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사랑이 오신다면 스미듯 오셔야지 시나브로 꿈 적시는 봄비처럼 오셔야지 화들짝 헤픈 도화처럼 왜 난분분 오시는가 내사 못할 짓이네 당췌 못할 짓이네 눈물에 자물자물 시나브로 잠이 들면 문풍지 실바람에도 흠칫 놀라 잠을 깬다 과부야 애솔나무 송화분 흩어지면 은근짜 옷고름 풀듯 보리밭도 흥감터라 궁노루 흐벅진 욕정의 중중모리 휘모리 어디선가 맹렬히 별똥별 떨어지고 들물 날물 한데 엉켜 소용돌이 뺑이 돈다 들끓던 햇살의 산조, 차츰 숨이 잣는다 쟁여둔 시간과 한 송이 목화구름 연두빛 보료는 향기롭고 따뜻하다 달디단 밀봉의 오후, 꿈처럼 봄날은 간다 <해설> 고성오광대 막을 열면 문둥춤을 추는 사내가 등장한다. 아무도 그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저 다짜고짜 춤판을 연다. 그 사내는 누구인가. 왜 한 많은 사연을 안고 문둥춤을 추는가. 그래서 이렇게 상상해 보았다. 한 사내가 있었다고 가정하자. 얼굴이 얼금얼금 얽어 있는 얼금뱅이 사내를 등장시켰다. 그런 탓인지 혼기 놓치고 장가도 못 갔다. 하지만 그 동네에 들물댁이란 과수댁이 살고 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진 이들은 눈빛만으로도 통한다. 그래서 둘은 사람들 몰래 정분이
[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소가야 벌안으로 달빛도 푸르른 날 생과부 속심지 울음 울며 타는 밤에 저만치, 껑충 멀대 같은 허연 귀신 몸짓보아 오오매 엉덩짝 둥실, 풍만한 달무리 손톱으로 퉁겼다가 품 안에도 품었다가 아아, 메구패 따라 남정네도 집 나간 텅 빈 마당 위로 바람은 건들 밤꽃 내음만 흩뿌리고 떠나는데 귀신아, 왜 달 밝은 밤이면 논둑에 나와 애써 다독인 마음 이리 아리게 흔들어 쌓노. 굿거리 굿거리장단에 덩실 달은 구름 속에 숨고, 어느새 한 마리 백학 되어 학춤으로 노닐다가, 머언 절간 세속의 연 못내 끊지 못한 비구니 속내 들추이는 승무도 펼칠 즈음, 설핏 꿈결엔듯 거류산 소롯길로 희뿌염 아침은 와, 한 농부 다랑논엔 피 반 나락 반인 게으름만 지천이라. 웃논에 물 대고 오는 실한 농부 탓하기를, “에라이, 온 만신의 피! 피나 뽑고 춤이나 추지.” ※ ‘만신의 피’: 허종복(1930-1995)의 별호. 조용배와 함께 고성오광대를 이끌던 예인. <해설> 이를테면 ‘만신의 피’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먼저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선 벼 심은 들판에 피를 뽑지 않아 ‘피 반 나락 반’인 논을 말
[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부지깽이도 모 찌러 가는 오뉴월 한방장을 훠이훠이 풍채 좋고 신수 훤한 조한량 거동 보소. 풀 멕인 도포 입고 꿩털 처억 높게 꽂은 중절모 눌러쓰고, 명무(名舞)에 붓 한 자루, 손기름 자르르 밴 단소도 동무하니 이만하면 근 달포 지낼 노자 마련은 되었것다. 오냐 가보자 어여 가보자 물 뎁히지 않아도 암탉이며 도야지 솜털까지 죄다 벳긴다는 돈 많고 한량 많은 동래하고도 펄펄 끓는 온천장이 아니더냐. 왜인(倭人)들 떼로 몰려 떼돈 쓰고 나자빠지는 동래 권번(券番)이 거기라면 오냐 놀아보자 화선지 펼쳐놓고 치자 하면 설중매에, 쓰자 하면 초서에다 추어라 하면 나붓나붓 춤사위도 으뜸이니 보아라, 천하의 조금산이 풍류여행 떠나신다 ※조금산 : 호는 금산, 이름은 조용배 (趙鏞培1929-1991). 고성오광대를 이끌던 예인. <해설> 본격적으로 오광대놀이에 들어가기 전에 중요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시조다. 지난 회에 실었던 「길 떠나는 광대」가 4수의 평시조를 엮은 연시조라면 이번 것은 사설시조다. 초장과 종장은 평시조 형식을 따랐으나 중장을 길게 늘여 넌출넌출 앞말이 뒷말을 부르고 뒷말이 앞말을 섬기며 넝쿨처럼 이어지는 사설의
[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한 무리 광대패들 훠이훠이 재 넘는다 괭과리 징소리에 마음은 바쁘지만 장고야 뛰지도 말고 날라리야 날지 마라 꽃 지는 등성으로 별 먼저 돋아 오고 해 지는 마을에도 쉬어갈 집 있으니 한 세상 펼치면 마당이요 접으면 외줄타기 강물 가고 산벚 져도 강산엔 눈물 없다 어절씨구, 사랑이야! 꽃이 져야 열매 맺지 내일은 말뚝이 되어 장마당을 울려볼까 고성만 자란만에 차오르는 밀물처럼 산첩첩 무량산을 광대패 넘어온다 굽이진 생의 끝자락 바람에 펄럭이고 <해설> 이 시는 전체 54수에 대한 ‘서시’격인 ‘여는 노래’에 해당된다. 합천 초계 밤마리(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栗旨里)는 오광대 탈춤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예전엔 강물이 현재의 고속도로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밤마리 나루터는 중요한 뱃길 교역지였다. 가야산을 흘러내린 대가천과 소가천, 가야천 물줄기가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이라 오일장이 열렸는데 창녕, 합천, 고령 사람들이 주로 모여 성시를 이뤘다. 큰장이 서면 자연 사람이 모이는 법이고, 그러다 보면 자연 광대들 탈놀음도 열렸던 것이리라. 놀이마당이 시작되면 으레 한 많은 사연이 춤사위로 펼쳐지고, 그러다 웃것 아랫것 풍
[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어허, 할 말 많은 세상, 그럴수록 더욱 입을 닫으시오 조목조목 대꾸해봐야 쇠귀에 경 읽기니 침묵이 상수요 대신 이놈 말뚝이 잘난 놈 욕도 좀 하고 못난 놈 편에서 슬쩍 훈수도 두려 했는데 어째 영 초발심의 절반도 이뤄내지 못했소 그나마 세상이 조금은 변해서 ‘오적(五賊)’의 시대는 아니니 이쯤에서 그만둘라요 말뚝이 지치니 비비야 나오너라 비비 몸은 사람 형상 머리에 뿔 달렸고 무엇이든 잡아먹는 희한한 괴수요 그런 비비 뛰어나와 양반 징치하지만 종말엔 결국 서로를 얼싸안고 한바탕 웃고 놀고 끝낸다오 소인놈이 펼친 마당은 사연 많은 우리네 삶의 상처와 얼룩 어루만지는 난장이믄 됐소 지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매구치고 놀다보믄 종국엔 영롱한 눈물만 남던 것을 그런 법석 한판을 벌이고 싶었던 게요 어떻소? 그러면 된 것이 아니오? 결국은 지지고 볶아도 어울더울 살자는 게지 표창 던져 니 죽고 내 살자는 악다구니는 아니니 구경꾼은 앉아도 좋고 서도 좋소 이 마당을 펴는데 이래저래 도움 주신 선배, 친구, 후배님들 인사드릴 분이 한두 분이 아니오 뭐니 뭐니 해도 길을 열어주신 고성오광대 이윤석 회장님, 항상 가까이서 맥을 집어주시고 처방을
[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하긴, 섞어찌개라면 어떻고 부대찌개에 잡탕, 음탕이면 어떻소. 음식 재미만 있다 해도 저로선 다행이오 시(詩)든 음식이든 칼칼한 맛이 최고라며 우리 시를 자꾸 벼랑으로 몰아갔소 날카로운 메스에 잘린 언어는 예리하여 그에 찔리면서 외려 통쾌해지는 카타르시스, 그런 타인을 통해 나를 보는 즐거움이 흡사 아편 같소 ‘현대적’이란 이름이 낳은 무리며 군상인데 이놈 역시 그 대열에서 이탈치 않으려 했고 시방도 이탈하고픈 맘은 전혀 없소 허나 그 시(詩)가 이 시(詩) 같고 이 시가 그 시 같은 갈증은 어쩌지 못하겠소 그래서 때론 변덕을 부려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게요 노래로부터 너무 멀리 와 버리면 그 노래가 그리워지기도 안 하요 너무 도시적이거나 목가적이다 보면 해학과 재담, 풍자와 사투리를 잃어버리기도 하니께요 특히 경상도 보리문둥이 말은 영 재미없다는 선입견도 문제라면 문제고 유희성의 상실도 한 까닭이긴 했소 그래서 이런 풍각쟁이 짓을 해본 거요
[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마당에서 혼자 뛰고 구르니 점잖은 분이 툭! 치며 왜 하필 우주 정거장도 만들고 개도 복제하는 시대에 해묵은 시조고 사설이냐고 그리고 평시조에 사설을 붙이기도 하여 어째 섞어찌갠지 부대찌갠지 그렇고 그런 형식이란 게 좀 걸쩍지근하지 않은가? 라고 묻습디다 예, 감히 말뚝이 아뢰오 이 마당을 엮기 전에 형식이라면 알맞은 나름의 형식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소 그냥 자유롭게 제 할 말 하기로야 자유시가 으뜸인데 산문시의 어조와 사설은 다르기도 하거니와 왠지 이 노래는 앞말이 뒷말을 주워섬기는 말부림의 음보가 자연스레 율격을 갖는 고로 그 가락을 의지하여 풍자와 재담을 비벼 넣어 제맛을 내기에는 사설시조가 딱! 이란 생각을 하였소 평시조에 사설을 붙인 섞어찌개라! 그 참 알맞은 능청에 일침이오 물론 고시조에는 없는 형식이지만 현대에 와서 선배 시인들께서 더러 이 형식을 써서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지요 따져보면 평시조와 사설 각각의 형식이 어긋나지는 않았으니 둘을 붙인들 뭐 그리 잘못은 아닌 듯하오 사설시조에 대해 말들이 많은 줄 아오 암만, 떠돌아다니는 말뚝이라고 사설시조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는 줄 왜 모르겠소 자유시가 있는데 굳이 왜 사설이
[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과장(科場)은 모두 다섯인데 가방끈 짧은 축들은 과장과 과장 사이 건너뛰기가 쉽지 않아 이 과장 따로 저 과장 따로 따로국밥을 차린듯하여 내 식대로 그냥 얘기 하나 옷깃에 실밥 풀 듯 풀어내어 엮었으니 원래 것과 다르다고 지나치게 서운케들 생각은 말아주소 광대놀음 하다 보니 양반이 동네북이라 매양 뚜르르 울리고 남에 것 가로채고 가슴에 나라 ‘국(國)’자 붙이고도 백성은 뒷전이고 하는 짓은 제 잇속이나 챙기는 얌체 중의 얌체니 동네북은 당연지사 허나, 이 마당에선 죽일 놈의 양반은 양반대로 할 말 있고 큰애미 작은애미 시앗싸움 한창이라 귀 열고 들어보면 큰애미는 큰애미대로 작은애미는 작은애미대로 제 할 말이 있겠거니 딴 데 가선 못 할 말 이 마당에선 다 하라고 멍석 한 번 펴보았소 문둥이 문둥북춤을 추는데 아침부터 웬 문둥춤이냐고 돌팔매 날아오고 나물 삶은 뜨거운 물에 입도 데고 뭣도 데어, 서럽고 서럽것소! 강산 두루미로 한반도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녀보니 산도 조져놓고 강도 조져놓아 천형 문둥이 욕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던 것을 그래서 문둥이는 문둥이대로 비비란 놈은 비비대로 제 할 말 조잘조잘 탈바가지 덮어쓰고 노래하니 이보
[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양반은 잘나서 오방색 도포에다 팔자걸음 합죽선 손에 쥐고 권세 으쓱, 이리 오라 저리 가라 어르고 달래다가 휭하니 저들끼리 지져먹고 볶아먹고 개평 한 줌 아니 주고 심산유곡 땡중은 내려와서 그나마 저자 울린 객주 처자 제 것인 양 요모조모 뜯어보고 보료에 앉았다가 금침에 누었다가 온갖 호사 다 누리니 이놈 말뚝이가 스스로 마당 펴고, 스스로 노래하며 징치하고 등 두드릴 지경에 이르고 말았소 욕하고 싶은 이는 맘껏 욕들 해도 좋소 어차피 삼현육각(三絃六角) 앞세우고 어사화(御史花)도 못 썼으니 허랑한 광대들 불러 모아 매구 치고 쉬다 울다 엎어지며 놀다나 가고 싶소 고성오광대 구경을 한 십년 다녀본께 놀이치고는 참 재미지고 춤사위가 독특하니 그 감칠맛이 진국입디다 이 놀이는 말보다 몸짓이 우선이라 이 춤에서 저 춤으로 건너뛰다 아차! 놓친 사연들도 있음 직하여 당신들은 탈춤으로 놀고 나는 입심으로 놀아볼까 하고 노래를 시작했던 게요
[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이 몸은 말뚝이올시다 천하고 못난 탈놀음의 어릿광대 팔자는 오그라들고 청승은 늘어난다고 뛰어봐야 벼룩인 말뚝이올시다 주인공은 애시당초 언감생심이라 이 마당에서 저 마당으로 한고비 넘길 때나 스리슬쩍 등장하여 익살맞은 몸짓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엑스트라급 조연이오 하지만 말뚝이 없는 탈마당은 재미는 고사하고 막힌 가슴 뻥 뚫어 줄 그 무엇도 없는 맹탕이 되고 마니 그 또한 소용됨이 꽤나 쏠쏠한 놈이라는 항간의 추임새도 있긴 있나 보옵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