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최근 《난중일기》를 읽으며, 마치 업무일지를 작성하듯 건조하게 일기를 쓴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보고 많은 생각에 젖습니다. 우선, 치열한 해전이 벌어지는 시기를 제외하고 7년간 꾸준히 일기를 쓴 성실함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기록이 후세의 사료가 되리라 마음먹지는 않았을 테지만, 자신을 성찰하려는 일관된 의지와 노력은 귀감이 되고도 남습니다. 무엇보다 일기에서 자주 언급하는 단어들은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이야기하다 의논하다 대화하다 논하다 약속하다 등의 단어와 종일 이야기하다라는 말은 전쟁 한 복판에서 이순신과 동료, 그리고 부하장수들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이 단어들이 갖는 함의를 되새겨보게 합니다. 다시 말해 이 단어들은 이순신 장군의 면면을 확인하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먼저, 이순신은 원래 과묵한 사람이거나 말을 아끼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일기에서 그의 동료와 부하장수들은 말을 많이 하지만 정작 이순신은 별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의 말을 평가합니다. 연전연승의 비결은 집단적 지혜 모은 작전회의 ▲ 통영 한산도 세병관에 모셔진 이순신장군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황희와 함께 영광스러운 세종시대를 일군 허조(許稠)는 요즘으로 치면 쓴소리 잘하는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말 공양왕 때 과거에 급제한 이래 조선의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그이지만, 일관되고 한결같은 모습은 깐깐하고 비판적인 원칙주의자의 면모입니다. 그는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거침없이 직언하는 올곧은 신하의 표본입니다. 그의 강직하고 정직한 성품은 가족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허조의 처제가 일찍이 자식도 없이 홀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허조의 맏아들인 허후를 후계를 삼으면서 노비와 땅, 그리고 집과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제안을 해옵니다. 허조는 내 자식이 비록 재주가 없지만 집을 계승할 만하다.고 말한 뒤 만약 재산을 많이 얻으면 반드시 호사스럽고 사치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라며 제의를 거절합니다. 부자로 살기를 바라는 여느 부모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올곧은 신하의 표본, 나의 충신은 오직 허조 뿐이다 ▲ 허조의 영정 허조의 이같은 곧은 성품은 태종 때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었던 모양입입니다. 전에 서연에서 허조를 스승[文學]으로 모셨던 세자는 태종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황희와 함께 영광스러운 세종시대를 일군 허조(許稠)는 요즘으로 치면 쓴소리 잘하는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말 공양왕 때 과거에 급제한 이래 조선의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그이지만, 일관되고 한결같은 모습은 깐깐하고 비판적인 원칙주의자의 면모입니다. 그는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거침없이 직언하는 올곧은 신하의 표본입니다. 그의 강직하고 정직한 성품은 가족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허조의 처제가 일찍이 자식도 없이 홀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허조의 맏아들인 허후를 후계를 삼으면서 노비와 땅, 그리고 집과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제안을 해옵니다. 허조는 내 자식이 비록 재주가 없지만 집을 계승할 만하다.고 말한 뒤 만약 재산을 많이 얻으면 반드시 호사스럽고 사치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라며 제의를 거절합니다. 부자로 살기를 바라는 여느 부모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올곧은 신하의 표본, 나의 충신은 오직 허조 뿐이다 허조의 이같은 곧은 성품은 태종 때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었던 모양입입니다. 전에 서연에서 허조를 스승[文學]으로 모셨던 세자는 태종 8년 또다시 그를 스승[右輔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경복궁의 이궁인 창덕궁이 완성된 것은 태종 5년 때의 일입니다. 이때만 해도 아직 궁궐로서의 규모는 갖추지 못한 상태입니다. 주요 시설들이 다 들어서지 못한 탓입니다. 이듬해 태종은 창덕궁 동북쪽 모퉁이에 정자를 짓고, 해온정(解慍亭)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이 정자는 태종이 재임하는 동안 다목적 공간으로 쓰이는데, 초기에는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 장소로, 나중에는 종친을 위한 연회의 단골장소로 자주 이용됩니다. 잔치뿐만이 아니라 종친들과 함께 활쏘기나 격구를 구경하고, 이곳에서 삼군의 군사동원 태세를 점검하기도 합니다.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된 해온정 또한 이곳은 외척인 민무휼민무회 형제를 제거하는 논의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태종 16년, 의정부공신육조대간에서 두 사람의 죄를 청하는 상소를 쏟아내자, 태종은 밤에 유사눌을 해온정으로 부릅니다. 민무구와 민무질은 이미 벌을 받았고, 민무휼과 민무회도죄에 걸렸다. 민씨(閔氏)의 네 아들을 잇달아 죽이는 일은 차마 할 수가 없다. 태종은 민무구와 민무질에 이어 나머지 동생까지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그러자 유사눌은 불충(不忠)한 마음을 가지고 종지(宗支
[그린경제=육철희기자] 무릇 사람 되는 바는 예의이다. 머리는 신체를 대표하고 정신이 담긴 곳으로 인간에겐 더없는 신령스러운 곳이기 때문에 머리에 관(冠)을 쓰면 몸가짐이 바르게 되고, 몸가짐이 바르면 행동도 바르게 되며 안색이 평정하게 되고 응대하는 말이 순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관이란 예의 출발인 까닭으로 옛날의 성왕들은 관을 중시하였다. 예기 관의(冠儀)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거쳐야 하는 중요의례인 관혼상제 가운데 가장 먼저 치르게 되는 의례가 관례이다. 관례는 어른 나이가 된 남자에게 어른 옷을 입히고 머리에 관(모자)을 씌우는 의식을 말하고 여자는 어른 옷과 비녀를 꽂는 계례를 행하여 어른이 되었음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축복하는 의식이다. ▲ 성년례를 하는 모습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정신적, 신체적 성장을 의미하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어른다운 생각과 행동으로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게 하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므로 엄숙하게 삼가례(三加禮)라 하여 차례대로 평상복, 외출복, 예복의 순으로 갈아입게 하였다. 조선시대 태종은 의례상정소를 설치했고, 세종은 오례의를 제정하여 가례편에 왕세자와 문무관리의 관례를 행하였음을 보여주고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평소에는 찾지 않던 시장이나 생산현장을 들를 때는 대개 선거철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 표가 중요한 이들에게 민생투어라는 고상한 이름의 이 정기행사는 빠트릴 수 없는 일입니다. 국민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그들의 충의를 마다할 일은 아닙니다만, 선거 때만 반짝 그러다가 그 뒤로는 나 몰라라 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조선시대에도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민생 투어가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행행(行幸)이 그것입니다. 임금이 대궐 밖으로 행차하는 거동 일체를 일컫는 이 말은 왕의 궁 밖 나들이 정도쯤 됩니다. 행행은 화려하고 장대한 의식으로 치러지기도 하지만, 호위군관 몇 명을 데리고 조심스럽게 행차하는 소박한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대궐 밖 행차,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 해소 ▲ 정조대왕의 능행차 장면(출처-수원시청 수원화성문화제 홈페이지) 전자의 행행은 왕과 왕비의 무덤에 가는 능행(陵幸)과 후궁이나 세자의 무덤에 가는 원행(園行), 사냥을 겸한 군대 훈련인 강무(講武)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조선 후기 정조의 경우 재위 24년간 66회의 행행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는
[그림경제=김호심 기자]1980년대는 73년과 79년의 2번의 오일쇼크의 후유증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경기가 호전되면서 사회의 분위기가 점점 좋아졌습니다. 먼저 장발단속 완화, 통행금지 해제, 교복 자율화,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등 일련의 개방화 정책으로 국민들을 회유하기 시작한 군부정권은 이어서 컬러TV 방영과 프로야구, 프로씨름의 개막을 통해 대중들의 관심을 오락과 스포츠, 섹스로 바꿔놓습니다. 그리고 가장 활발한 성업이 시작된 곳은 소위 유흥가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심야다방과 가라오케 그리고 통행금지제도가 사라지면 모두 망해버릴 줄로만 알았던 여관이 오히려 자유로운 심야 활동과 함께 더욱 성업하기 시작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 토요일 밤의 열기를 보여주는 듯한 음반 표지 하지만 그들 모두 나이트클럽의 번성에는 명함도 못 내미는 정도였으니. 그동안 젊은이들만의 공간으로 여겨지던 춤방은 무도장인 캬바레, 그리고 쇼를 보여주던 나이트클럽, 그리고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음료나 맥주를 마시며 춤을 추던 입장식 디스코텍의 혼합 형태인 디스코 나이트가 등장함으로써 향유 연령대와 업태가 다양해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시대가 소비 지향적으로 급변하
[그린경제=육철희 기자〕혼례는 공경하고 신중하며 바르게 한 뒤에 친하게 되니 이것이 예의 대체이고 남녀의 구분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부부의 의를 세우는 것이다. 남녀가 유별한 뒤에 부부의 의가 있고 부부의 의가 있고 난 뒤에 부자의 친함이 있고 부자의 친함이 있은 후에 군신의 도가 바르게 된다. 그러므로 혼례는 예의 근본이다. 위는 예기에 모든 예절의 시작은 부부가 되는 혼례에서부터 비롯됨을 강조한 말이다. 통과의례인 관・혼・상・제 가운데 특히 혼례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하여 특별하게 여겨져 왔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던 남녀가 만나 또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일이고 두 집안이 하나로 합하는 일이니 당연히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혼인의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채 무조건 화려하고 예쁘게만 예식을 치르려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 먼저 요즘 사람들이 혼인(婚姻)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고 대부분 결혼(結婚)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살펴보자. 혼(婚)은 장가든다, 인(姻)은 시집간다는 뜻으로 혼인이라고 하면 남녀가 장가들고 시집간다는 뜻이 다 들어있어서 평등한 개념인데 결혼이라고 하면 남자가 장가든
[그린경제=김호심 기자] 기억하고 있습니까? 청춘 시절에 들은 그 그리운 멜로디! 이번엔 1960년경 미국에서 탄생한 새로운 사교댄스 및 댄스리듬으로 대단히 빠른 기세로 세계적인 유행춤이 되었던 '트위스트' 입니다. 1950년대 맘보스타일의 붐 이래,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리듬의 개척을 모색하고 있었지만, 최대의 성공을 거둔 리듬은 1960년에 등장한 트위스트 붐일 것입니다. 양 다리를 약 30센치 정도의 간격으로 열어, 무릎을 가볍게 굽혀 히프를 금방 다른 곳으로 비틀어 움직이면서 있는 대로 록큰롤 리듬에 맞추고 허리를 흔드는 단순 명쾌한 댄스입니다. ▲ 음반에 등장한 트위스트의 매력, 60년대는 트위스트가 세상을 장악했다. 특히 1960년 리듬앤블루스 가수 처비 첵커(Chubby Checker)가 '더 트위스트'란 노래를 이런 몸짓으로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널리 퍼졌습니다. 참고로 이는 식당의 종업원이었던 처비 체커가 삶은 감자를 밟아 비비면서 착안한 춤이라고 합니다. 남녀가 손도 잡지 않고 서로 떨어진 채 자유롭게 손발을 흔들고 몸(어깨허리다리)을 리듬에 맞추어 뒤트는 단순한 트위스트는 큰 유행이 되었으며, 이후 이 춤의 변형인 림보(limbo)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