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영변의 북당 성황대제는 당제를 지내기 위해 먼저 성황당 옆 신목(神木) 한쪽에 짚으로 가(假)지붕을 씌운 임시 신청을 꾸민다. 신청 내부에는 3단으로 제단을 쌓아서 제물을 올린다. 굿청 주의에는 오색천과 화려한 조화로 장식하였다. 의례가 시작되면 제관과 무당 그리고 관계자 일동이 제를 올린 후 당 내부에 모셔져 있는 신위를 신여(神輿)로 옮겨 태운다. 신여를 앞세운 행렬대는 맨 앞 악공들이 풍악을 울리고 그 뒤로 대무당, 무당들, 제관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 순으로 줄지어 뒤따르면서 남당을 돌아 북당의 굿청으로 온다. 굿청에 신여가 도착하면 신위대를 신청 제단으로 옮겨 모신다. 그리고 본격적인 성황굿이 시작되어 밤낮으로 계속된다. 굿을 하는 도중, 마을 사람들이 음주를 곁들이며 무감서기를 하면서 흥을 돋우어 잔치 분위기를 만든다. 성황굿이 진행되는 동안 굿청 앞에 마련된 ‘제전(祭錢)그릇’에 사람들이 금품을 희사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황굿 마지막 날, 대무당이 종이꽃으로 장식하여 만든 ‘꽃둥지’를 타고 승천한다. 꽃둥지는 마을 사람들이 신목(神木)으로 받드는 고목나무에 걸어 놓고 동아줄을 매어서 서서히 잡아당기게 하여 꽃둥지가 올라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무속신앙의 으뜸 전문가 양종승 박사가 그동안 연재해왔던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는 60회로 끝을 맺고 새롭게 “양종승의 북한굿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편집자말) 북한굿은 황해도굿, 평안도굿, 함경도굿 등 도 단위로 구분되어 전승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이북5도위원회가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굿은 평안북도 성황대제와 다리굿 그리고 황해도 만구대탁굿, 최영당군당굿, 해주대동굿 등 모두 5종목이다. 이밖에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과 평산 소놀음굿 그리고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꽃맞이굿이 있다. 본 연재에서는 이북5도위원회가 지정한 다섯 개의 북한굿을 소개한다. 평안도 성황대제 오늘날 남한에서 전해지고 있는 평안도 굿은 성황대제를 비롯한 다리굿, 맞이굿, 재수굿, 내림굿 등이 있다. 1966년 문화재관리국을 통해 임석재와 장주근이 보고한 《무형문화재조사보서 제24호 – 관서지방무가(關西地方巫歌)》에 보면 요왕굿도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요왕굿이란 바다, 강, 우물 등을 관장하는 수신 곧 용왕신을 모시고 풍어 및 풍농을 기원하는 마을의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신가(神歌)를 학계에서 무가(巫歌)라고 부르는 경우가 흔하다. 이처럼 ‘신(神)’이 무‘(巫)’로 대용되고 있는 것은 신병(神病)을 무병(巫病), 신구(神具)를 무구(巫具), 신복(神服)을 무복(巫服), 신도(神圖)를 무신도(巫神圖), 신화(神花)를 무화(巫花), 신악(神樂)을 무악(巫樂), 신무(神舞)를 무무(巫舞)라고 하는 것에서도 같다. 그런데 신병(神病)이란 신을 모시고 종교 행위를 하는 만신(萬神)이 신과의 접신에 의해 발생하는 신앙적 병을 뜻하지만, 무병(巫病)이라고 하게 되면 무(巫) 곧, 무당이 앓는 일반적 질병이란 선입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무병은 종교 신앙성이 빠진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처지다. 무악(巫樂)도, 이는 무당이 연주하는 놀이적이거나 예술적 음악으로만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음악은 엄연히 신과의 연관 선상에서 연주되는 신성한 종교 신앙 음악이기에 신악(神樂)이라고 해야 옳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용어 사용 이면에는 이를 원시 신앙 또는 비종교로 치부한 나머지 미신화하고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있다. 구파발 금성당제에서 행해지고 있는 신가(神歌)는 신(神)을 부르고, 모시고, 놀리고, 보낼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과거 구파발 금성당에서는 일 년 내내 연중행사들이 행해졌었다.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이어졌던 ‘홍수[橫數]맥이’를 시작으로, 잎 돋고 꽃 피는 이월 개춘(開春) 맞이, 삼월 삼짇날 화전(花煎) 천신(薦新, 새로 난 과실과 곡식을 신령께 올리는 의례), 사월 파일 연등 맞이, 오월 오 일 단오 맞이, 유월 유두 햇밀 천신, 칠월 칠일 칠석 맞이, 팔월 한가위 만조상 맞이, 구월 구일(重九) 맞이, 시월 상달 무시루 고사 정성, 동짓달 팥 동지 맞이, 섣달 만동(晩冬) 맞이 등 끊이질 않았다. 때때로 들어오는 왕실 새남을 비롯한 민중들의 지노귀굿, 재수굿 그리고 만신네 맞이와 신굿 등의 의례들도 베풀어졌었다. 금성당은 ‘물고’ 내렸던 당으로도 유명하다. 만신이 맞이를 하려면 사전에 금성당을 방문하여 금성대왕께 절을 올리고 신내림을 받아야 했다. 만신이 준비해 온 생미, 신주, 포, 육찬 그리고 신전(神錢)을 대왕님 전에 놓고 절을 올리고 공수를 내리면 당에서 ‘물고 종이’(번양[본향]지라고도 함, 양 양손에 하나씩 들 수 있도록 두 개의 하얀 한지를 삼각형의 ‘山’ 모형으로 접은 종이)에 인(印)을 내려준다. 이것을 가져가 굿청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구파발 금성당에는 신도(神圖) 이외에도 여러 다양한 귀물(鬼物)이 있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서울시립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그 내용을 보면 1) 문서(文書)류 - 서진관금성당인등시쥬책(西津寬錦城堂引燈施主冊), 천지팔양신주경(天地八陽神呪經), 유마경(維摩經), 유마힐소설경 2) 신도(神圖)류 - 맹인도사(盲人道師), 맹인삼신마누라(盲人三神), 삼궁애기씨, 중불사, 창부광대씨(倡夫廣大), 별상님, 말서낭, 삼불사할머니 3) 신복류 - 관모(冠帽)류, 치마저고리류, 포(袍)류, 수식류이다. 관모로는 黑笠(흑립), 고깔, 전모(벙거지), 큰머리가 있으며, 포(袍)류에는 원삼, 두루마기, 동다리, 철릭, 몽두리, 장삼, 전복이고, 수식류으로는 염낭주머니, 한삼, 제비부리댕기, 대대(大帶, 남자의 심의와 여자의 원삼에 띠던 넓은 띠)다. 이들을 난곡(蘭谷)의 《무당내력》에 나오는 신복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 형태가 동일하며, 제작 시기는 1900년대 전후가 된다. 4) 고비전류 5) 명두(明斗, 놋쇠로 만들어진 둥근 거울 형태로 무당이 신의 얼굴로 간주하는 신령스러운 무구)류 - 일월명두, 일월대명두, 불사에 일월명두, 셰인삼발명두, 칠성명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필자는 1979년 구파발 금성당을 답사하였다. 그러나 이곳 유물을 본격으로 살핀 것은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만 3년이다. 2006년에는 SH공사로부터 조사연구사업을 수주하여 유물전수조사보고서를 펴내기도 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금성당 유물은 이미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생활문물연구》의 「서울 무속과 금성당의 실체」(2004년)와 「금성당 무속유물의 형태와 상징성」(2009년) 그리고 서울구파발금성당유물조사단이 조사하여 펴낸 《서울 구파발 금성당 무속유물 및 민속유물 조사 연구보고서》(2006년)에 실렸다. 구파발 금성당에는 애초 16점의 신도가 있었다. 1972년 민속학자 장주근 교수가 촬영한 사진자료 그리고 금성당에 남아 있는 것을 대조하여 보면 모두 16점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것들은 1970년대 중반에 도난당한 ⑴ 금성대왕(금성님)을 비롯한 ⑵ 칠성님1, ⑶ 칠성님Ⅱ, ⑷ 용장군, ⑸ 육대신마누라, ⑹ 용궁부인, ⑺ 삼불제석, ⑻ 부처님 등 8점 그리고 남아 있는 ⑼ 맹인도사, ⑽ 맹인삼신마누라, ⑾ 호구아씨, ⑿ 중불사, ⒀ 창부광대씨, ⒁ 별상님, ⒂ 말서낭, ⒃ 삼불사할머니 등 8점 모두 16점이다. 장주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구파발 금성당에는 나주 옛 지명인 금성(錦城)에서 군호를 받은 세종대왕의 여섯째아들이자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이 모셔져 있다. 구파발 시봉자였던 송은영도 금성당에는 세종대왕 아드님이 모셔져 있다고 하였다. 또한, 2000년도 필자의 구파발 금성당 조사에서 구파발 금성당에서 80년대까지 굿을 하였거나 굿 음악을 연주하였던 서울굿 만신 고 박종복(일명 숭인동 돼지엄마)를 비롯한 국가무형문화재 서울새남굿 무악 전수교육조교 고 김점석, 서울시무형문화재 남이장군사당제 무악 보유자 고 김순봉, 서울시무형문화재 밤섬도당굿 무악 보유자 고 김찬섭 등도 그렇게 증언하였다. 구파발 금성당과 가까이 있는 세종의 서장자 화의군(1425년-1489)의 진관동 묘를 참배하는 금성대군파종회 종친들도 오래전부터 화의군 묘를 참배하면서 금성대군이 모셔져 있다는 금성당을 방문하고 있다. 이로써 구파발 금성당에는 오래전부터 금성대군이 모셔져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들의 금성당에도 세조의 아우 곧 금성대군이 모셔져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한편, 구파발 금성당 뒤편에 있는 이말산(136m)에는 조선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금성대왕이 한양에 정착한 뒤, 조선왕실은 당 건립을 후원하고 금성신앙을 확장하는 데 개입하였다. 이러한 증거로써, 조선왕실이 고종 탄일을 맞은 7월을 비롯한 정초와 시월에 명산대천을 비롯한 절과 사당 그리고 신당에 내린 발기(發記)에 금성당을 포함한 것이다(최길성, 「한 말의 궁중 무속: 궁중 [발기]를 중심으로」 《한국민속학》 55-80 1970). 발기(發記)는 나라와 왕실을 위해 산기도, 위축, 고사, 나례 등에 왕실에서 내린 물품 목록과 수량을 열기한 명세서다. 조선왕실이 금성대왕을 주신으로 모신 금성당에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주상전하만세(主上殿下萬歲)> 전패(殿牌)를 봉안한 것도 조선왕실이 금성당을 신앙처로 삼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구파발 금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전패(殿牌)는 현재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구파발 금성당 마지막 시봉자 송은영(宋恩榮, 1925-2017)에 따르면, 그녀의 시할머니 박윤수는 금성당제가 베풀어지면 왕실에서 궁인을 보내 재정적 지원을 하고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고도 증언하였다. 이는 마치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호국사찰에서 불심으로 닦은 공덕을 앞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한강 유역으로 옮겨진 금성신앙 관련 설화 자료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채집되어 주목된다. [그전에는 조기배가 이 한강을 들어 왔거든. 마포에. 그랬을 적인데. 그 전에 뱃사공이 배를 부리는 사람이 그 심술이 궂잖아요. 직업상 봐봐도 거칠고 뱃놈이. 두 사람이 배를 띄우고 있는데. 마포에서 배를 띄우고 있는데. 장마철인지 뭐가 떠내려오는데 큰 궤짝이 떠내려오는데. 야 이거 웬보물이나 떠내려온줄 알고서 그 뱃사공이. 그 갈퀴 있잖아요. 갈퀴로 꽉 찍어가지고서 잡아댕겨서 그 한강변으로 잡아댕긴 거요. 모래사장 있는 데로. 뚜껑이 있는 거요. 뚜껑이 물이 뿔었으닌까 아주 힘들게 열었단 말이야. 열었는데 탱화가 있는데. 탱화가 열두 탱화가 있구. 거기 촛대도 있고 다 있는 거라. 아이구 이게 큰 그 귀신이라고 왕신이라고. 보물인줄 알았더니. 그래 칵 닫은 거에여. 칵 닫고서 발로 칵 밟고서 그냥 간 거여. 저 만침 둘이 돌아서자닌까. 펑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냥 어찌나 놀랬는지 그 놈들이. 그 뱃사공놈들이 말이에요. 어찌나 크게 소리가 나던지 기절초풍을 해 돌려다 보닌까. 그 뚜껑이 열린 거라. 근데 뭐. 그 인제 뭐 물에 뿔렸으닌까 자연으로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금성대왕 신앙이 한강 유역으로 옮겨졌다는 추론은 2006년 박흥주 연구를 통해 시작되었다. 나주 금성 해양세력에 의한 굿 문화가 조선 말까지 뱃사람들과 해상물류유통의 상인들에 의해 향유되었는데 그 중심에 금성당이 있다는 근거는 문헌 기록과 민속 전승 자료다. 자료에 따르면, 한강으로 전해진 금성신앙 정착지는 두미암 일대며 오늘날의 염창동이다. 이 지역은 조선 시대 서해안 염전으로부터 채취한 소금을 서울로 운반하기 위해 소금 배들이 드나들던 한강 어귀이다. 이곳에 두미암(斗尾岩)이라는 바위산이 있었고, 그 아래에 두미암(斗尾庵)이 있었다. 소금 보관 창고가 많았던 이곳에는 도당산이라고 불리던 야산 봉우리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도심개발이 이루어지고 수많은 아파트 건립이 이루어져 옛 흔적은 거의 없어졌고 한강 변 쪽으로 산자락 일부만 남아있는 정도다. 그렇지만 지명은 옛 정취를 담고 있어서 소금 창고에서의 소금을 뜻하는 염(鹽)과 창고 첫머리 창(倉)을 붙여 염창동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 이곳 행정구역은 서울특별시 강서구지만 그 이전에는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염창리였다.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