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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오대산에서 문수보살께 차를 올린 형제 수행자
한국차인열전(10)
[라석의 차와 시서화] 23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한국 차문화사에서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은 가장 오래된 차 수행의 전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두 사람은 단순히 차를 즐긴 차인이 아니라, 차를 수행과 공양의 길로 승화시킨 신라의 왕자들이었다.

 

최근 학계에서는 두 사람을 신문왕계 왕자일 가능성이 높은 역사적 인물로 보고 있으며, 왕위 계승 과정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세속의 권력을 떠나 오대산으로 들어가 문수신앙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던 인물로 재조명하고 있다. 그들이 남긴 삶은 은둔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한 더 깊은 기도였다.

 

《삼국유사》에는 두 왕자가 오대산에 각각 암자를 짓고 새벽마다 문수보살께 차를 달여 올리며(煎茶供養) 수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전차(煎茶)'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사례 가운데 하나며, 한국 불교 차문화의 출발을 보여 주는 귀중한 역사적 기록으로 평가된다.

 

오대산의 새벽은 언제나 맑은 안개 속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문수봉을 감싸는 운무 사이로 샘물을 길어 와 조용히 불을 지피고, 맑은 물이 끓어오르면 정성껏 차를 달여 문수보살께 올렸을 것이다. 그 차는 갈증을 풀기 위한 음료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맑히고 세상을 밝히기 위한 공양이었다. 차를 달이는 일은 곧 수행이었다. 물을 기다리는 마음도 수행이었고, 차향을 올리는 정성도 수행이었다. 향기보다 먼저 맑아져야 할 것은 자신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두 왕자는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보천과 효명의 차는 사람을 위한 차이기 이전에 먼저 문수보살께 올리는 헌다(獻茶)였다. 그러나 그 공양은 결국 다시 사람을 향하였다. 한 잔의 차를 올리는 정성은 백성을 위한 기원이 되었고, 나라의 평안을 비는 큰 서원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훗날 충담사의 미륵헌다와 진감국사의 선다(禪茶), 그리고 고려와 조선의 다례문화로 이어지면서 한국 불교 차문화의 큰 뿌리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는 문화 역시 그 정신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심물철학으로 바라보면 더욱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차는 하나의 물질(物)이지만, 그것을 공덕으로 바꾸는 것은 마음(心)이다. 같은 물과 같은 찻잎이라도 욕심으로 달이면 한 잔의 음료에 머물고, 공경과 자비의 마음으로 달이면 수행이 되며, 문명을 밝히는 문화가 된다.

 

차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적신다. 덕 또한 소리 없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보천과 효명이 오대산에서 올린 한 잔의 차는 이미 천 년 전에 사라졌지만, 그 차향은 오늘까지 한국 차문화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대산을 찾는 이들이 문수봉의 맑은 바람과 깊은 산사의 적막을 마주할 때면, 어쩌면 천삼백여 년 전 두 왕자가 차를 달이며 올렸던 그 새벽의 향기를 마음속에서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차는 오래전에 식었지만, 공양의 마음은 식지 않았다. 그 향기는 오늘도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그대는 지금 누구를 위해 한 잔의 차를 달이고 있는가."

                                                      ... 26. 7. 28. 제주 서귀포에서 불한자(弗寒子) 라석(羅石)

 

라석(羅石) 손병철(孫炳哲) 

 

북경대학 미학ㆍ철학전공 철학박사/시인

물파공간화랑 서울ㆍ북경 관장 역임

《라석심물시》, 《손병철시전집》 등 9권 시집 펴냄

국제복희역학회 회장, 한국불한선차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