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글날 제정 100돌을 맞은 올해,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동기를 놓고 벌어진 학술 논쟁이 뜻밖의 자리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바로 포털 기사 아래 ‘댓글난’이다.
한국일보는 지난 7월 22일 ‘세종의 훈민정음, 백성 위한 게 아니었다? 한글날 100돌에 불거진 불편한 논쟁’(최다원 기자)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명예교수가 지난달 펴낸 《한글, 불편한 진실》(푸른역사)의 주장과, 이에 대한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객원교수)의 반론을 서면ㆍ대면 인터뷰로 나란히 배치한 기획이었다. 강 교수는 한문학과 서지학 분야의 대중 학술서로 매우 권위 있는 학자이고 김 교수는 고1 때부터 49년 동안 한글운동을 해온 저명한 한글운동가자 한글 관련 박사학위 세 개와 130권 저술(72권 공저), 논문 150편을 발표한 세계적인 한글학자이기도 하다.
강 교수는 세종이 즉위 2년(1420)에 ‘부민고소법’을 폐지해 백성이 관의 수탈에 항의할 길을 막았고, 훈민정음을 편 뒤에도 백성이 글자를 익힐 기회를 제도로 보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훈민정음의 본질은 ‘훈민(訓民)’ 곧 백성에게 복종의 의무를 가르치는 통치 수단이었다고 결론짓는다. 김 원장은 이에 대해 “성군 신화와 무비판적 민족주의는 마땅히 검증받아야 한다”라고 저자의 문제의식은 인정하면서도, “과잉 신화화의 교정과 냉소적 환원으로의 과잉 교정은 구분해야 한다”라고 맞섰다.
사흘 만에 댓글 697개, 추천 660개 넘긴 댓글도
기사가 나가자, 누리꾼들이 몰렸다. 7월 25일 기준 이 기사에 달린 댓글은 697개. 문화ㆍ출판 분야 기사로는 이례적인 규모다. 추천 661개를 받은 맨 위 댓글은 “남들은 나쁜 것도 좋게 미화하는데 이 사람은 좋은 것도 깎아내린다”라는 짧은 한 줄이었다. 댓글의 흐름을 갈래지어 보면, 강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눈여겨볼 대목은 그 반론이 단순한 감정 표출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당수 누리꾼이 사료와 시대 상황을 끌어와 조목조목 따졌다. 크게 다섯 갈래였다.
첫째, “어제서문이 곧 답이다”
가장 자주 등장한 근거였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훈민정음 어제서문에 창제 동기가 명문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를 제쳐 두고 다른 정황으로 뒤집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다. 한 누리꾼은 “세종대왕이 진짜 대단한 게, 몇백 년 뒤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고 서문에 못을 박아 두었다”라고 적었다. 강 교수가 서문의 ‘민연(憫然)’을 ‘마음이 짠하다’는 소극적 감정으로 읽은 데에 대해서도, “짠한 마음이 곧 측은지심이고 애민의 본령”이라는 김 원장의 반론에 힘을 싣는 글이 잇따랐다.
둘째, 부민고소금지법 폐지의 주체
“세종 2년이면 상왕 태종이 실권을 쥐고 있던 때”라는 지적이 여러 차례 나왔다. 즉위 이태째 스물넷의 견습 군주가 부왕이 승인한 결정을 뒤집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법의 성격 자체를 다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 누리꾼은 “수령을 고소할 만큼 글을 아는 이는 결국 지방 유력자였고, 이 법은 그들의 발호를 막으려는 것이었다”라며 법의 취지를 오늘의 잣대로만 재는 데 이의를 달았다.
셋째, ‘4년’이라는 시간
강 교수는 “전제군주라면 4년간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지만, 누리꾼들은 세종이 해례본을 펴낸 뒤 눈병과 여러 질환으로 건강이 무너진 상태에서 1450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들었다. “문자 하나를 온 나라에 가르치는 일이 4년에 될 일이냐”, “1959년 의무교육이 시작된 뒤에도 글 모르는 이가 많았다”라는 견줌도 나왔다.
넷째, 최만리 상소로 대표되는 지배층의 저항
보급이 더뎠던 책임을 세종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과녁이 어긋났다는 반론이다. “한자를 아는 것이 특권이던 사대부들이 순순히 협조했겠느냐”, “황희까지 반대한 일”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1444년 최만리의 반대 상소야말로 당대인들이 이미 문자 창제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라는 김 원장의 견해와도 맞닿는 대목이다.
다섯째, 논리 자체의 모순
가장 날카로운 반론이 여기서 나왔다. 여러 누리꾼이 약속이나 한 듯 같은 지점을 짚었다. “백성을 세뇌해 복종시키려 만든 글자라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널리 퍼뜨렸어야 앞뒤가 맞는다”라는 것이다. ‘보급 노력의 부재’를 ‘통치ㆍ세뇌 목적’의 근거로 삼는 순간 논증이 스스로 무너뜨린다는 지적으로, 강 교수 논지의 급소를 겨눈 셈이다.
“중세 교회가 라틴어 성경을 고집한 까닭을 생각해 보라. 글을 읽고 스스로 표현하는 힘이야말로 기득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라는 댓글은 42개의 추천을 받았다. 엄격한 신분제 아래에서는 백성을 깨우치지 않는 편이 통치에 유리했을 텐데 굳이 글자를 쥐어준 일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는 지적도 여러 차례 나왔다.
“이런 의견도 받아들이는 게 건강한 사회”
그 수는 적지만 학문의 자유를 옹호하는 목소리도 분명히 있었다. “나는 이런 의견도 수용하는 게 건강한 사회라고 본다”, “다른 의견이 있으면 연구하고 밝히는 것이 학자의 몫이다. 학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라는 댓글들이다. 1978년 강만길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에서 이미 제기된 오래된 논점이라며 계보를 짚은 이도 있었고, 세종의 노비종모법 등 다른 사료를 들어 세종 평가 자체를 재검토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품격 높은 논쟁”, “합리적 논거와 논리로 열띤 토론으로 이어지는 게 옳다”는 댓글은 이 논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논쟁을 논쟁답게
이번 댓글난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시민들의 논증 수준이다. 어제서문과 실록, 최만리 상소, 태종 대리청정기라는 사료를 자유롭게 끌어와 학자의 논증을 되받아쳤다. 한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앎과 사랑이 어느 만큼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은 대담에서 “이 책은 우리 학계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좋은 자극제”라면서도, 교화를 ‘복종시키기’로만 환원하는 것은 이념적 독해라고 짚었다. 언해된 책들에는 도덕만이 아니라 농사와 의약 지식이 담겼고, 백성은 이내 소설과 편지, 여성 글쓰기로 한글을 제 것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창제 의도에 통치의 몫을 인정하더라도, 그 긴 효과는 분명히 백성을 풀어놓는 쪽이었다는 이야기다.
강 교수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가장 정확한 진실이 담겨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1446)의 사실과 진실을 왜곡했고, 세종의 업적을 잘못된 사실과 근거로 내리깎은 데 근본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덧붙이기를 강 교수는 저명한 학자임에도 조선시대 한글 사용 역사를 다룬 “《조선시대 언문의 제도적 사용 연구》(김슬옹, 2005, 한국문화사),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발달사》(김슬옹, 2012, 역락), 부민고소금지법을 다룬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이영훈 우문에 대한 현답》(권오향ㆍ김기섭ㆍ김슬옹ㆍ임종화 공저, 2020, 보고사). 등 관련 기존 저서와 논문을 전혀 참고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장을 펼쳐 아쉬웠다고 했다.
한글날 제정 100돌,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 되는 올해다. 세종과 한글을 신화의 자리에만 모셔 두지 않는 일도, 냉소로 그 뜻을 지워 버리지 않는 일도 모두 우리 몫이다. 697개의 댓글이 남긴 가장 또렷한 가르침은 아마 이것일 터이다. 논쟁은 필요하다. 다만 논쟁답게 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