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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월하, 산책로에서 시조창(時調唱)과 만나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795]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젊은 가객, 김윤서와 월하 여사가 <손녀딸과 할머니>로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기 위해 당시 5살이었던 김윤서 어린이를 마주하면서 아마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경기도 고양군(현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 보광동)에서 5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났고, 2살 되던 해에 유행병으로 할머니, 어머니, 두 오빠 등, 가족 4인을 잃고 고아가 되었으며, 이모 댁에서 종로구 사간동 유씨 부인의 수양딸로 들어가 <유정환>이란 이름으로 살다가 자신의 이름이 <김덕순>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사실, 16살에 혼인하였으나, 6, 25사변으로 남편과 생이별했다는 아픈 이야기 등을 이야기하였다.

 

우리의 아픈 역사, 6.25 전쟁은 밀고 밀리는 남과 북의 불행한 동족싸움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北進), 압록강 부근까지 진격하여 남쪽의 승리를 굳히는 듯했지만, 해가 바뀐 1월 4일, 중공군이 가세하여 인해(人海)전술로 밀고 내려온 것이다. 그 공세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까지 내주게 되는, 그래서 그 추운 겨울, 어쩔 수 없이 후퇴하게 되는 상황을 일러 <1·4 후퇴>라 부른다.

 

남편을 잃고, 홀로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 김덕순, 그는 그곳에서 고단한 피난살이를 오직 삯바느질을 해가며 보내고 있었다고 했다. 식음(食飮)을 전폐하다시피, 일에만 매달린 결과, 그는 뜻하지 않은 <위궤양>을 얻어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상이 지속되었다. 다행히 주위의 도움으로 생명은 구할 수 있었다고 하나, 건강은 나날이 쇠약해졌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김덕순은 매일 새벽, 부산에 있는 <구덕수원지(九德水源地))>에 나가 새벽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 일과였다. 산이 있고, 물이 있는 곳에는 으레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어서 그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침마다 모여 운동도 하고, 또 일부는 시조창도 즐기곤 해서 월하 여사는 그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건강 회복을 위한 새벽 산책로에서 그는 우연하게도 시조창과 만나게 된 것이다.

국악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월하 김덕순 여사는 어려서부터 전문가들로부터 체계적으로 시조창을 배운 사람은 아니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순전히 건강 회복을 위해, 날마다 아침 산책을 하는 환경 속에서 시조 동호인들이 부르는 시조창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이른 새벽 시간이다 보니 빠르고 신명 나는 노래보다는 시조창과 같은 긴 호흡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사실도 김월하 여사에겐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저명한 선생을 모시고 가락이며 장단을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당시 30대 중년의 나이에, 날마다 시조창 소리를 듣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가락들을 흉내 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시조창을 흥얼거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바로 좌중의 권유로 평소 귀동냥으로만 들어 익혔던 시조 한 수(首)를 부르게 되었는데, 그 반응은 예상외로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시조창을 듣게 된 그 자리에 동석했던 청중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천부적인 성음(聲音)과 비범한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아니, 감탄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조를 감상한 좌우의 동호인들은 시조 및 정가의 명인들이나 거장(巨匠)들을 만나, 더 시조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월하(月荷)라는 그의 아호도 당시 모임에 참여했던 문인(文人)들이나 시우(詩友)들로부터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본인은 국립국악원 초대 원장이었던 이주환 선생이 지어주었다고 전해 준 바 있다.)

 

이처럼, 월하 여사는 당대 국악계 명인들과 사제의 연(緣)을 맺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명인들이 바로, 6·25 전쟁 중, 부산 피난민이었던 이병성, 이주환, 임석윤, 이창배, 정운산 외에도 아악부에 속해 있던 여러 명인이 있었다. 바로 이들의 지도와 조언, 등등이 월하 김덕순의 정가 인생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특히, 이병성이나 이주환 등은 1920년대 하규일 명인의 제자들인데, 하규일은 최수보에게 1880년부터 가곡을 배웠고, 한성부윤 겸 판사를 지내다가 1910년 한일강제합병이 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오직 가곡에 전념하였다고 하는 대 명인이다, 그는 <조선정악전습소》 학감을 지냈고, 무엇보다도 1926년부터 <이왕직아악부>에서 가곡, 가사, 시조를 전수하였으며 가곡 남창 89곡, 여창 71곡, 가사 8곡, 기타, 평시조, 중허리, 지름시조, 등등이 그의 유작으로 전해온다.

 

이처럼 이병성이나 이주환 말고도 김천흥, 성경린, 김기수 등등은 그들의 스승인 하규일로부터 전수한 가곡을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확산시켜 나간 인물들이며 해방 이후, <국립국악원>을 세우고, 국악 전문학교를 개교해서 젊고 유능한 국악인들을 육성해 온 인물들이다.

 

이 정통계보의 명인들에게서 배운 김월하 여사의 여창가곡 역시, 한국의 정가를 오늘에 이어 온, 정통계보임에는 틀림이 없기에 훗날 나라가 인정한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에 오르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