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선불교는 신라후기에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다. 교종인 교학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수많은 경전들(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등)을 배우고 익혀 차츰차츰 부처님의 제자로서 이론적 불교학을 배우고, 계율을 따르고 수행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부처님 처럼 깨달음에 가까와지고 나아가 세상을 밝히는 수행자가 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선종인 선불교는 깨달음을 얻어 이미 부처님에 버금가는 경지에 오른 선사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화두(깨달음을 얻기 위해 풀어야 할 숙제)만을 골똘이 탐구하여 스승과 같은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종파로, 인도에서 당나라로 들어 온 달마대사에서 시작하여 6조 혜능대사로 부터 크게 융성한 불교 종파다. 진리를 깨치면 잡다한 학문이나 이론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선불교는 교학불교와는 매우 다르다.
당나라의 초조 달마로 부터 6조 혜능까지는 스승은 좌선수행을 통하여 경지에 오른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오직 가장 뛰어난 제자 한사람에게만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선사로 인가를 하였기에 같은시대에 깨달음을 얻은 선사는 2인이상이 될 수 없었으나, 6조 혜능대사 이후로는 깨달음을 인가받을 만한 제자라면 그 수를 제한하지 않고 깨달음을 인가해주어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에는 수많은 선사들이 명산 여기 저기 절을 세우고 후학들을 길러서 선종의 본가들이 들어섰고, 당나라의 선사들로부터 선불교를 수입한 신라에는 구산선문(9곳 산에 개창한 선종 절)이 들어서게 되었다. 신라에 처음 선종을 들여온 스님은 가지산문을 개창한 도의선사였으며, 이곳 희양산문을 개창한 지증대사는 봉암사를 개창하였다.
지증대사는 신라 헌강왕5년(879)에 이곳에 이르러 희양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모여 큰 연못을 이루고 그곳에 큰 용이 살고 있는데 이를 선사의 신통력으로 몰아내고 연못을 메워 봉암사를 세웠다고 한다.
희양산문의 종찰로 많은 선사들을 배출한 봉암사는 고려초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고려시대에도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며 구산선문의 선맥을 이어왔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초기까지는 함허당 기화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며 원각경을 해설한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로는 불교탄압으로 차츰 기울어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란으로 절 안 건물들이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이후 봉암사는 선맥이 단절되고 절의 명맥만이 근근히 유지되어 오다가 1674년 신화스님이 중건하였으나 이후 차츰 쇠퇴하였다.
이후 국운이 기울어 일본의 침략이 풍전등화에 이르자 구한말인 1907년, 백성들이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와 의병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그나마 유지되던 전각들마저 대부분 일본군의 무차별 방화로 인하여 사라지고, 극락전만이 전소를 피하고 살아남았다. 그뒤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뒤 윤세욱 스님이 요사채와 영각 등을 신축하고, 선맥을 기리고자 개창주인 지증대사비각을 세워 보호하였다.
봉암사가 한국선불교의 특별한 위상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 사회적 혼란기임에도 뜻있는 스님들이 합심하여 "봉암사 결사"가 있었고 이를 실제적으로 실행했던 스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 청담스님, 자운스님, 우봉스님등 4인이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며 다짐하고, 그동안 망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퇴락한 부처님 정신을 다시 되살리며 참선수행의 선종사찰로 거듭나고자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스님들의 참선도량이 된 이후 1982년 대한불교 조계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고 스님들의 참선도량으로 고시하여, 일반 신도들의 출입을 막고, 선수행의 제일 수행도량으로 가꾸어 왔다.
현재 봉암사는 여름철 하안거 100일과 겨울철 동안거 100일 동안에는 철처히 통제하여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오직 부처님 오신날인 음력 4월 8일만이 개방되고 있다. 이에 따라 부처님 오신날에는 전국의 불자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봉암사 경내가 마치 산속에 펼쳐진 시장통과 같은 모습이 되곤 한다. 구산선문의 고찰로 본래 선종 사찰로 다시 살아난 봉암사가 깨달음을 성취하여 세상을 밝혀주는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기를 기원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