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이재명 대통령님께 올립니다.
저는 1977년 철도고등학교 1학년 재학 시절 한글 운동에 발을 들인 뒤로 올해까지 마흔아홉 해를 한글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 해에 한자식 이름을 버리고 ‘슬기롭고 옹골차다’라는 뜻의 토박이말 이름 ‘슬옹’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 뒤로 《훈민정음 해례본》과 세종을 공부하는 일로 세 개의 박사 학위를 받았고, 150편의 논문과 백스무 권이 넘는 책을 썼습니다. 이러한 학술 공로로 2021년에는 세종문화상 대통령상도 받았습니다.
올해 2026년은 우리 겨레에게 세 겹으로 뜻깊은 해입니다.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80돌이 되는 해이자, 1926년 ‘가갸날’을 선포하여 한글날을 제정한 지 100돌이 되는 해입니다. 또한 우리말글 중흥 시조라 일컫는 주시경 선생 탄신 150돌이기도 합니다. 문자를 만든 임금의 뜻과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그 문자를 기려 겨레의 얼을 지키려 한 선인들의 뜻이 한 해에 겹쳐 있습니다. 이런 해에 대통령님께 꼭 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 이렇게 공개편지를 씁니다.
1. 어떤 작품인가?
한글 서예의 큰 어른이신 청농 문관효 선생께서 두 폭 병풍을 완성하셨습니다. 저는 이 작품의 내용 자문을 맡아, 무엇을 어떤 차례로 담을 것인가를 선생과 함께 오래 궁리했습니다. 왼쪽 폭은 《훈민정음 언해본》의 세종대왕 어제 서문입니다. 오른쪽 폭은 세종대왕이 1446년에 펴낸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오는 한글 표기 124개의 토박이말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안에 실제로 적혀 있는, 15세기 사람들이 입으로 쓰던 우리말들입니다. 저는 이를 《훈민정음 해례본 낱말 날적이》(마리북스)로 묶어 내면서 갈래별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이 폭 역시 한가운데 ‘한글 첫 낱말’이라는 표제를 금빛으로 세우고, 그 둘레를 낱말들이 별처럼 둘러싸도록 앉혔습니다.
두 폭 모두 글자들이 커다란 원 안에 모여 있습니다. 둥긂은 하늘이고, 백성이며, 두루 미치는 어짊입니다. 문관효 선생의 붓은 여기서 훈민정음체의 곧은 뼈대와 한글 궁체의 부드러운 살을 한 몸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2. 세종 서문— 세계에서 하나뿐인 문자 반포 선언문
인류가 쓰는 문자는 수십 가지지만, 만든 사람과 만든 때와 만든 까닭이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는 문자는 한글 하나뿐입니다. 그 까닭을 적어 놓은 글이 바로 어제 서문입니다. 한문본으로는 단 54자, 언해본으로는 108자입니다. 이 짧은 글 안에 세 가지 정신이 빈틈없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자주입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라는 첫 문장은 단순한 언어학적 관찰이 아닙니다. 한자와 한문이 곧 문명 그 자체였던 시대에, 우리나라 말이 중국말과 다르다는 사실을 중대한 언어 모순, 문자 모순으로 받아들인 과학적, 사실적인 선언입니다. 그래서 다름에 맞는 그릇 <훈민정음>을 새로 빚겠다는 선언, 이것이 15세기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담대한 발언이었는지 지금도 대한민국 국호와 대통령 이름을 한자(韓, 李)로 적는 언론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습니다.
둘째, 애민입니다.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할 사람이 많다.” 저는 이 한 문장을 세계 첫 문자 기본권 선언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백성의 무지가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것을 적을 수단이 없는 제도의 결함입니다. 못 배운 이를 탓하지 않고 배울 길 없게 만든 문자를 탓한 것입니다. 임금이 백성의 말할 권리를 국가의 과제로 끌어안은 이 대목은, 오늘날 정보 접근권과 알 권리를 이야기하는 모든 논의의 가장 오래된 원형입니다.
셋째, 실용입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세종은 자신의 업적을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고 ‘따름이니라’로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어려운 것을 만들어 권위를 세우는 길과, 쉬운 것을 만들어 권위를 나누는 길 가운데 세종은 뒤의 길을 택했습니다. 쉬움은 한글의 과학적 특징일 뿐 아니라 정치 철학입니다. 지식을 독점하지 않겠다는 국가 운영 원리의 선언입니다.
자주ㆍ애민ㆍ실용, 이 셋이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말하는 자주독립과 국민주권과 국민 복리의 오래된 뿌리입니다.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손님을 맞는 자리의 뒤편에 이 글이 걸려 있다는 것은, 그 나라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말없이 밝히는 일입니다.
3. 124개 낱말— 훈민정음은 백성의 말로 지어졌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흔히 ‘문자 해설서’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오래 읽으면서, 이 책이 동시에 우리말 낱말 사전의 첫 씨앗이라는 사실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해례본에는 새 글자의 쓰임을 보이기 위해 실제 우리말 낱말들이 한글로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가려 세어 124개를 확정하고, 갈래별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 병풍의 오른쪽 폭은 바로 그 124 낱말입니다.
갈래를 나눠 보면 이 목록이 무엇인지가 뚜렷해집니다. 생활ㆍ도구가 32개로 가장 많고, 동물 24개, 식물ㆍ열매 22개, 자연과 날씨와 시간 15개, 몸 9개, 사물과 행위ㆍ상태 7개, 건축 5개, 농사 4개, 사람 3개, 먹거리 3개입니다. 이 분포 자체가 하나의 증언입니다.
첫째, 이 낱말들은 한글로 적힌 첫 우리말입니다. 우리 겨레는 수천 년 동안 말을 해 왔지만, 그 말을 우리 글자로 적은 첫 기록이 바로 이 낱말들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말이 처음으로 제 얼굴을 비춰 본 거울입니다. 세상 어느 문자에도 ‘이 문자로 적힌 첫 낱말 목록’이 이토록 온전히 남아 있는 예는 없습니다.
둘째, 15세기 백성의 살림살이가 통째로 들어 있습니다. 가장 큰 갈래인 생활ㆍ도구 32개를 보십시오. 죠ᄒᆡ(종이), 붇(붓), 벼로(벼루)가 있는가 하면 톱, 드레(두레박), 호ᄆᆡ(호미), 슈룹(우산), 다야(손대야), 쥬련(수건), 독, 신, 갈(칼), 활, 낛(낚시), 깁(비단), 밀(밀랍), 숫(숯), 구리, 브ᅀᅥᆸ(부엌)이 나란히 놓입니다. 농사 갈래에는 논, 호ᄆᆡ, 낟(낫), 키가 있고, 건축 갈래에는 뎔(절), ᄃᆞ리(다리), 담, 울(울타리), 긷(기둥)이 있습니다. 궁중의 고상한 개념어가 아니라 밭과 부엌과 마당에서 손에 쥐던 것들입니다.
셋째, 우리 땅의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동물 24개와 식물 22개, 자연ㆍ날씨ㆍ시간 15개를 합하면 61개, 곧 절반에 가깝습니다. 범, 노로(노루), 사ᄉᆞᆷ(사슴), 여ᅀᆞ(여우), 러울(너구리), 납(잔나비), 두텁(두꺼비), 비육(병아리), 올창(올챙이), 반되(반딧불이), 부허ᇰ(부엉이), 그력(기러기), 져비(제비), 남샤ᇰ(남생이), 누에, 고티(고치)가 한자리에 모입니다. 감, 콩, ᄑᆞᆺ(팥), 우케, 벼, 파, ᄀᆞᆯ(갈대), ᄇᆡᆺ곶(배꽃), 닥, 잣, 버들, 싣(단풍나무)이 뒤를 잇습니다. 뫼, 셤(섬), 믈(물), ᄒᆞᆰ(흙), 돌, 못, ᄉᆡᆷ(샘), ᄃᆞᆯ(달), 별, 무뤼(우박), 서리, 서ᅀᅳᆯ(성엣장), 어름(얼음)이 그 배경을 이룹니다. 580년 전 이 땅의 사계절이 낱말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셈입니다.
넷째, 여기에 세종의 마음이 있습니다. 새 문자의 보기로 무엇을 고를 것인가는 결코 사소한 선택이 아닙니다.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은 경전의 어려운 개념어 대신 부엌의 말과 들판의 말을 골랐습니다. 이 문자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보기 하나하나로 답한 것입니다. 사람을 가리키는 낱말이 아ᅀᆞ(아우), 죠ᇰ(종), 사ᄅᆞᆷ(사람) 셋뿐이라는 점도 뜻깊습니다. 신분과 벼슬의 이름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 놓여 있습니다. 서문에서 “어린 백성”이라 말한 그 백성이, 낱말 목록 안에서는 구체적인 세간과 짐승과 곡식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서문이 선언이라면 124 낱말은 그 선언의 증거입니다.
다섯째, 이 목록에는 뜻밖의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사물과 행위ㆍ상태를 가리키는 갈래에 ‘괴여’와 ‘괴ᅇᅧ’가 나란히 실려 있습니다. 앞의 것은 내가 남을 사랑한다는 뜻이고, 뒤의 것은 남에게서 내가 사랑받는다는 뜻입니다. 새 문자의 쓰임을 보이는 자리에 사랑하는 말과 사랑받는 말을 짝지어 놓은 것입니다. 문자를 만든 이들의 마음결이 어떠했는지를 이보다 잘 보여 주는 대목이 있을까 싶습니다.
여섯째, 오늘의 우리말이 여기서 이어져 왔습니다. 감은 지금도 감이고, 콩은 지금도 콩이며, 손은 지금도 손이고, 밥은 지금도 밥입니다. 580년을 건너 그대로 쓰이는 말들이 이 안에 가득합니다. 우리가 한글로 이야기하고 한글로 검색하고 한글로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오늘의 언어생활은 이 124개 낱말에서 뻗어 나온 가지입니다. 그러니 이 목록은 옛것이 아니라 뿌리입니다.
왼쪽에 서문, 오른쪽에 낱말. 이 두 폭이 나란히 설 때 비로소 완결됩니다. 한쪽은 왜 만들었는가를 말하고, 다른 한쪽은 무엇을 담았는가를 보여 줍니다. 뜻과 살림이, 이상과 현실이, 임금의 마음과 백성의 입말이 한자리에서 마주 봅니다.
4. 왜 상춘재인가?
대통령님, 청와대 상춘재는 우리 전통 한옥의 품격을 지닌 공간이며, 외국의 귀한 손님을 맞아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자리로 쓰여 왔습니다. 그런 자리의 뒷벽에 이 병풍이 놓이기를 바랍니다. 외교의 현장에서 지도자의 등 뒤에 놓인 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나라가 스스로 무엇이라 소개하는지에 대한 대답입니다. 산수화도 아름답고 한자 서예도 귀합니다. 그러나 한국을 한국이게 하는 가장 고유한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한글을 꼽습니다. 세계인이 한국 대중문화에 빠져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이 시대에, 그 모든 물결의 발원지가 무엇인지를 손님들이 대통령님 어깨너머로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구나 이 병풍은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작품입니다. 외국 손님이 한글을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둥근 원 안에 촘촘히 박힌 글자들의 조형미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저것이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이 나오는 순간 대통령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실 수 있습니다.
“580년 전 우리 임금이 백성이 말할 수 있게 하려고 문자를 만들었고, 왼쪽 글은 그 까닭을 적은 것입니다. 오른쪽은 그 문자로 처음 적힌 우리말 124개입니다. 올챙이와 제비와 부엉이, 붓과 두레박과 우산,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이 저 안에 있습니다.”
이보다 짧고 이보다 강한 나라 소개가 있겠습니까? 무기도 아니고 자본도 아니고, 백성이 말하게 하려고 임금이 문자를 만든 나라라는 사실 하나로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 앞에서도 뿌리 깊은 국격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5. 조건 없이 드립니다
문관효 선생과 저는 이 작품에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값을 매기지 않고, 조건을 달지 않으며, 저희 이름을 앞세울 뜻도 없습니다. 다만 이 작품이 사람들이 오가는 자리에 서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상춘재가 마땅치 않다면 영빈관도 좋고, 대통령실의 접견 공간 어디라도 좋습니다. 재외공관 등 국격을 널리 세우는 곳이라면 어디든 저희는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판단은 온전히 대통령님과 실무진의 몫입니다.
다만 때를 말씀드리자면, 올해가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자 한글날 제정 100돌입니다. 이 두 기림을 아울러 저희는 ‘한글 580ㆍ100’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백 년에 한 번 오는 이 해에 한글이 국가 의전 공간의 정면에 서게 된다면,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세종은 서문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날마다 쓰는 데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저 역시 이 편지를 그렇게 맺겠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에 한글이 한 번쯤 정중히 놓이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부디 살펴 주십시오.
2026년 7월
김슬옹 드림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객원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