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베어진 옥수수 대궁 위에 내려앉은 고추잠자리의 나른한 오수에서 길가에 마냥 흐드러지게 한들거리는 코스모스의 청순한 자태에서 한낮의 여름을 식히듯 또랑또랑한 귀뚜라미 울음소리에서 묻어나는 가을을 느낍니다. 해는 점점 짧아져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아직 여름이고 싶은 나무의 잎새를 재촉하는 서늘한 바람 여름내 숨어있던 새들도 햇살 아래로 나오는 걸 보니 가을이 오는 것 같습니다. 길쭉한 꽃송이를 하얗게 이고 있던 밤나무의 모습이 어제인 듯한 데 바늘 숭숭한 송이 안엔 속살이 굵어져 가고 성급하게 다가온 추석에 열매를 물들이기에 바쁜 대추나무 보름달 아래 휘영청 한 수숫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세월 감의 깊이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여름은 켜켜이 쌓인 소중한 추억과 함께 떠날 채비를 마치고 그 빈자리에 풍요를 구가하는 계절이 성큼 와 있습니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나뭇잎이 지는 계절, 이별의 계절, 비워냄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여름내 키워냈던 열매를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개구리의 합창으로 요란했던 황금 들녘도 빈 들로 돌아갑니다. 어쩌면 가을은 비워냄을 학습하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덜고 비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임금은 세종대왕일 것입니다. 세종대제가 아니고 세종대왕인 까닭은 중국은 황제인 데 견줘 변방 국가인 조선은 제후국이라는 관념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이름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대왕(大王)에서 ‘大’ 자를 쓰는 까닭은 유독 우리나라가 큰 것을 사랑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소통령과 중통령은 없어도 나라의 수반은 대통령이고 비교적 작은 땅덩어리를 가진 우리나라 국호도 대한민국입니다. 국호에 크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영국뿐입니다. 한강 30여 개의 다리 이름엔 대부분 대자가 들어 있습니다. 성수대교 양화대교 잠실대교 행주대교 마포대교 성산대교 반포대교…. 대교가 아닌 것은 광진교 하나뿐인 것만 보아도 무언가 크게 보이고 싶은 심리에서 시작한 이름짓기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세자 기간이 짧았던 임금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자 기간이 가장 짧았던 임금은 정종으로 8일이고 세종은 두 달입니다. (세자 기간이 없었던 6명의 임금은 빼고….) 아이러니하게도 세자 기간이 가장 길었던 임금은 세종의 아들 문종입니다. 그는 무려 29년 동안의 세자생활에 고작 임금은 2년하고 승하하고 말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남성이면 누구나 수염이 납니다. 수염은 한자로 鬚髥(수염)이라고 쓰는데 사실 수와 염은 다른 것입니다, 입을 기준으로 위쪽에 난 것아 수(鬚)이고 아래쪽에 난 것이 염(髥)이지요. 염소는 턱 쪽에 긴 수염이 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어려서 흑염소를 기른 적이 있습니다. 기르기 쉬운 동물은 아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물론 개체차가 있기는 하지만 고집이 몹시 세서 자기가 가고 싶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키우는 사람으로서는 짜증 나게 마련이지요. 곧 앞에서 끌고 풀을 뜯기러 나서면 네발로 버티며 따라오지 않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처음에는 끌고 가는 데 주력했으나 너무 힘들고 어려워 뒤에서 몰기로 합니다. 그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지요. 염소는 검은색이라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는 색이 아닐뿐더러 높은데 올라가기를 좋아하여 장독을 깨뜨리기도 하고 뿔로 주인을 들이받기도 하며, 울음소리조차 간사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염소를 대하면서 앞에서 힘으로 끄는 것보다 뒤에서 몰이하는 게 좋다는 것은 우리네 인간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조직의 지도자는 어찌 되었거나 앞에 있는 사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채근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굼벵이는 지극히 더럽지만, 매미로 변하여 가을바람에 이슬을 마신다. 썩은 풀은 빛이 없지만, 반딧불이 되어 여름 달밤에 그 빛을 밝힌다. 그러므로 깨끗한 것은 언제나 더러움에서 나오고 밝음은 언제나 어둠에서 생겨난다." 방을 깨끗이 하려면 걸레질을 해야 합니다. 걸레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러워지지만, 방은 깨끗해져 갑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밝히는 것은 아름답지만,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빛을 남에게 전달하는 사람은 그 빛으로 인해 자신도 환해집니다. 폭풍우에도 반딧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는 빛이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빛이 중요한 이유이지요. 주돈이는 애련설(愛蓮說)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연꽃은 진흙에서 피어나지만 더럽혀지지 않는다." 더럽혀지지 않는 것뿐 아니라 고귀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루 가운데 가장 어두울 때는 해뜨기 직전입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이 지나야 밝은 빛이 옵니다. 사람은 어둠을 싫어하고 밝음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어둠과 밝음은 빛의 유무일 뿐 대상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린 동전에 앞뒤가 존재한다는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아래 내용은 장자가 공자를 보는 시각입니다.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제자들은 책을 읽고 있는데 공자는 노래를 부르며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어떤 어부가 배에서 내려 조용히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노래가 끝나자 어부가 물었다. “저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냐?” 자로(공자의 제자)가 대답하길 “공씨로 노나라의 군자입니다.” “공씨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공씨는 태어나면서 몸소 인의를 실행하며 예악을 지키고 인륜을 갖추어 위로는 임금에게 충의(忠義)를 다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교화하여 장차 천하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 합니다. 객이 또 물었다. “영토를 가지고 있는 군주인가?” “아닙니다.” “그러면 제후나 왕을 돕고 있는 사람인가?” “아닙니다.” 객이 왔던 길을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 어질기는 틀림없이 어질지만, 아마도 그 몸은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마음을 괴롭히고 몸뚱이를 지치게 해서 자신의 참된 본성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의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도 장강은 유유히 흐른다." 어찌 장강(양쯔강)만 흐르겠습니까? 인생도 흐르고 역사도 흐르고 시간도 흘러갑니다. 흘러야 인생입니다. 흐름이 멈추면 인생 또한 멈추게 됩니다. 강물도 그러하지만, 시간과 마음도 흐르게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도 흐르게 해야 합니다. 멈추면 썩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이 나의 곳간에 더 많이 쌓아두려 노력합니다. 그건 흐름을 방해하는 멈춤일 수 있습니다. 파도는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움직임이 매끄러운 조약돌을 만들고 고운 모래를 만듭니다. 옹달샘을 퍼내지 않으면 고인 물이 되어 썩게 마련이고 썩지 않더라도 흐름이 멈추고 나면 쉬 마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흐름을 유지하는 것은 살아있음의 다른 표현입니다. 성인의 몸에는 약 5~6리터의 혈액이 있습니다. 그 혈액은 끊임없이 흘러야 합니다. 몸의 곳곳에 산소와 영양이 공급되어야 살 수 있으니까요. 그 흐름이 멈추면 삶도 끝나게 되겠지요. 맹자 진심장(盡心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의 수양은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養心莫善於寡欲) 욕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요즘 산엔 산나리가 한창입니다. 보통 산나리라고 하지만 하늘나리, 중나리, 솔나리, 금나리, 애기나리…. 모두 저마다의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오월의 장미가 향기를 뿌리고 난 빈자리에 여름 과일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오디와 딸기는 세월에 묻혀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사과와 복숭아가 아기 주먹만 하게 열매를 키워내고 있으며 텃밭의 고추도 가지가 부러지도록 실하게 열려 풍요로움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저 어린 싹을 땅에 묻어놓았을 뿐인데 그 강인한 생명력이 놀라울 뿐입니다. 어찌 보면 사람이 심고 물주고 김매고 가꾸었을지라도 그 삶의 본질은 따사로운 햇볕이고 자비로운 대지이며, 은혜로운 비와 바람임을 압니다. 어쩌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인간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주변의 여건과 환경 또한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자연재해 앞에 나약한 것 또한 인간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거대한 것도 그러하지만 아주 작은 것에도 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 갠 뒤 인도와 차도 사이의 아주 작은 틈 척박한 환경, 작은 모래 흙더미 속에서 앙증맞게 핀 민들레의 노란 꽃망울을 하염없이 내려다볼 때 우린 자기 삶에 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장자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척(盜跖, 도둑놈)의 부하가 도척에게 물었습니다. “도둑질하는 데도 도(道)가 있습니까?” 도척이 대답합니다. “어디에든 도가 없는 곳이 있겠느냐. 방안에 감춰진 것을 짐작으로 아는 것이 성(聖)이고, 훔치러 들어갈 때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勇)이며, 훔친 다음 맨 뒤에 나오는 것이 의(義)고, 훔치게 될지 안 될지를 아는 것이 지(知)며, 훔친 것을 골고루 나누는 것이 인(仁)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은 채 큰 도둑이 된 자는 아직 없었다." 장자의 전편을 흐르고 있는 기본 사상은 제물론(齊物論)입니다. 제물은 모든 것이 차별 없이 하나라는 것이지요. 일종의 ‘차별 폐지법’인 셈입니다. 곧 도의 관점에서는 선과 악, 미와 추, 나와 너의 차별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길고 짧음을 이야기하지만 같은 길이라도 긴 것 옆에 가면 짧은 것이 되고 짧은 것 옆에 서면 긴 것이 됩니다. 왜 장자는 도둑 이야기를 하며 도둑질하는 것에도 도가 있음을 강조한 것일까요? 이는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의 도리를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성(聖)과 인(仁)은 고사하고 의(義)나 용(勇), 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가 중요합니다. 책 《무소유》를 쓰신 법정 스님은 이야기합니다. “행복의 비결은 우선 자기 자신으로부터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는 일에 있다.”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셨습니다. "잎이 져버린 빈 가지에 생겨난 설화(雪花)를 보고 있으면 텅 빈 충만감이 차오른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 가지이기에 거기 아름다운 눈꽃이 피어난 것이다. 잎이 달린 상록수에서 그런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거기에는 이미 매달려 있는 것들이 있어 더 보탤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연히 행운이나 재물이 들어오면 행복을 느낍니다. 로또 1등 당첨도 그러하지요.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보통 사람들과의 행복 지수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답니다. 우리 뇌에 '적응'이라는 기제가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큰 강도의 행복도 시간이 지나면 영인 상태로 다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행복은 큰 거 한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니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곧 복권에 당첨되어 10억을 한꺼번에 받는 것보다 날마다 100만 원을 100일 동안 받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심산유곡에 피어있어 누구도 보아주지 않는 꽃도 그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꽃은 인간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자손을 후대에 물려주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벌과 나비, 곤충에 관심이 있을 뿐이지요. 관심 밖에 놓인 인간의 찬양은 꽃의 처지에서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지요. 자연을 보면 인간사에서 느낄 수 없는 멋짐을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인간 사회를 봅니다. 기업은 이윤을 위하여 노동자를 고용하여 이익을 창출합니다. 노동자는 적게 일하고 많이 받으려 노력하고 사용자는 많이 시키고 적게 주려 노력합니다. 그것이 상충하여 물리적 충돌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하지만 꽃은 그러지 아니합니다. 달콤한 꿀과, 기분 좋은 향기, 먹거리인 꽃가루를 아낌없이 내어주고 받는 것은 단순한 꽃가루받이인 수정인 셈이니까요. 또한 동물의 위장을 빌려 씨앗을 먼 곳까지 이동하는 수고로움을 끼칠 때도 상큼한 과육을 넉넉히 제공하는 걸 마다하지 않습니다. 배려와 나눔이 있는 유혹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렇듯 자연은 더불어 살아가는 모범을 보이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