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30여 년 동안 강의하면서 한결같이 지켜온 평가 원칙이 하나 있다. 기본을 지키지 않은 보고서는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무조건 '씨뿔(C+)'부터 출발한다는 원칙이다. 학기 첫 시간에 미리 공지하고, 단 한 번도 예외를 둔 적이 없다.
그렇다면 기본을 지키지 않은 보고서란 무엇인가?. 보고서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크게 다섯 가지다. 이름 없는 보고서, 제목 없는 보고서, 날짜, 지도교수, 쪽수, 차례 등 기본 정보가 없는 보고서, 참고문헌을 안 밝힌 보고서 그리고 문단을 나누지 않은 보고서다. 그밖에 10쪽이 넘는 양인데도 스타일을 적용하지 않은 문서 등이다. 이름이 없으면 유령 보고서인 셈이고, 제목이 없으면 집에 문이 없는 셈이고 날짜, 지도교수 쪽수, 차례 등이 없으면 보고서로서의 족보 등의 기본 요건을 알 수 없는 격이고, 참고문헌을 안 밝히면 글도둑질이 될 수 있고, 문단을 나누지 않으면 생각의 흐름을 얼른 알 수 없어 읽는 사람이 불편하니 기본 글쓰기로서의 자격이 없다. 스타일 기능은 디지털 문서 작성의 기본으로 마치 종이 원고지로 말하면 원고지 기본 사용법과 같다.
가끔 내용을 잘 쓴 학생들이 이의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내용이 이렇게 좋은데 형식 때문에 씨뿔이라니 지나친 형식주의 아닙니까?’라는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평가의 공정성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내용이 부족하면 나중에 얼마든지 보완하면 된다. 더 읽고, 더 생각하고, 더 고치면 내용은 보완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을 안 지키는 습관이 몸에 배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기본은 보완 대상이 아니라 바탕으로서 출발 조건이기 때문이다. 30년 동안 이 원칙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보니, 처음에 투덜대던 학생들도 사회에 나가서는 “그때 그 씨뿔 원칙이 저를 살렸습니다”라고 고백해 오곤 했다.
이번 6·3 선거에서 벌어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이 원칙을 떠올렸다. 투표용지를 50%밖에 인쇄 안 했다는 것은 그 어떤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거 관리의 기본 중의 기본은 무엇인가. 유권자 수만큼 투표용지를 준비하는 일이다. 선거인 수는 선거 전에 이미 확정되어 누구나 알 수 있는 숫자다. 보고서에 이름과 날짜를 적는 것만큼이나 단순하고 자명한 기본이다. 수십 년 선거 관리 경험을 자랑하던 기관이 가장 초보적인 산수 앞에서 민주주의 뿌리까지 흔드는 실수를 저질렀다.
비단 선거만의 일이 아니다. 최근 드러난 GTX 삼성역 공사 현장의 철근 빼먹기 사건을 보라. 설계도면에 두 줄로 박아야 할 기둥 철근을 한 줄만 박았고, 그렇게 빠진 철근이 2천5백 개가 넘는 178톤이나 된다고 하니 그게 생명의 무게가 아니면 무엇인가? 철근은 건물의 뼈대다. 설계도대로 철근을 박는 것은 시공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를 확인해야 할 감리가 점검표에 줄줄이 ‘합격’ 표시를 했다는 사실이다. 기본을 어긴 시공 위에 기본을 어긴 감독으로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했다.
서소문 고가차도 붕괴는 또 어떤가? 붕괴 열두 시간 전부터 이상 징후가 나타났고, 상판이 내려앉았다는 보고까지 있었지만, 주변 통제도 통보도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상 징후가 보이면 즉시 알리고 통제하는 것이 안전 관리의 기본이다. 그 기본이 작동하지 않는 사이 고가 아래로는 열차와 사람들이 평소처럼 지나다녔다. 필자도 사무실이 광화문인지라 사고 전날 사고 난 곳을 자동차로 통과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투표용지 부족, 철근 누락, 고가차도 붕괴. 분야는 제각각이지만 본질은 하나다. 모두 기본을 어긴 것이다. 그리고 이 사태들은 내가 학생들에게 늘 했던 말을 그대로 증명한다. 내용이 부족하면 보완하면 되지만, 기본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보고서라면 씨뿔 한 번 받고 고치면 그만이지만, 선거와 다리와 지하 구조물은 다르다. 기본이 무너진 자리에는 참정권의 훼손이 있고, 시민의 목숨이 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보여준 정신도 결국 기본 정신이었다. 발음 기관을 분석하고 소리 이치를 따지고,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짜임새를 갖추는 것. 가장 단순하고 정직한 원리에서 출발했기에 훈민정음은 580년이 지난 지금 더 빛나는 천 년의 문자가 되었다. 기본 위에 세운 것만이 오래간다.
거창한 혁신을 말하기 전에, 첨단 기술을 자랑하기 전에, 우리 사회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이름을 적었는가, 제목을 달았는가, 날짜를 썼는가, 참고문헌을 밝혔는가, 문단을 나누었는가. 곧, 투표용지를 제대로 준비했는가, 철근을 도면대로 박았는가, 이상 징후를 제때 알렸는가. 거대한 빌딩을 지은들 나사 하나로 무너질 수 있다. 기본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