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가곡의 원형은 <만대엽(慢大葉)>, <중대엽(中大葉)>, <삭대엽(數大葉)>이고, 삭대엽은 다시 <초(初)삭대엽>, <이(貳)삭대엽>, <삼(參)삭대엽>으로 확대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들 악곡의 이름은 <삭>이 아닌, <수>로 발음하여 <초수대엽>, <이수대엽>, <삼수대엽> 등으로 불러왔다는 이야기, 월하의 이수자 발표회에서 김영기가 부른 <이수대엽>은 봄날, 한 여인의 마음속 근심을 풀어내는 노랫말이 아름다웠고, 그 가사 위에 느린 흐름과 긴 호흡으로 이어가는 선율 구조, 특히 여성 특유의 속청으로 들고 내리는 창법이 돋보였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번 주에는 월하의 뒤를 이어 무형유산 <가곡>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은 김영기의 가곡 인생 이야기로 이어가 보도록 한다. 그가 여창 가곡과 만난 때는 중학교 3학년 때인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오른다. 당시 《국립국악원》에 근무하던 아버지의 권유로 <가곡>의 예능 보유자, 월하 명인을 만나게 되었으며, 첫 전수 장학생으로 김영기와 이승윤이 뽑혔다고 한다.
그 이후, 그들은 선생의 곁을 지키며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한 길로 걸어왔는데, 그 길을 택하게 된 결과를 두고 그들은 “가곡과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김영기가 주로 공연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면, 이승윤은 교육현장, 특히 《국악중고교》와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현장에서 후진 양성을 주로 해 온 가객이다.
무대이건 교단이건 무엇이 그들을, 아니 어떤 매력에 이끌려 가곡의 길을 선택하고 한 길로 걸어오게 만든 것일까?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스승 김월하 명인을 만났을 때의 감동적인 순간을 예능 보유자, 김영기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하게 앉아, 그 긴 노래를 부르고 계시던 스승님의 모습에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 긴 호흡으로 느린 선율을 이어가는 <가곡(歌曲)>이라는 노래를 듣는 순간, 노래 그 자체도 물론 감동이었습니다만, 그러나 그 이전에 노래를 부르시는 스승님의 반듯하신 자태는 정말 우리를 꼼짝 못 하게 만드셨지요. 노래를 대하는 태도에서 스승님의 삶, 그 자체가 너무나 고고해 보여 저희들 마음속에서는 그 삶을 온전히 배우고 싶었고, 또한 닮고 싶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노래보다는 노래를 대하는 스승의 태도에 감동하였다는 김영기의 전언(傳言)은 충분히 공감되고도 남는다, 그만큼 월하 명인의 가곡이나 시조창은 노래를 감상하기 이전에 이미 그 반듯하면서도 공손한 태도나 진지한 태도에 객석은 압도를 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악기 연주자((演奏者)나, 또는 노래를 부르는 창자(唱者)가 어떤 태도, 어떠한 자세로 전달해 주는가에 따라, 감상자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질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음악활동에 있어 <태도>는 제공자나 수용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음악적 요소로 꼽고 있다. 김영기가 기억하는 스승의 가르침을 하나 소개한다.
“스승에게서 배운 것은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한 목놀림이나 목을 쓰는 재주, 다시 말해 소리를 꾸며내는 기교가 아니었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말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른 마음에서 바른 노래가 나온다’라는 가르침이었지요.” 아마도 이 간단한 진리가 곧, 지금까지도 그의 제자들이 가곡을 부르며 살아온 기본적인 힘이며 자세다. 김영기가 이어가는 말을 조금 더 들어보기로 한다.
“선생님은 크고 실천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제시하지 않으셨어요. 가령,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거라’, ‘표정을 밝게 하거라’ 또는 ‘시선(視線)을 바르게 하거라.’, ‘소리를 잘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태도를 바르게 해서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라는 등등의 가르침이었지요. 비단, 저뿐만 아니라, 가곡을 대하는 전수자들에게도 기본적으로 이렇게 강조해 오셨지요.”
다정다감(多情多感)하면서도 또한 때로는 엄격하였던 스승, 월하 명인은 1996년 1월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었다. 김영기를 비롯한 모든 제자에게 월하 명인의 타계는 곧, 그들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음은 미루어 짐작되고도 남는다. 스승을 저세상으로 보내드린 큰 제자, 김영기의 심정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선생님에게 공부를 시작한 지 24년째 되는 해였는데도, 갑자기 고아가 된 느낌이었어요. 의지할 곳을 잃은 공허함 속에서도 저는 <여창가곡>이라고 하는 이 큰 유산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 것인가? 근심과 걱정으로 앞이 캄캄했어요. 그러면서 저는 스스로 이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과연, 나는 제대로 스승의 가락을 세상에 전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끊임없이 자문자답(自問自答)하며 스승이 남기고 가신, 여창 가곡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랬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되묻는 그 물음들은 점차 큰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고, 그래서 그의 음악세계를 더더욱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라 믿고 있다.
2001년, 김영기는 국가무형문화재 <가곡>의 예능 보유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스승의 뒤를 이어 그 역할을 맡게 되면서부터 더더욱 큰 책임과 함께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이다. 남들에 견주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출세했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나 기대는 반신반의(半信半疑), 곱게 보는 쪽보다 따가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만큼 그 책임감은 그에게 더더욱 무겁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도 그 태산(泰山) 같은 무게에 자유롭지 못한 것은 여전하겠지만, 그러나 그가 가는 그 길은, 아마도 그 자신이 스스로 넘어야 할, 높은 산이라 할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