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이슬람 세계의 보석으로 불리는 푸른 도시 사마르칸트에는 티무르와 관련된 유물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중앙아시아 최대 사원이라는 비비하눔 모스크다. 비비하눔은 9명의 왕비 가운데 티무르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의 이름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이 아름다운 모스크를 방문하지는 못하고 다만 인터넷을 검색하여 이 모스크에 관해서 알아보았다. 1398년 인도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는 비비하눔을 위해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모스크를 짓겠다고 결심했다.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제국의 각지에서 200여 명의 장인과 500여 명의 노동자를 뽑고, 대리석 운반을 위해 인도에서 코끼리 95마리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매일 현장에 나가 작업을 독려하고, 음식물을 제공하며, 주화로 포상하는 등 모스크 건립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았다. 그 결과 비비하눔 모스크는 높이 35m에 달하는 에메랄드빛 돔과 직경 18m의 아치형 정문, 50m 높이의 미나레트 그리고 400개의 대리석 기둥이 떠받치는 둥근 천장 갤러리를 가진 화려한 모습으로 조성됐다. 실내 또한 아름다운 대리석과 다양한 형태의 모자이크 테라코타 등으로 장식되어 보는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칭기즈칸은 그의 손자 대에 이르러 중국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유럽까지를 포함하여 문명 세계의 거의 전부를 지배하였다. 몽골 초원의 유목민족이 세계 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건설한 것이다. 그들이 지배한 면적은 현재 중국의 3배 규모였다. 당시 몽골 본토의 인구는 100만 명에 불과했지만, 점령지의 인구는 약 1억 명이었다. 이러한 1당 100의 정복과 통치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대해서 서양 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하였다. 1927년에 영국의 전략사상가 리델 하트가 쓴 책 《위대한 지휘관들을 벗긴다》에서는 몽골 군대 승리의 비결을 한 마디로 간편성(Simplicity)이라고 표현하였다. 몽골 군대는 보급 부대가 따로 없는 전원 기병의 군대이었다. 기병 한 사람이 말을 4~5마리씩 몰고 다니면서 비상식량이나 물통으로 활용했다. 사막을 건너갈 때는 물 대신 말의 피를 빨아 마셨다. 《맛있는 세계사》 (2011년 주영하 저)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인 간편식인 햄버거는 몽골 군대의 전투 식량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았던 몽골인과 타타르족은 유목민이다. 평상시에는 이동식 천막을 치고 가축을 키우며 요리를 해먹을 수 있지만,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 고대 연구의 중심지로서 2001년에 <사마르칸트, 문화의 교차로>라는 제목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인터넷에서 사마르칸트를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정보가 나온다. 중앙아시아에서 오래된 도시들 가운데 하나다. 기원전 4세기에는 마라칸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기원전 329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되었다. 기원후 6세기에는 투르크인, 8세기에는 아랍인, 9~10세기에는 이란의 사만 왕조, 11~13세기에는 투르크계 종족들의 지배 아래 있다가 호라즘 왕국에 합병되었다. 1220년에는 몽골의 정복자 칭기즈칸에게 점령되고 호라즘 왕국은 멸망하였다. 1365년 아미르 티무르가 몽골 통치자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후 티무르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티무르는 공공집회를 할 수 있는 모스크(mosque, 군사ㆍ정치ㆍ사회ㆍ교육 따위의 공공 행사가 이루어지는 건물)인 비비하눔과 자신의 능묘를 세우고 사마르칸트를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ㆍ문화 중심지로 만들었다. 1,500년 우즈베크인들에게 정복되었고 부하라칸국의 영토가 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사마르칸트는 쇠퇴했으며 1720~1770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 도시인 사마르칸트를 관광했다. 타쉬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313km, 기차로 3시간이 걸린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빵을 2조각씩 굽고 달걀부침 2개에 사과까지 곁들여 근사한 식사를 만들어 먹었다. 배낭을 메고 몸자보(가슴이나 등에 붙이는 대자보) 2개를 가슴과 배낭에 붙이고 생명탈핵 깃발을 들고 씩씩하게 출발을 했다. 그런데 우리가 기차표를 예매했던 타쉬켄트 역에 도착하니 사마르칸트로 출발하는 기차역은 다른 곳에 있다고 한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버스가 있다지만 시간이 급해서 택시를 탔다. 택시로 10분쯤 달리니 한적한 곳에 역이 나타난다. 자유여행하는 관광객이라면 매우 조심해야 할 사항이다. 서둘러 기차를 타니 그제야 안심이 된다. 사마르칸트까지 가면서 창밖을 보니 건조지대라는 것이 눈에 띈다. 숲이 보이지 않고 들판은 초원으로서 땅은 매우 건조해 보였다. 경작지가 보이기도 하는데, 내려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물길이 닿아야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자연환경은 목축에 적합하다. 지리적인 측면에서 설명하면 1년에 강수량이 250mm 이내이면 사막, 250~7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김병화 박물관은 원래 김병화 농장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1974년에 김병화가 죽은 후 농장은 차츰 쇠퇴해졌다. 잇단 생산 목표 초과 달성에 판단력이 흐려진 중앙정부가 과도한 목표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아랄해 유역 상류의 사막화가 심해짐에 따라 수확량이 줄어들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목화 생산량이 소련 평균보다 낮아졌고 모범 농장이라는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렸다. 1991년에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한 이후 농업 정책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무료로 제공되는 땅에서 농사를 지어 수확량의 일부만 집단 농장에 내면 됐지만 이제는 농사를 지으려면 돈을 내고 땅을 빌려야 했다. 자연히 농사의 수익성이 떨어졌고 이농 현상이 심화되었다. 농토를 떠난 고려인들은 도시에서도 취직이 여의치 않아 살길을 찾아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연해주로 다시 되돌아가는 고려인들도 나타났다. 김병화와 고려인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소련 내에서의 고려인 이미지는 매우 좋았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근면하고 성실한 고려인은 매우 좋게 평가받는다고 한다. 1976년에 준공한 김병화 박물관에는 김병화가 사용한 집기와 가구들, 그리고 당시의 생활상을 담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점심 식사를 끝낸 뒤에 막상 출발하려니 햇볕은 쨍쨍 내리 쬐고 날씨가 너무도 더웠다. 병산이 슬기전화(스마트폰)로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니 기온이 낮 3시에는 40도까지 오른단다. 결국 병산은 이런 폭염에 걷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니 버스를 타고 가자고 말한다. 나도 찬성했다. 병산이 슬기전화로 버스 노선과 버스 번호를 확인한 뒤에 우리는 김병화박물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얼마쯤 가다가 버스에서 내렸는데, 말이 끄는 짐마차가 지나간다. 병산이 마차를 세우고 ‘김병화박물관’을 우즈벡어로 말하면서 손짓 발짓을 하다 보니 마부가 우리를 마차에 태워준다. 말이 끄는 짐마차에 타다 우리는 짐마차를 타고 약 2km 정도 갔는데, 마부가 내리라고 손짓을 한다. 병산은 택시비 정도에 해당하는 돈을 마부에게 주었다. 병산이 다시 슬기전화로 확인하더니 다른 버스를 기다리자고 말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한참 가다가 마을 입구에서 내렸다. 거기서부터는 시골길을 걸어서 김병화박물관으로 갔다. 우리가 1960년대에 보던 한가하고 한편으로 정겨운 느낌이 나는 그런 시골길이었다. 막상 김병화박물관에 도착하였는데, 철문이 잠겨 있었다. 난감했다.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우즈베키스탄 나라 이름의 끝 글자 글자 스탄은 페르시아어로 ‘땅’이라는 뜻으로 민족 이름 뒤에 붙여 그 민족의 영토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벡 족이 사는 땅이라는 뜻이다. 스탄으로 끝나는 나라들은 모두 이슬람교를 믿으며 터키어 계통의 말을 쓰고 있다.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여 탄자로 끝나는 나라들의 인구와 면적을 비교하는 표를 다음과 같이 만들어 보았다. 위 표를 보고서 나는 카자흐스탄이 인구는 많지 않은데 면적은 남한보다 27배나 넓기 때문에 인구밀도가 작아서 살기 좋은 나라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업가인 나의 친구는 위 표를 보고서 파키스탄의 인구가 2억 명이나 되기 때문에 사업하려면 파키스탄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하였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누구나 자기의 관점에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타슈켄트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데 인구가 300만 명이나 되는 대도시이다. 타슈켄트라는 이름은 투르크어로 ‘돌(Tosh)의 도시(Kent)’라는 뜻이다. 중국 사람들은 타슈켄트에 있는 부족 국가를 석국(石國)이라고 불렀다. 타쉬켄트는 큰 도시로서 구소련 시절에는 모스크바, 기에프, 민스크와 함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대기오염으로 인한 인간의 피해는 역사가 깊다. 서기 79년에 이탈리아 남부 도시 폼페이에서 10km 떨어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였다.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화산재가 도시를 덮어 버리고 유독한 아황산가스를 마신 주민들은 모두 죽었다.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전 영국에서는 난방용 석탄이 오랫동안 주요 대기오염원이었다. 영국에서는 1300년에 석탄의 사용을 줄이기 위하여 석탄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는데, 말하자면 세계 최초의 탄소세(炭素稅)인 셈이다. 에드워드 1세는 1322년에 의회의 회기 중에는 석탄 사용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킨 적이 있는데, 참나무 대신 석탄을 사용한 한 기술공을 본보기로 사형에 처하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석탄으로 인한 대기오염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1911년에 런던 스모그 사건으로 1,150명이 죽자 놀란 영국 의회에서는 세계 첫 환경오염방지법인 대기청정법을 통과시켰다. 런던의 대기오염사고를 조사한 보고서에서 스모그(smog = smoke + fog)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뒤 오랫동안 스모그는 대기오염의 대명사로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부터 연탄을 사용하면서 연탄가스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2019년 7월 15일 월요일, 저녁 5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2시간 전에 인천공항 제1터미날에 도착하였다. 인천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공항답게 쾌적하고 모든 시설이 완벽했다. 나는 기내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여행가방과 등에 맨 작은 가방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출국 수속은 간단하였다. 이미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전자 예약증을 휴대폰에 저장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절차가 빠르게 처리되었다. 탑승권은 카운터를 거치지 않고 자동기계에서 발급받았다. 주민등록증이 필요 없이 전자 여권 하나로 모든 수속이 가능했다. 이제는 정말로 아무도 부인할 수 없게 슬기전화(스마트폰) 세상이 되었다.슬기전화 하나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문명의 이기인 슬기전화 사용법을 익혀야 세상에 적응을 하고 나머지 인생을 편리하게 보낼 수가 있다. 어느 순간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새로 배우기를 거부하면 어김없이 젊은이들로부터 꼰대 소리를 듣게 되고 남은 인생이 불편해진다. 인천공항 대합실에는 ‘에어스타(Airstar)’라는 이름의 로봇이 혼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영어로 말을 걸면 같이 사진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나는 지난 2019년 7월 15일부터 8월 11일까지 4주 동안 중앙아시아에 있는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중동지방에 속하는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터키를 여행하였다. 일반적으로 중앙아시아는 카스피해 동쪽의 건조 지대를 말하는데 비가 적게 내리기 때문에 주민들은 오랜 동안 농사 대신 유목 생활을 주로 하였다. 사전을 찾아보면 중앙아시아는 중국과 유럽의 중간에 있는 나라들을 가리키는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카니스탄 등 탄자(字)로 끝나는 나라들이 중앙아시아에 속한다. 중앙아시아 나라 국민들은 종교로 이슬람을 믿는다.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독립했다. 카스피해(海)의 서쪽에는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 등 코카서스 3국이 있고, 더 서쪽으로 터키에 연결된다. 아제르바이잔과 터키는 이슬람을 믿으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기독교(정교회) 국가이다. 이번 여행 경로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에서 터키의 이스탄불까지 가는 긴 여정이다. 이 지역은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한 분쟁 지역이며, 과거에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경로였다. 나는 4주 동안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