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은 만주망명 110돌을 맞이하여 경북지역 여성들의 항일투쟁기를 주제로 모두 6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5편은 망명한 독립운동가 3세대라 할 수 있는 허은과 이해동에 대해 집중 조명한다. 경북지역 독립운동가들은 1910년대부터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당시 어린 소녀였던 허은과 이해동 등은 만주망명 1~2세대에 의해 민족의 대들보로 자라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이국땅에서 자라면서 모진 고초를 감내하며 조국 독립을 열망하였다.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견딘 ‘허은’ 여사 허은(1907~1997)은 1907년 1월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범산(凡山) 허형(許蘅, 1843~1922)이며 재종조부로 방산(舫山) 허훈(許薰), 성산(性山) 허겸(許蒹), 허위(許蔿) 등이 있다. 모두 당대 의병을 이끌거나 부민단을 조직한 독립지사들이다. 이러한 집안의 내력으로 일제 치하에서 항상 감시와 억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12년부터 순차적으로 만주 망명을 떠났고 1915년 9살 어린소녀였던 허은도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 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은 만주망명 110돌을 맞이하여 경북지역 여성들의 항일투쟁기를 주제로 모두 6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4편은 영화 ‘암살’에서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걸 ‘안옥윤’ 역할의 모델이 되었던 남자현 지사의 무장독립투쟁에 대해 집중 조명한다. 남자현 지사는 1919년 만주로 망명한 이후 8년의 기간은 주로 후방에서 교육과 생활 안정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 계획을 수립한 1927년부터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1930년대는 일본이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만주전역에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던 시기였다. 더욱이 여준, 지청천과 같이 독립을 이끌었던 인사들의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때였고 이상룡이 사망도 겹쳤기 때문에 동포사회가 매우 불안정하였다. 이러한 어수선한 시국에서 국제연맹이 만주로 조사단을 파견하여 일본의 만주침략을 조사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남자현 지사는 독립 의지를 알릴 기회라 여겨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기로 하였다. 남자현 지사는 하얼빈의 한 음식점에서 왼쪽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서 조선(한국)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은 만주망명 110주년을 맞이하여 경북지역 여성들의 항일투쟁기를 주제로 모두 6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3편은 영화 ‘암살’에서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걸 ‘안옥윤’ 역할의 모델이 되었던 남자현 지사에 대해 집중 조명한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여성들은 대부분 한인 사회의 안정과 같은 후방기지의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남성들과 함께 항일투쟁에 직접 뛰어들어 활약한 여성들도 존재했다. 남자현 지사가 바로 그와 같은 역할을 한 실제 주인공이었다. 남자현 지사는 영양남씨의 후손으로 1872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남정한(南珽漢)과 진성이씨 사이에서 막내였다. 의성김씨 김영주(金永周, 1871~1896)와 혼인하였다. 남자현 지사가 주체적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뛰어들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함께 가족의 비극적인 환경이 함께 작용하였다. 혼인하고 5년 밖에 안 된 1896년, 항일 의병 활동을 펼치던 남편 김영주가 전사하는 비극을 맞았다. 남편의 죽음 이후 생계를 맡아 시부모를 봉양하고 유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어제(9일) 낮 2시부터 용인시청 국제회의실(문화예술원 3층)에서는 아주 뜻깊은 학술발표회가 열렸다. 이날 학술발표회는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앞두고 신흥무관학교 개교 110주년 기념 ‘신흥무관학교에서 활약한 용인 사람들’ 이란 주제의 학술 발표였다. 이번 학술발표회는 용인문화원 주최, 용인문화원 부설 용인학연구소 주관, 경기도 및 경기문화재단 후원으로 이뤄졌다. 제1주제는 여준과 신흥무관학교 (박성순, 단국대 교수), 제2주제는 오광선의 신흥무관학교와 만주 독립군 활동 (김명섭 단국대 연구교수), 제3주제는 김공집의 신흥무관학교 활동과 독립운동(박환 수원대 교수), 제4주제는 이영선의 신흥무관학교와 신흥학우단 활동(김태근 용인학연구소장)의 발표가 있었다. 이후 이어진 토론회에서 진행은 김용달(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이 맡았고, 김병기(광복회 학술원 원장), 박숙현(용인신문 대표), 이은성(용인학연구소 연구위원), 한동민(수원박물관장) 등이 참석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첫번째 발표에서 박성순 교수는 “여준(1862~1932)은 독립운동사에서 일군 크나큰 공적에 견주어 학술적 연구가 매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10월 28일 “기암 이중업의 학문과 독립 활동”의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학술 행사는 지역의 숨은 역사 인물들의 삶과 학문을 재발견하기 위해 안동시의 지원으로 매년 개최되는 역사인물선양 사업의 일환으로 금년은 문봉 정유일 학술대회에 이은 두 번째이다. 기암 이중업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경술국치 후 일제의 통치를 항거하며 단식을 시작한지 24일 만에 순국한 향산 이만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5년 아버지가 을미의병을 일으키자 격문을 지어 독립운동을 확산시켰으며 향산의 아우인 유천 이만규와 함께 유림의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올해는 기암의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학술대회에서는 기암 이중업의 학문과 독립 운동뿐만 아니라 향산의 아우인 유천 이만규의 학문과 독립 운동 및 일가의 독립 활동에 대한 주제로 심도 있는 발표와 토론을 진행하였다. 3대 문과 급제 3대 독립운동 가문 퇴계선생을 잇는 기암 이중업의 가문은 증조 이가순(1768-1844), 조 이휘준에 이어 부 향산 이만도까지 3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한 명문 가문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 안동대학교 인문대학은 만주망명 110주년을 맞이하여 경북지역 여성들의 항일투쟁기를 주제로 총6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2편은 1910년대 만주로 건너가 독립전쟁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시기를 조명한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남편을 따라 일가족과 함께 고난의 길에 동참한 여성들은 종속적인 삶을 살았던 전근대 여성의 모습을 넘어 주체적으로 만주의 한인 사회를 안정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들이야말로 만주 사회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0년대 만주에 정착한 독립운동가들은 군대를 양성하여 일본과 전쟁을 통해 독립을 이루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따라서 전쟁 수행을 위한 기본적인 지침을 마련하였다. 이를 위해, 첫째 만주 지역 동포 사회의 경제적인 안정, 둘째 독립 운동의 근거지가 될 자치기구 조직, 셋째 민족교육기관의 설치와 교육 활동, 넷째 군사양성시설인 병영의 설치를 주도했다. 이들 활동에 여성들 역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첫째, 만주지역 동포사회의 생활 안정에 기여하였다. 특히 생존의 근간이 될 안정적인 농업 경영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안녕하세요. 열사님! 제가 이렇게 오늘 서대문형무소에 와서 열사님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의 자랑스러운 업적을 알 수 있게 된 데에는 열사님의 노력과 희생 덕분입니다. 저는 열사님의 고통을 감히 헤아릴 수 조차 없지만 열사님을 포함해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의 업적과 희생과 노력을 잊지 않으며 항상 열사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저의 오늘은 열사님 덕분입니다. 2021.8.27. 지연 올림” 이는 지난 8월 10일부터 29일까지, 광복 76주년 기념으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관장 박경목)에서 열린 ‘생존애국지사 초상화 및 정밀모형(피규어) 특별전시회’를 보고 난 뒤 관람객이 생존 여성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에게 쓴 손편지다. 8월 현재 생존 애국지사는 모두 16분으로 이 가운데 여성은 오희옥(95세) 지사가 유일하다. 어제(18일), 오희옥 지사의 아들인 김흥태 선생으로부터 어머니(오희옥 지사)의 근황과 함께 지난 전시회 때 사용한 오희옥 지사 초상화와 손편지 엽서 사진을 받았다. 초상화는 이 기간에 전시된 16점 가운데 한 작품으로 초상화를 그린 화백은, 삼균주의를 제창한 조소앙 선생의 조카인 조범제 화백이 그렸고 전시를 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뜻깊은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윤재환 선생의 정부포상 받게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정부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우신 윤재환 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대통령표창에 포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국가보훈처, 2021.8.5.- 이는 8월 15일 광복절을 열흘 앞둔 8월 5일,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글 속에 들어 있는 독립운동가 윤재환(尹載煥, 1918~1938, 20세로 순국) 의사(義士)에 관한 ‘포상안내문’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이 포상안내문을 받아든 팔순의 장조카 윤용택 (82) 선생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피어보지도 못한 약관의 나이에 저승으로 떠나버린 비련의 독립운동가 백부(큰아버지) 윤재환 의사의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기 위해 뛰어온 지난 40여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에는 “윤재환 의사는 1934년 3∼4월 경기 개성에서 송도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학생조직인 AM회 내지 서남회(일명 소나무회) 학생 반원으로 회원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음.”이라고 간략히 나와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김지섭 의사 편지」, 「한성미술품제작소 은제 공예품(이화문 합)」, 「제주 구 육군제1훈련소 정문」 3건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한다. 이번에 등록 예고되는 「김지섭 의사 편지」는 의열단원 김지섭이 1924년 1월 5일 일본 도쿄 왕궁 입구의 이중교에 수류탄 3발을 던지고 투옥된 뒤, 옥중에서 동생과 부인에게 보낸 편지 4건이다. 강력한 의열 투쟁에 나섰던 항일 투사 김지섭의 진솔한 내면세계와 인간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동생 김희섭에게 보낸 편지 3건에는 판결 언도일을 앞둔 상황에서도 의연한 태도, 투옥된 동지의 안부, 아들에 대한 애틋함과 가족에 대한 염려가 담겨있다. 아내인 권석희에게 보낸 유일한 한글 편지에는 김지섭이 수감된 일본까지 면회를 오려는 아내를 만류하는 절절한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한편, 의열단은 1919년 조직된 항일 무장독립운동 단체로, 김지섭을 비롯한 의열단원의 활동을 통하여 항일독립 사상을 드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성미술품제작소 은제 공예품(이화문 합)」은 대한제국 황실의 후원으로 ‘조선의 고유한 미술품 제작’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성미술품제작소(1908~1913)의
[우리문화신문=양인선 기자] 수원을 떠나 화성시에 정착한 지 10년 만에 다시 수원 팔달산에 올랐다. 방화수류정에서 출발하여 성곽을 따라 장안문, 화서문, 서장대를 지나 서남암문 근처에 있다는 '대한민국독립기념탑'까지 걷기다. 방화수류정이 올려다보이는 '별이네'라는 카페 이층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벽이 개방되어있어 청량한 공기가 그지없이 상쾌했다. 눈이 부시게 하늘도 푸르렀다. 아름다운 화홍문의 7개 수문을 흐르는 물소리도 정겨웠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멀리 사는 딸에게 간단한 안부와 더불어 사진을 전송했다. 100여 년 전 저 아름다운 정자 난간과 계단에서 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고, 밤엔 봉홧불을 피워 성곽 둘레가 불꽃밭이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근래에 《삼일운동 소사, 팔달산의 함성(김운성, 1981년)》이란 책을 감명깊게 읽었다. 3.1만세운동 뒤에, 방화수류정 바로 앞 중포산이란 언덕에 일제의 노구치 순사와 가와바다 순사의 초혼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1925년 경성일보에 게재된 사진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20년에 발굴 공개한 바 있다. 노구치 순사가 누구인가? 바로 지금의 화성시 송산 사강지역 독립만세 시위를 폭압적으로 진압하려다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