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금강산을 바라보다
정선(鄭敾, 1676~1759)이 그린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斷髮嶺望金剛山]>은 바라보는 주체와 바라봄의 대상이 모두 표현된 특별한 그림입니다. 그림 오른편에는 단발령에 서서 저 멀리 금강산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단발령은 금강산 여행이 시작되는 고개로, 이 고개에서 바라본 광경이 너무나 황홀해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 승려가 된다는 뜻의 이름입니다.
정선은 단발령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길과 그곳에서 느낀 강렬한 첫인상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화면 왼쪽 위에 그려진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는 하얗게 칠해져 은빛 수정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정선은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당시의 벅찬 감동을 담고자 근경과 원경 사이를 과감하게 생략했습니다. 정선의 그림은 조선 말기 학자인 이상수(李象秀, 1820~1882)의 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늘이 드높은 가을날 저녁볕이 동쪽을 비출 때, 저 멀리 하얗게 솟아오른 금강산을 바라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정신이 황홀하여 결국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다고 한다. 봉우리마다 하얗게 눈이 내린 듯하고 그 바위의 생김은 마치 늙은 신선들 같아, 구슬 관을 쓰고 흰옷을 입은 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늘어서서 서로 인사하는 듯 실로 장엄하다.”
이상수,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 가운데
1711년 가을, 금강산 여행을 그리고 시로 읊은 화첩
1711년 늦가을, 36살의 정선은 동네 어른인 백석(白石) 신태동(辛泰東, 1659~1729)과 함께 금강산으로 떠났습니다. 신태동은 금강산에 다녀온 적이 있지만 정선은 첫 금강산 여행이라 더욱 설레었을 것입니다. 화첩에 덧붙여진 신태동의 고손자 신영(申泳)의 글에는 당시 정선 그림에 신태동과 여러 문사들이 어울려 시를 지은 정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김화 현감이었던 정선의 벗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은 그의 스승이자 당대의 문사인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일행과 금강산을 여행했는데, 아마도 정선 일행은 유람 중에 이병연 일행을 만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여행 중에 지은 시문과 화평을 묶은 수창록(酬唱錄)은 현재 전하지 않습니다.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은 <단발령망금강산>을 비롯하여 <금성(金城)>, <피금정(被衾亭)>,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總圖)>, <장안사(長安寺)>, <보덕굴(普德窟)>, <불정대(佛頂臺)>, <백천교(百川橋)>, <옹천(甕遷)>, <고성(高城) 문암관일출(門巖觀日出)>, <해산정(海山亭)>, <총석정(叢石亭)>, <삼일호(三日湖)>, <시중대(侍中臺)> 13점의 그림과 신영 쓴 발문 1편(1807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묘년풍악도첩》의 특징
이 화첩은 정선의 실경산수화 작품 가운데 그려진 시기를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작품입니다. 정선은 처음 가본 금강산의 풍경을 자세하고 조심스럽게 묘사했고 청록으로 꼼꼼하게 채색했습니다. <금강내산총도>는 마치 내금강 종합 안내도처럼 내금강 초입의 장안사부터 계곡을 따라가며 방문할 수 있는 명승 명소를 그린 뒤 그 이름을 표기했습니다.
그리고 <장안사>에서는 <금강내산총도>의 앞부분에 자리 잡은 장안사를 확대한 듯 절로 들어가는 무지개 모양 다리와 건축물, 주변의 계곡과 산세를 자세하게 그렸습니다. 장안사는 많은 여행객이 머물다 간 절로, 이곳 승려들은 금강산의 안내자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보덕굴>은 총도의 중앙 부분에 돋보기를 댄 듯, 계곡을 중앙에 두고 왼편에는 금강대(金剛臺)와 소향로봉(小香爐峰), 대향로봉을 층층이 그렸고, 오른편에는 수직의 절벽 중턱에 있는 보덕굴을 그렸습니다.
총도와 부분도는 서로를 보완해주며 지리에 대한 이해를 높여줍니다. <보덕굴>의 뒤편으로는 중향성(내금강의 영랑봉 동남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하얀 바위 성)의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그려졌습니다.
이와 같은 총도와 부분도의 관계는 반세기 전에 한시각(韓時覺, 1621~1691 이후)이 그린 《북관수창록(北關酬唱錄)》(1664)의 그림에서도 나타납니다. 1664년, 함경도 과거시험의 감독관으로 파견된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은 시험 전후에 함경도 관리들과 길주, 명천 칠보산 등지를 유람하고 이를 기념하는 그림과 글을 남기며 시화첩을 제작했습니다. 도화서 화원인 한시각은 마치 새가 되어 공중에서 내려다본 것 같은 시점[부감시(俯瞰視)]으로 <칠보산(七寶山)>을 묘사했고, 그 안에 작게 그려진 연적봉(硯滴峯)과 금강봉(金剛峯)은 단독 작품으로 제작되어 공간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칠보산>은 산을 겹겹이 둥글게 배치한 뒤 그 안에 칠보산의 주요 경물을 그렸고, 그 위쪽은 동해의 푸른 물결로 채웠습니다. <칠보산> 오른쪽에 그려진 구불구불한 봉우리는 <금강봉>에서 더욱 자세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정선은 17세기 실경산수화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실경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자신만의 구도와 화법을 썼습니다. <장안사>는 절 뒤편 나무가 울창한 흙산과 맞은편 바위 봉우리가 대조를 이룹니다. 흙산은 윤곽선에 쌀알 모양의 미점(米點, 동양화에서, 수목ㆍ산수 따위를 그릴 때 가로로 찍는 작은 점)을 더하거나 간단한 필선으로 나무를 표현했지만, 바위산은 각진 선으로 형태를 묘사하면서 상부에 흰색을 칠해 날카롭고 단단한 느낌을 강조했습니다.
정선은 그림마다 길을 뚜렷하게 표현했는데, 길 위에 점을 찍은 것이 특징입니다. 감상자들은 그림 속 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옛 여행을 추억하거나 가보지 못한 명승 명소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내금강 곳곳을 유람하고 외나무다리를 건너 불정대에 이르면 외금강의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열두 개의 폭포를 볼 수 있습니다. <불정대>는 <단발령망금강산>과 비슷한 구도로 좌우만 바뀌었습니다. 다만 수직의 바위 봉우리가 더 가깝게 배치되었고, 아래 오른쪽에 외금강의 영역임을 알려주는 외원통암(外圓通庵)이 그려졌습니다.
정선은 직접 보았던 것을 재구성하고 알고 있는 것과 종합하여 경물들을 배치했습니다. 고성의 유명한 정자를 그린 <해산정>은 정자에서 조망한 풍경과 일대의 여러 명소를 한 폭에 모두 표현한 그림입니다. 고성읍성의 서쪽에 있는 이 정자에서는 동해와 금강산, 남강(南江)을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해산정 좌우 언덕 위에 있는 거북바위, 저 멀리 병풍처럼 우뚝 서 있는 금강산, 남강의 적벽(赤壁)과 강가의 대호정(帶湖亭), 해금강에 솟아오른 칠성암(七星巖)을 특징적으로 그리고 이름을 표기했습니다.
정선은 강조하려는 것에 집중해 나머지는 생략하거나 부분만 그렸고, 그 사이를 운무(雲霧)로 처리했습니다. 주변의 실경을 설명적으로 도해한 <해산정>과는 달리 <옹천>은 풍경의 인상을 강조했습니다. 화면 왼편에 독 모양처럼 생긴 벼랑을 두고, 오른편은 동해의 물결로 채웠습니다. 진한 먹으로 쓸어내리듯 과감히 표현한 벼랑과 가는 선묘로 파도를 율동적으로 표현한 푸른 바다는 서로 대비되어 각자의 특징을 더욱 드러냅니다.
정선은 그림 속 인물처럼 옹천의 좁은 절벽길을 조심조심 따라가며 아래쪽에서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와 넘실거리는 물결에 아찔함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장엄한 자연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마음을 흔들어놓습니다. 때로는 바라보는 행위나 보고 있는 나라는 존재까지도 잊게 합니다. 그 놀라운 체험과 치유의 경험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으로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
금강산을 처음 다녀온 정선은 신비하고도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그림으로 풀어내고자 많이 고민했을 겁니다. 그는 이전의 실경산수화 전통에서 한 걸음 나아가 조선의 산수가 가진 특징을 담기 위해 새로운 구도를 사용하고 실험적인 화법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신묘년풍악도첩》은 정선이 완성한 개성적인 진경산수화의 첫 단계로서, 화가가 자신의 시선이 닿은 풍경을 재구성하면서 금강산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오다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