고 <리틀엔젤스 어린이 무용단>의 음악담당 교사가 되어 미국 닉슨 대통령이 있는 백악관과 일본에서는 천황 부부가 참석한 자리에서 공연하여 주목을 받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그의 관심은 UCLA에 민족음악학과가 있다는 사실과 그곳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리틀엔젤스와 해외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김 교수는 유학 준비를 서둘렀다. 우리말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결과 오래지 않아 UCLA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고, 1971년 6월, 꿈에 그리던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외국, 특히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일상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고 녹록한 일이 아니란 점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의 구구절절한 회고담이 유학 초기의 어려움을 잘 말해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부터는 UCLA 김동석(1944~ ) 교수의 국악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미국 이민 50여 년 동안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을 미국 땅에 심어 왔다는 이야기,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UCLA)의 교수로 한국음악을 강의해 왔고, 미국의 소수민족 음악모존하기 위한 더피재단(Durfee Foundation)의 수상자로 뽑히기도 하였으며, <재미국악원>의 원장으로 미국 내에서 국악 활동을 주도해 왔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함경도 산골마을에서 태어났으나, 경기도 양평에서 자랐고, 서울 전농동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국악사양성소>에 입학하여 국악공부를 시작하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가야금을 지도해준 분은 이왕직아악부 출신의 김영윤 명인이었다. 그리고 산조는 황병기에게 배웠다. 그는 가야금 말고도 특별히 고전무용에 관심이 많았던 학생이었다. 학교에서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궁중무용의 대가 김보남 명인에게 배우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묵정동에 있던 김백봉 무용연구소에 나가서 특별 지도를 받았을 정도였다. 허경자, 김매자, 정승희 등, 현재 무용계 원로들이 당시에는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까지는 일제 침략기, 전통가곡의 맥을 이어 온 하규일 명인과 경서도 민요를 전승시켜 온 벽파 이창배 명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하규일은 아악부와 정악전습소에서 후학들을 지도해 오는 한편, 권번에서도 많은 기녀에게 가곡을 가르쳤다는 이야기, 그 가운데 김진향(金珍香)은 《선가 하규일선생 약전》을 썼다는 이야기, 벽파는 경ㆍ서도 소리와 이론에 밝았던 민요계의 큰 사범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부터는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을 미국 땅에 심어 온 김동석(1944~ ) 교수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대학에서는 Donald Kim으로 알려져 있고, Don Kim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김 교수는 미국의 명문대학교, 곧 UCLA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에서 한국음악을 강의해 왔고, 미국 서부지역에서는 한국의 전통음악과 춤의 대부로 알려진 예술인이다. 그는 얼마 전, 미국의 소수민족들이 지닌 예술성 높고, 학술적 값어치가 있는 음악을 보존하기 위해 소수민족 음악인들에게 거액의 기부금을 제공해 주고, 연구 사업을 후원해 주는 ‘Durfee Foundation’의 수상자로 결정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이제까지 일제 침략기, 한국 전통가곡의 맥을 잇기 위해 아악부와 권번에서 제자들을 지도해 온 하규일 명인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였다. 하규일의 가곡을 이은 대표적인 제자들은 이병성, 이주환, 김기수, 홍원기 등인데, 이들은 체계적으로 악보집을 제작, 후진과 애호가들을 지도해 오는 한편, 발표회를 통해 가곡의 맥을 이어왔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하규일의 가르침을 받은 권번의 기녀들 가운데 김진향(金珍香)은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펴냈다는 점, 특히 젊어 한때, 진향은 시인 백석(白石)과 인연을 맺었고, 홀로 되어서는 그녀가 평생 모은 1,000억이 넘는 재산을 불교에 헌납하였다는 점, 그 많은 재산 아깝지 않은가라는 물음에, 백석의 시(詩) 한 줄값도 안 된다고 했다는 대답이 인상에 남는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번 주에는 벽파(碧波) 이창배의 제자들이 해마다 정례적으로 펼쳐오고 있는 경기지방의 산타령과 서도지방의 산타령 공연 이야기가 되겠다. 원래 이 공연은 지난 6월에 소월아트홀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으나,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인해 연기되었고, 그럼에도 관객은 입장이 허락되지 않는 조건, 곧 무관중 공연으로 막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가곡도 스승에 따라, 또는 부르는 이의 개성에 따라, 그 음악적 분위가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1993년,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이라는 악보 책을 펴낸 김진향은 어린 시절 권번에 들어가 하규일로부터 여창가곡을 배웠기에 저술이 가능했다는 이야기, 전통가곡은 창법이나 표현법 등이 비교적 점잖고 느리게 부른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60여 년 전, 스승에게 배운 노래를 기억하며 악보책을 펴낸 진향은 국악계에 거의 알려져 있지않은 인물이었다. 그를 잠시 소개해 보기로 한다. 진향의 본명은 김영한(金英韓)이다. 1916년, 서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타계하면서 집안이 망했고, 그러한 상황에서 권번으로 들어가 기녀의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살아있다면 올해 105세의 할머니가 된다. 오래전, 모 방송국 FM 라디오에 희귀음원을 들려주는 시간이 있었는데, 때마침 기생 신분이었던 김진향의 녹음본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진향과 만난 진행자는 “선생님과 대담을 하고, 여창가곡 한 곡조 녹음하러 나왔다”라고 인사를 하였더니, 진향의 반응은 다소 걱정스러운 태도로“다 늙은 목소리를 녹음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일제강점기에서 전통가곡의 명맥을 이어 온 금하(琴下) 하규일(河圭一, 1867~1937) 명인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최수보와 박효관에게 배웠고, 한일합방이 되자 관직을 버리고 <조선정악전습소>의 학감, 대정권번과 조선권번의 사범, 특히 1926년부터<이왕직아악부>에서 가곡, 가사, 시조를 가르쳤는데, 대표적인 제자들이 이병성, 이주환, 김기수 등이며 이들은 가곡, 가사, 시조의 악보를 제작해서 학생과 일반인 전수에 앞장서 왔다는 이야기, 특히 조선권번에서 여창가곡을 배운 기녀 제자, 김진향(眞香)은 1993년도에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펴내서 악계에 주목을 받았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1910년대 이후, 하규일은 권번에서 기녀들에게 가곡을 지도해 왔다. 국권을 잃은 후부터는 관기제도가 폐지되었고, 일반 시중에서는 기생들을 모아 조합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평양의 기성권번이나, 서울의 광교조합(廣橋組合) 등은 소리 잘하고, 춤 잘 추는 유명한 기생들을 많이 배출해 낸 대표적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광교조합은 뒤에 한성권번(漢城券番)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곳 출신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오늘날, 전통 가곡(歌曲)이 한국의 대표적 음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공헌해 온 인물은 하나둘이 아니다. 멀리 조선 전기, 세조 때의 음악을 싣고 있는 《대악후보》에도 가곡의 전신인 만대엽이 보이고, 그 뒤 《금합자보》를 지은 선조 때의 안상을 비롯하여 광해군 때에는 《양금신보》의 양덕수, 《현금동문류기》의 이득윤, 숙종 때에는 《현금신증가령》을 엮은 신성(申晟), 《청구영언》을 엮은 영조 때의 김천택, 《해동가요》의 김수장, 《가곡원류》를 엮은 고종 때의 박효관과 안민영 등등이 모두 가곡의 전승과 관련이 깊은 인물들이라 하겠다. 특히, 일제치하에서 가곡의 명맥을 오늘에 이어 준 하규일(河圭一 1867~1937) 명인과 그의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하규일의 아호는 금하(琴下), 그는 전문 음악인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20세 무렵부터 삼촌인 하중권(河仲權)의 제자, 최수보와 가곡원류의 편자 박효관에게 가곡을 배웠다고 전한다. 그의 6촌 형 역시 당대 가곡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던 하순일이었다. 금하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정가(正歌)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는데, <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까지 <도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였던 김숙자 명무와 수제자, 최윤희(본명, 최영순)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최윤희는 10대에 김숙자 문하에 들어가 5년여 전통춤의 기본 동작과 춤사위, 발 디딤새, 호흡, 등을 착실하게 배웠다는 이야기, <도살풀이춤>이란 <도당굿 살풀이춤>을 줄인 말로 흉살이나 재난을 없애 마음을 편안케 하고, 생명을 보존하여 행복을 맞이한다는 종교적 소원에서 비롯된 춤이라는 이야기, 최윤희는 전주대사습 <장원>, 진주 <개천예술제> 대통령상 수상, <전남도립국악단> 안무자, 대전 연구소 활동, 「홍성군립무용단」 창단을 비롯하여, <동국대 사회교육원>, <불교방송국> 등에서 『도살풀이춤』 강좌를 개설해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개인발표회(2004, 2)에 이매방 명인이 특별출연하여 혼(魂)과 맥(脈)이 담긴 최고의 춤을 이어받았다고 극찬하였다는 이야기, <입춤>은 즉흥성의 멋과 흥을 위주로 하는 춤이라는 이야기, 기억에 남는 공연으로는 미국 샌디에고에서 열린 세계평화기원 대법회에서 <도살풀이춤&g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도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 김숙자 명인은 타계하기 전, 수제자인 최윤희에게 이수증을 주고 그 전승체계를 세우려 했다는 이야기, 이수증(履修證)이란 무형문화재 제도에서 전수생 과정을 마쳤다고 하는 하나의 증명서인데, 수여 제도는 문화재청에서 주관하다가 보유자에게 일임하기도 하고, 현재는 다시 문화재청이 시행하고 있다는 이야기, 최윤희는 선생을 잃고, 평소 동경해 오던 인도로 가서 주위와는 소식을 끊고 잠적하였으나 춤꾼이 춤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법, 특히 <도살풀이춤>을 좋아했는데, 이 춤은 긴 수건을 허공에 뿌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려가는 춤사위가 일품이라는 이야기 등을 지난주에 하였다. 그래서일까, 최윤희는 가는 곳마다 <도살풀이춤>을 추었다. 미국공연을 마친 후에는“ 순백색으로 처절하게 펼쳐지는 살풀이, 그 예술성으로 청중들을 무아의 경지에 빠지게 하다”라는 논평이 신문이나 잡지를 도배하듯 했다. 그렇다. 그가 펼치는 도살풀이 춤사위는 비교적 선이 크고 굵다. 그래서 흔들림이 없는 천근(千斤), 만근의 무게가 느껴지는 춤이며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그 감동이 땅으로부터 하늘에 닿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입춤>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입춤>이란 서서 추는 모든 춤의 포괄적 명칭으로 이해해도 된다는 이야기, 즉흥성의 멋과 흥을 위주로 하는 자연적인 곡선의 춤으로 <교방무>, <굿거리 춤>, <수건춤>, <부채춤>, <소고춤> <헛튼춤>, <즉흥무>, <흥춤>, <기본춤>이란 이름으로도 불러왔다는 이야기, 입춤의 명무였던 김숙자의 춤사위는 현재 대전시 예능보유자인 최윤희가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1990년, 국가예능보유자가 된 김숙자 명무는 그 이듬해에 병사하게 된다. 당시의 상황을 최윤희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선생님께서 별안간 저에게 올라오라는 연락을 주셨어요. 저는 무슨 일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선생님 댁으로 달려갔지요. 저에게 선생님은 불분명한 목소리로 무슨 서류를 준비해 오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내용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더니 몹시 답답해하시면서 방에 있던 딸, 김운선에게 큰소리로 ‘언니에게 이수증 서류를 설명해 줘라!’라고 말씀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