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동규 음악칼럼니스트] 내가 여권을 처음 만들었던 때의 이야기다. 영어에서 D를 느끼한 유성음으로 발음하여 내 이름 '김동규 Kim Dong Kyu' 를 '킴덩~큐' 로 발음되는 것이 영 마음에 안 들어 나는 남들과 다르게 여권이름을 Kim Tong Kyu로 신청하여 '킴통큐'라고 비슷한 소리로 들리도록 하였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나는 이태리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또다시 이름으로 인한 은근한 스트레스가 생겼다. 이태리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식 발음을 무시하고 자기네들 식으로 내 이름 김동규 Kim Tong Kyu 를 <킴므똥그큐> 라고 읽어버리니 내 이름이 너무 우습게 들리는 것이었다.
이태리에 진출해 있는 기업의 이름도 현대(HyunDai)는 <윤다이>로, 대우(DaeWoo)는 <다에부>로 발음되며, 한국의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Jung Myung Hun)을 <융그뮹그운>이라고 읽어버린다. 심지어 어떤 유학생은 콩클에서 우승을 하였는데 자기 이름을 하도 요상하게 부르는 바람에 입상한 줄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게 된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나는 이태리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또다시 이름으로 인한 은근한 스트레스가 생겼다. 이태리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식 발음을 무시하고 자기네들 식으로 내 이름 김동규 Kim Tong Kyu 를 <킴므똥그큐> 라고 읽어버리니 내 이름이 너무 우습게 들리는 것이었다.
이태리에 진출해 있는 기업의 이름도 현대(HyunDai)는 <윤다이>로, 대우(DaeWoo)는 <다에부>로 발음되며, 한국의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Jung Myung Hun)을 <융그뮹그운>이라고 읽어버린다. 심지어 어떤 유학생은 콩클에서 우승을 하였는데 자기 이름을 하도 요상하게 부르는 바람에 입상한 줄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게 된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
나는 고민고민 하다가 내 세례명인 요셉 (이태리어로 주세페 Giuseppe) 을 닉네임처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여 그때부터 나는 주세페김을 예명으로 쓰기 시작했다.
편하기는 하였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태리 사람들에게 나를 주세페김이라고 소개하면 네가 왜 주세페(요셉)이지? 진짜 한국이름은 뭐지? 하고 되묻는 경우가 가끔씩 있었다. 교회의 세례명이라고 해명하면서 본명은 김동규(東奎: 동녁동, 별규)로 '동쪽의 별'이라는 뜻의 이름이라고 다시 소개하면 다들 신비롭게 여기며 한편으로는 뜻있는 이름을 부러워하는 것을 보았고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미묘한 부끄러움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나를 주세페김이라 소개하니 나의 이국적인 외모에 헷갈렸는지 '한국말 참 잘하시네요'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서양식 예명에 대한 은근한 후회는 이렇게 가시지 않았다.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 한참을 뜸들이며 어설프게 내 이름을 읽는 공연 진행자도 참으로 많았었다. 쥬세뻬(이태리식), 조세프(독일식), 주세핀(섞어서), 휘갈겨 쓴 <주세페>를 잘못 읽어 주세퍼?, 쥐세께?, 쥐세끼? ...~ ~
아예 나는 무대에 올라 청중들에게 예명이 어려우면 순서를 바꾸어 주사파, 퍼주세, 패주세로 기억하시라고 농담까지 하고 내려온다.
어떤 분은 김이 아닌 주 선생이라 나를 부르기도 한다.
.....
언제부터인가 나는 한국에 돌아왔으니 이태리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전하는 앵무새가 되기 보다는 거기서 배운 것을 잘 활용하여 이제는 나만의 음악세계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한국사람이니 우리 정서에 맞는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고민할 즈음, '시는 죽지 않았다!' 라고 노래로 말하고 싶어 하는 이상백 시인을 만났다.
나는 결심했다. 나를 찾는 음악으로 아리랑을 작곡하여 부르기로.
이상백 시인에게 우리의 상고사와 모진 현대사 그리고 희망찬 미래까지를 포괄한 겨레의 서사시를 의뢰하여 이렇게 부부의 첫 우리말 노래시가 탄생하였다.
이상백 시인에게 우리의 상고사와 모진 현대사 그리고 희망찬 미래까지를 포괄한 겨레의 서사시를 의뢰하여 이렇게 부부의 첫 우리말 노래시가 탄생하였다.
<아리랑 아라리요>
여기까지 왔어요. 우리는
고개 고개 고개를 넘어
수 많은 언덕과 강과 바다도 건너 여기까지 왔어요
여기까지 왔어요. 우리는
고개 고개 고개를 넘어
수 많은 언덕과 강과 바다도 건너 여기까지 왔어요
같이 오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눈물 같은 씨앗들
그 자리에서 꽃을 피우고 숲을 이루어
그대들이 부르는 노래 여기까지 들려요
아리 아리 아라리요 아리랑 아라리요
흩어져 살아도 언제나 우리가 함께한다는 소리
따로 또 같이 불러도 온 몸이 저려 오는 소리
아리 아리 아라리요 아리랑 아라리요
같이 오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눈물 같은 씨앗들
우리가 고개를 넘을 때마다 별빛이 되어
어두움을 밝혀주던 노래 여기까지 들려요
그대들이 새벽 별로 뜨면 우리는 들풀이 될 게요
우리가 새벽 별로 뜨면 그대들은 들풀이 되어
기쁨으로 아침을 함께 열어요
하늘로 울려 퍼지는 아리랑 아라리요
온 세상 울려 퍼지는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아라리요'를 초연하고 있는 듀오아임(김동규, 김구미) |
그 해 현충일은 우리 부부에게 뜻 깊은 날이었다. 오전에는 아내가 국립현충원 추념식에서 부른 노래가 주요방송을 통해 전국에 방영되었고, 또 저녁에는 부부가 함께 국립극장에서 내가 작곡한 아리랑을 오케스트라와 초연으로 노래했다. 국제적인 요소를 염두 하여 <서울아리랑 Seoul Arirang>이라는 제목으로 초연하였다. 국악과 양악오케스트라, 사물놀이, 풍물패, 북청사자놀음, 합창과 무용 등이 한 데 어우러진 큰 연출을 요구하는 대곡이다.
처녀작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떨리지 않았다. 그동안 뜻 모를 서양음악에 눌린 숨통이 확 트이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관객들도 기다렸다는 것을 박수소리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끝없이 목 놓아 소리쳤다.
"아리랑~아라리요"
이제야 나를 찾은 듯한 자랑스런 기분이었다.
그 후로 제목을 원제 <아리랑 아라리요>로 다시 바꾸기로 하였고, 광복절이나 개천절 등 국가의 경축일에 여기저기서 노래할 기회가 생겼다.
https://www.youtube.com/watch?v=E2S6DSs6cvc&feature=player_detailpage
이 참에 아내와 상의한 것이 이탈리아식 예명 주세페를 우리 이름으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내 본명 김동규로 활동하는 가수가 파악된 이만 3-4명이나 되어 사실 예명이 필요하겠지만 한국에서는 본명을 쓰고 외국에서는 예명을 쓰는 것도 적절하리라. 또 <주세페김>이면 어떻고 <김동규>면 어떠하리. 두 가지 다 나의 모습인 것을...
사실 아내도 일본에서 태어난 한일 다문화 가정의 딸이고, 나도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를 왕후로 맞이했다는 가야 김수로왕의 후손이니 우리 부부는 분명 다문화 예술인의 표본이 아닌가.
사실 아내도 일본에서 태어난 한일 다문화 가정의 딸이고, 나도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를 왕후로 맞이했다는 가야 김수로왕의 후손이니 우리 부부는 분명 다문화 예술인의 표본이 아닌가.
나의 이름 찾기.
서두르지는 않겠다.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뿌려진 우리 민족의 씨앗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나가 각자에 맞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지금, 나의 이름보다 내가 부르는 노래가 나를 말할 것이므로.
서두르지는 않겠다.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뿌려진 우리 민족의 씨앗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나가 각자에 맞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지금, 나의 이름보다 내가 부르는 노래가 나를 말할 것이므로.
68주년 광복절.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에서 부부가 함께 <아리랑 아라리요>와 <아들아 아들아 Dear My Son> 를 부르며 특별히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린다.
▲ 주세페 김동규 |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팝페라테너, 예술감독, 작곡가, 편곡가, 지휘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아내 김구미(소프라노)와 함께 ‘듀오아임’이라는 예명으로 팝페라-크로스오버 공연활동을 하고 있다.
www.duoa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