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강기덕 선생을 ‘2022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았다. 이번에 꼽힌 강기덕 선생은 3·1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신간회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 이후에도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등 평생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 선생은 188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48명 가운데 한 명(학생대표, 보성법률상업학교 재학 중)으로 독립선언서를 각 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2차 시위(3월 5일)에서 깃발을 흔들며 군중의 맨 앞에 서서 만세를 부르다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만기 출소하여 고향인 원산에서 인쇄업에 종사했으나, 1924년 3월경 원산 보광학교 3·1만세운동 5돌 기념 인쇄물을 제작하며 3·1만세운동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또한 선생은 조선농민의 참담한 현실을 강조하며 경작제도의 문제를 개선하여 농민들의 수입증진을 위한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출소 뒤 선생은 신간회* 원산지회 발기인회에 참여하여 설립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서울 종로구의 종로5가와 6가 사이 위쪽에는 효제동이란 곳이 있다. 북쪽으로는 이화동(梨花洞), 동쪽으로는 충신동(忠信洞)ㆍ종로6가, 남쪽으로는 종로5가, 서쪽으로는 연지동(蓮池洞)과 접해 있는 지역인데 지금부터 99년 전인 1923년 1월 22일 이곳에서는 세상을 놀라게 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동네의 이혜수란 사람의 집에는 열흘 전에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34살의 한 청년이 숨어들어 있었는데, 추적하던 일본 경찰이 새벽에 이 청년의 은신처를 알고는 무장경찰 4백여 명을 동원해 이 씨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오던 상황이었다. 이에 이 청년은 지붕 위로 올라가 몇 시간 동안 일본 경찰과 지붕을 타고 다니며 권총으로 총격전을 벌여 많은 일본경찰이 죽거나 다쳤지만, 탄환이 다 떨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오자 항복하지 않고 스스로 머리에 총을 쏘아 자결하였다. 열흘 전 청년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것은, 당시 종로경찰서가 일제 식민통치의 골간을 이루었던 경찰력의 대표적인 본산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탄압, 압살하여 한국인들의 원한의 상징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폭탄으로 일본 경찰이 직접 죽거나 다친 것은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그제는 춥더니 어제(14일, 금)는 조금 날이 풀렸다. “11시 반까지 와서 차 한잔 하고 우리 함께 식사해요” 윤석남 화백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다정하게 들린다. 일주일 전에 전화 약속을 하고 화성시에 있는 윤 화백의 작업실을 찾았다. 두어 달 만이다. 언제나처럼 윤 화백은 앞치마 차림으로 천장 높은 작업실에서 그림에 몰두하고 있었다. “화백님! 그림 그리세요?” 반쯤 열린 작업실 문을 삐죽 열고 들어서며 물었다. “오, 이 선생 왔구나” 한참 작업에 몰두하던 윤 화백은 틀어 놓은 클래식 음악을 끄고 작업실 한켠의 소파로 우리를 안내한다. 오늘 윤 화백 작업실에 함께 한 이는 우리문화신문의 양인선 기자다. 찾아뵙기 전에 미리 전화로 소개를 했던 터라 윤 화백과는 금세 구면인 듯 우리 셋은 소파에 앉아서 한 시간 가까이 환담을 나눴다. 동행한 양 기자의 증조부께서 발안 만세운동의 선구자이신 이정근 의사(義士, 1991.애국장)라는 점과 벌써 여러 해째 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리고 있는 윤 화백, 그리고 나 역시 여성독립운동가를 취재하여 책을 쓰고 있는 입장이기에 우리의 주제는 단연코, 독립운동가였다. 윤석남 화백은 지난해(2021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유공자 등록심의 과정에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진행한 「보훈심사 국민참여단 모집」에 청년, 여성 등 사회 각 분야 100명이 뽑혔다.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 이하 ‘보훈처’)는 보훈심사 국민참여단 100명 모집에 449명이 지원하여 4.5대 1의 높은 경쟁률로 많은 국민이 관심을 보였으며, 지원자 가운데 직업, 연령, 성별, 거주지 등을 고려하여 100명을 뽑았다고 밝혔다. 이번 국민참여단 모집은 국가유공자 등록 절차 가운데 하나인 보훈심사위원회 심의 과정에 국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국가유공자법 개정을 통해 시행(’21.12.9.)된 「보훈심사 국민참여제도」 신설에 따른 후속 조치로 지난 12월 3주 동안(12.9. ~ 12.29.) 진행됐다. 특히, 국민참여단 모집에 공정하고 객관적인 선정을 위해 13일(목)에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국민참여단 선정위원회」를 통해 직업, 연령, 성별, 거주지 등 균형을 고려하여 마지막으로 국민참여단 단원 100명을 뽑았고, 그 결과를 14일(금)에 개별적으로 안내했다. 이번에 뽑힌 100명에는 60살 이상 고령자 24명뿐만 아니라, 29살 이하 청년도 19명이나 포함되어 세대통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 이하 ‘보훈처’)는 1942년 6월 30일에 한국광복군이 미국 연방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작성한 ‘대미(對美) 군사연대 제안 공식문건’을 처음 발굴하여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미국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 소장된 조지 맥아피 맥큔(George McAfee McCune)* 기증자료 일부로, 작년 12월 나라 밖 독립운동 사료수집의 하나로 보훈처가 직접 발굴해 온 것이다. * 조지 맥아피 맥큔(1808~1948) : 미국 출신 선교사이자 독립운동가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조지 새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의 아들이며,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 미국 전략정보국(OSS), 국무부 등에서 한국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한국독립운동 관련 문서를 다수 소장하게 된 것으로 알려짐 해당 문건은 당시 한국광복군의 참모장 이범석(1900~1972)이 미국 연방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1942년 6월 3일에 작성한 10쪽 분량의 보고서 형식 문서로,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적극적으로 펼쳐진 한국광복군의 대미 참전외교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결심과 각오가 있어서 한 일이니까 지금 와서 아무 할 말이 없다. 변호사의 변호도 나는 받지 않을 예정이다” -도쿄 일왕 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뒤 재판에서 한 김지섭 의사의 말- 1924년 1월 5일, 김지섭 의사(1884.7.21. ~ 1928.2.20.)는 일본 도쿄 한복판 일왕이 사는 황거 앞 이중교(二重橋-니쥬바시, 일명 안경다리)에서 왕궁을 향해 수류탄을 힘껏 던졌다. 김지섭 의사는 일제 경찰에 잡혀 투옥되었을 때도 “조선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순간까지 항쟁할 것이다. 사형이 아니면 나를 무죄로 석방하라.”라며 당당히 일제를 꾸짖었다. 경북 안동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난 추강(秋岡) 김지섭 의사는 반평생을 민족의 해방을 위한 의열투쟁에 헌신한 독립투사다. 김지섭 의사는 1907년 이후 구국계몽운동에 헌신하며 상주보통학교 부교원을 지내기도 하고 교남교육회에 참가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금산군수 홍범식(벽초 홍명희의 부친)이 자결하는 상황을 겪으며, 독립운동의 길에 뛰어들게 되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부춘화ㆍ김옥련ㆍ부덕량 선생을 ‘2022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았다고 밝혔다. 이번에 꼽힌 세분의 선생은 1931~1932년에 걸쳐 제주도 일대 해녀들을 중심으로 일제와 해녀조합의 수탈과 착취에 항거한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분들로서, 국가보훈처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선정사업을 시작한 1992년 이래 건국포장자로는 처음으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꼽혔으며, 제주도 출신으로도 처음이다. * 제주해녀항일운동 : 일제강점기 여성들이 주체가 된 민족운동으로, 연인원 1만 7천여 명이 참여한 제주도 최대 항일운동임 세분의 선생 모두 제주도 구좌면(현, 구좌읍) 출생으로, 부춘화 선생은 15살에, 김옥련 선생은 9살에, 부덕량 선생은 13살에 가족 생계에 보탬을 위해 어린 나이에 해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제주도의 토지는 척박하여 여성이라면 해녀 생활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웠고, 근대 교육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들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에서 함께 공부하고 근대 항일ㆍ민족의식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1930년 해녀조합의 우뭇가사리 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독립운동가의 집은 지켜주세요” “용인 3대 독립운동가의 집 대책없는 철거 웬말입니까?” “SK하이닉스는 독립운동가의 집을 빼앗고 허물지 마라” 위 문구는 광복군으로 활약한 유일한 생존 여성독립운동가인 오희옥 애국지사(95세)의 집 앞에 붙은 펼침막이다. 임인년 호랑이해를 이틀 앞둔 어제(30일), 용인시 처인구 보개원삼로 1640-2번지에 있는 오희옥 지사 집을 찾았다. 정작 집 주인인 오희옥 지사는 병환으로 서울 중앙보훈병원에 입원 중이고 주인 없는 집은 집 주위의 펼침막만 펄럭일 뿐 영하의 날씨처럼 썰렁했다. 오희옥 지사의 집은 ‘독립유공자의 집’으로 해주 오씨 문중이 땅을 제공하고 용인시 그리고 재능기부 기관과 시민 단체들이 십시일반으로 지은 집으로 지난 2018년 3월 1일 준공 테이프를 끊었다. 그러나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에서의 정착을 하기도 전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지 3년 9개월째 병원 치료를 받는 사이, 원삼면 일대에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SK하이닉스ㆍSK건설ㆍ용인일반산업단지(주) 등 6개 기관, 이하 ‘SK하이닉스’)이 들어선다는 계획이 발표되고 말았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은 만주망명 110돌을 맞이하여 경북지역 여성들의 항일투쟁기를 주제로 모두 6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이제 그 마지막인 제6편이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들 가운데 여성들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남성들 못지않게 이들의 활약과 비중은 작지 않았다. 모두 6편으로 살펴본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들이다. 1910년대 처음 만주에 뿌리를 내리고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김우락, 박순부와 같은 1세대 여성들, 1920년대 무장투쟁에 직접 뛰어든 남자현과 같은 여성들, 그리고 어린 나이에 만주에 정착하여 반평생을 후방에서 항일투쟁을 지원했던 허은, 이해동과 같은 3세대 여성들 모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들이다. 오늘 살펴볼 마지막 주제는, 3세대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 동북항일연군과 같은 무장단체 소속되어 직접 무기를 든 여성들이다. 1930년대 만주국이 설립된 이후 일제와 맞서 싸운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배성춘, 김노숙, 이근숙은 경북 출신의 대표적인 항일 여성투쟁가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유일한 생존 여성독립운동가인 오희옥(95세) 애국지사의 ‘독립유공자의 집’이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설립 예정으로 헐릴 위기에 있다는 소식이 여러 매체를 통해 줄기차게 보도되고 있지만, SK하이닉스측에서 이에 관한 협상을 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 것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민의 성금으로 조성된 ‘독립유공자의 집’을 관리하고 보존해야 할 용인시(백군기 시장)에서도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는 일은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사)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구, 한국광복군동지회) 이형진 회장의 이야기다. 어제(20일) 낮 1시, 기자는 전쟁기념관에 있는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사무실을 찾았다. 이 자리에는 오희옥 애국지사의 아드님인 김흥태 선생도 함께했다. 제17대 회장에 취임(10월 18일)한 지 두 달 남짓이라 그런지 아담한 크기의 사무실에는 책상과 소파 등 몇 가지 기본 집기들만 있을 뿐 썰렁했다. “소파 등도 모두 중고 물품입니다. 제가 회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근 10년간 광복군동지회는 개점휴업 상태였습니다. 1965년 9월 15일 ‘대한민국의 뿌리 한국광복군동지회’를 창립할 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