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권효숙기자]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방의 창문가에 심어두고 보십시오. 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거든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 고죽 최경창의 무덤 연시(戀詩)를 읽으면 누구나 마음이 달달해진다. 요즘엔 문자메세지나 전화통화로 연인들이 마음을 전하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밤에 조용히 음악을 틀어놓고 편지를 쓰며 연인을 생각하곤 했다. 위의 시는 홍랑이라는 관기가 부임해온 최경창이라는 젊은 관리를 사모하다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배웅 나왔다가 작별하고 돌아가는 길에 지어 최경창에게 보낸 시이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임에게 바치는 순정은 묏버들처럼 항상 님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하며 연정가를 보낸 것이다. 최경창은... 조선 중기, 시를 멋지게 잘 쓰는 젊은 관리가 있었다.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중종34 ~ 1583, 선조16)은 평안 병마절도사 수인(守仁)의 아들로 전라도 영암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가운(嘉運)이고 호는 고죽(孤竹)이다. ▲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파주 광탄면 영장리에는 왕의 친어머니이자 후궁이라는 신분으로 사후에 묘를 원으로 조성하게 된 소령원이 있다. 숙빈 최씨(1670년(현종 11)~1718년(숙종 44)는 조선 제19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친어머니로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태어나 7살에 궁에 들어가 궁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여 숙종의 승은을 입어 아들 영조를 낳음으로 하여 일약 무수리에서 내명부 최고의 빈에 오른 인물이다. ▲ 숙빈 최씨의 소령원 능침 숙빈 최씨는 숙종의 승은을 입은 이후 숙원, 숙의, 귀인을 거쳐 숙빈에 봉해지고, 1694년(숙종 20) 24세에 영조를 낳았다. 1718년 3월 49세로 돌아가니 당시 양주군 백석면 영장리 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지내고 묘호(墓號)를 소령묘(昭寧墓)라 했으며 서울 궁정동 칠궁 안에 사당을 짓고 그 묘호를 육상묘(毓祥廟)라 하였다. ▲ 소령원 원비 ▲ 소령원 비각 그 후 1753년(영조 29) 6월에는 영조가 친어머니 숙빈최씨를 화경(和敬)이라 시호를 다시 올리고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시대에 임금의 생모인 후궁의 묘가 원이라는 형식으로 조성되는 것은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조선시대 전기에는 억울한 일이 있거나 민원을 올릴 때 신문고를 울려 조정에 알리는 제도가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이를 대신하여 상언(아랫사람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로 임금에게 민의를 직접 호소하는 수단), 격쟁, 와언(유언비어를 퍼뜨림), 괘서(이름을 숨기고 글을 써 정부를 비난), 산호(산에 올라가 욕지거리를 하며 읍정을 비판) 등을 이용하여 민원을 제기하였다. 이 중에 격쟁은 백성들이 궁궐에 난입하거나 국왕이 대궐 밖을 나올 때 징.꽹과리.북 등을 쳐서 눈과 귀를 집중시킨 다음 억울함을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수단으로서 이 격쟁을 가장 잘 받아들인 임금이 정조이다. ▲ 정조의 화성행차도.정조는 이러한 행차시에 백성들의 격쟁을 많이 받아들여 해결해 주었다 정조는 수원 화성과 아버지 융릉을 다녀오는 행차에서 수많은 백성들의 민원을 현장에서 접수하고 처리했는데 자그만치 재위기간 24년 동안 4천427건이나 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정조가 얼마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는지 알 수 있겠다. 정조는 자신을 호위하는 호위대 밖에서 격쟁하는 위외격쟁(衛外擊錚)과 행차시 어가 앞에서 문자로 호소하는 가전상언(駕前上言)을 적극 받아들여 가능하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마치 쏘아놓은 화살처럼 빠르게 흐르는 시간 위를 달리다 보면 살짝 어지러움증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묵묵히 흐르는 강물 위에 반짝거리는 햇살을 잠시 바라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강을 끼고 햇살을 바라보며 달리다 보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빠져나가는 삼도품 자리에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있고 조금 더 가면 파주 헤이리로 들어가는 성동나들목이 나온다. 들어가서 파주시청 방향으로 계속 직진하다 보면 갈현리 고개 위에 주유소가 왼편으로 보이고 그 주유소 뒤편 작은 길로 들어서서 비포장길을 터덜거리며 조금 더 가면 우리나라 최초 활과 화살 박물관인 영집궁시박물관이 나타난다. ▲ 전통 활과 화살의 장인 영집 유영기 중요무형문화재 영집은 우리나라 전통 화살이 장인인 궁시장 유영기(78) 선생의 호이다. 유영기 장인은 파주 장단 출생으로 수대에 걸쳐서 내려오는 가업을 이어받아 전통 화살장인의 길을 걸어 왔으며 1971년 9월13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으로 지정 되었다. 궁시박물관에는 우리나라의 전통 활과 화살을 비롯해 외국의 활과 화살, 활쏘기에 필요한 도구들, 쇠뇌, 화차 등이 전시되어 있다. ▲ 편전은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재너머 성권롱(勸農) 집의 술 닉닷 말 어제 듯고 누운 쇼 발로 박차 언치 노하 지즐 타고 아해야 네 권롱 계시냐, 정좌수(座首) 왔다 하여라 조선시대 낭만적인 대문학가 송강 정철은 참으로 술을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관동별곡,사미인곡 등의 작품을 남긴 가사문학의 대가로 윤선도와 함께 한국 고전문학을 대표하지요. 그러나 술을 좋아한 탓에 실수도 많아 유배를 떠날 때 선조임금이 은술잔 하나를 하사하며 이 술잔으로 하루 석잔만 마시면 술로 인한 실수로 남의 미움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답니다. ▲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대표적인 가사 관동별곡 위 정철의 시조에서 재 너머 성권롱은 파주 우계에서 살고 있는 성혼을 말하는데 어찌 알았는지 그의 집에 술이 익어간다는 말을 듣고는 소에 언치를 놓아 타고 찾아간다는 내용입니다. 그 당시 정철은 현재의 고양시 신원동 송강마을에서 부모님의 묘를 2년 간격으로 연이어 쓰고 시묘살이를 4년 7개월간이나 하며 살았습니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도 간간이 내려와 이곳에 머물렀고 죽은 후에는 부모님 근처에 자신의 묘가 마련되기도 했지요. 지금은 충북 진천으로 묘를 이장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파주 광탄면에서 고양시 고양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혜음령이라 부르는 높은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고려시대 개경에서 남경으로 가는 길이고 조선시대엔 북경으로 오가는 사신들이 다니던 의주대로의 한구간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이 고개를 넘어 임진나루를 건너 의주로 피난을 가던 길이기도 하고,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동생 이문승(李文升)을 잃었던 벽제관 전투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 혜음원터 발굴조사 현장 혜음령을 사이에 두고 벽제관과 혜음원이 있었다. 지금은 건물은 불타고 주춧돌과 그 터만 남아 있다. 벽제관은 조선시대의 역관터로서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에 역관이 10여 군데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반드시 이곳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이 고개는 산세가 험하고 높아 산적과 산짐승들이 자주 출몰하여 행인들의 짐을 빼앗고 해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조선초 서거정 등이 편찬한 시문집인 『동문선(東文選)』 64권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惠蔭寺新創記)에 의하면 고려의 수도인 개성의 동남방 지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2004년 12월 대법원은 분묘기지권에 대한 청주한씨문열공파종중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이 분묘의 피장자는 청주한씨 한상질이 아닌 안동 권씨 권준이며 안동 권씨 창화공파 종손 권혁홍에게 분묘기지권이 있다고 최종판결하여, 300여 년 간 청주 한씨 문열공파에서 관리 수호해오던 무덤의 주인을 하루아침에 바꾸어버린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 1993년 당시 묘역. 앞이 권준의 묘이고 뒤가 외증손 한상질의 묘이다 1991년 1월 민통선 지역인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산 112번지의 한상질 묘 및 그 부인의 묘가 도굴을 당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한상질(韓尙質)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공양왕 때 형조판서를 거쳐 우부대언, 우상시,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고,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 예문관학사로서 진문사(秦聞使)를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결정 받아 돌아온 인물이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문열공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당시 도굴된 흔적을 발견한 청주 한씨 문열공파 종중은 묘의 지하 내벽부분에 그림으로 보이는 채색(彩色)들이 보이자 국립중앙박물관에 제보를 하게 되었고, 곧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통일로와 자유로가 만나는 끝 지점에 임진각이 있다. 임진각 자유의 다리 옆에는 비무장지대 경의선 옛 장단역 남쪽 50여 미터 지점에서 6.25전쟁 때 중공군에게 피폭되어 멈춰 50여년간을 버려져 있던 화물차 증기기관 화통이 있다. ▲ 경의선 철교와 자유의 다리 이 증기기관차는 당시 연합군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개성역에서 황해도 한포역까지 올라갔다 전세가 악화되어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 1950년 12월 31일 밤늦게 경의선 장단역(장단면 동장리)에서 피폭된 뒤탈선하여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이 기관차는 검붉게 녹슬고 부식된 채로 반세기 동안 비바람을 맞고 방치되어 있다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후 녹제거와 방지처리를 한 후 임진각관광지로 옮겨졌다. ▲ 비무장지대 옛 장단역에서 옮겨온 증기기관차 화통 이 증기기관차 화통 안에서는 오랜 세월동안 흙먼지가 조금씩 쌓여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날아온 뽕나무 씨앗이 그곳에서 싹을 틔웠고 빗물을 먹고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 증기기관차 화통 북측 화단에 옮겨 심어진 뽕나무 가지가 화통 밖으로 져나오면서 기적과도 같이 그 뽕나무는 살아남아 제법 나무모양새를 갖췄다. 기차화통이 임진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의 율곡이이선생유적지가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525호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여 5월 25일 대대적인 기념식과 함께 고유제가 개최되었다. 율곡고등학교 취타대의 개막을 알리는 연주와 함께 파주시립무용단의 힘차고 역동적인 무대공연이 펼쳐졌고 곧이어 지역의 유림인사와 다양한 파주시민의 표창이 이루어졌다. 또한 율곡의 사상과 정신을 재조명해보는 한영우 전 서울대교수의 특별강연도 있었다. ▲ 파주시립무용단이 식전공연을 펼치고 있다 ▲ 파주시립무용단원이 율곡선생으로 분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어서 초헌관 김문수 경기도지사, 아헌관 이인재 파주시장, 종헌관 우관제 파주문화원장이 헌관으로 참여하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고유제례가 봉행되었다. ▲ 고유례에서 초헌관 김문수 경기도지사,아헌관 이인재 파주시장, 종헌관 우관제 파주문화원장이 예를 갖추고 있다. ▲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초헌례를 행하고 있다 율곡선생유적지 기념식장에는 많은 시민들이 참석하여 전시된 율곡의 어록과 행적을 읽어보고, 전통차 시음과 떡을 나누어 먹으면서 기쁨을 나누었다.2월 21일 자운서원(紫雲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문산에서 경의선을 타고 가다보면 임진강역을 지나 도라산역으로 갈 수 있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위를 철교로 건너면 철조망이 친근한 민통선 지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민간인통제지역이라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무성한 숲과 나무들, 고라니, 멧돼지 등 야생동물들과 이름 모를 풀꽃들, 그리고 그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는 백로, 기러기, 독수리가 보인다. ▲ DMZ안에 유일하게 민간인이 거주하는 대성동 마을. 판문점 인근에 있다. 국내외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분단의 아픔으로만 기억되는 이곳...이곳의 정확한 지명은 경기도 장단군이다. 고려 때부터 도읍지 개성 근교이고, 조선조에도 한양과 멀지 않아, 왕실과 사족들이 거주하거나 사후 문중의 선영지가 많은 곳이다. 이곳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왕건에게 신라를 넘겨주고, 왕건의 맏딸 낙랑공주와 결혼해 개성에서 살면서 신라의 도읍지를 그리워 하며 오르던 도라산(都羅山)이 있다. 또한 북쪽에서 비무장지대를 뚫고 온 1,653m 제3땅굴과, 장단콩 두부로 유명한 통일촌, 대성동 자유의 마을, 실향민의 해마루촌이 있다. 그리고 진동면 하포리에 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을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