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홍사내 기자] 훈민정음이 과학적이고 훌륭한 글자라고 하는 것은, 그 만든 사람과 만든 때, 만든 원리가 뚜렷하고, 창제 원리의 논리 체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며, 세종의 주체 의식과 백성 사람 통치 철학이 깃들어 있어 훌륭한 글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밝혀진 기록으로는, 그가 언제부터 어떻게 언문 창제 작업을 하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집현전 학사들이나 신하들이 모르는 동안 집안에서 자식들과 의논하면서 비밀스럽게 작업하였다는 것 정도이다. 최만리의 상소에서 이제 널리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구실아치 10여 사람에게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해 놓은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가져다 붙이고 장인(匠人) 수십 사람을 모아 나무판에 새겨 떠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여론)가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한 말이나, 왕세자에게 글자 만드는 일을 의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창제한 사실을 밝힐 때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의공주에게 장가든 안맹담의 집안 죽산안씨대동보의 기록에는, 훈민정음을 만들 때 세종이 변음(變音)
[그린경제/얼레빗=홍사내 기자] 1. 무릇 일의 공로를 세울 때는 쉽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나라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에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올바른 체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이 꼭 필요해서 만드는 것이라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꿀 만한 큰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모든 신하들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후경(先甲後庚; 일의 앞뒤 차례를 잘 살핌)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帝王; 황제와 임금)에 묻고 따져 바르게 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년이라도 성인(聖人)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널리 여러 사람의 의논을 구하지도 않고 갑자기 구실아치 10여 사람에게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해 놓은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가져다 붙이고 장인(匠人) 수십 사람을 모아 나무판에 새겨 떠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뒷날 여론이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농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
[그린경제=홍사내 기자] 1.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만족스럽지 못한 속된 말[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말을 짓는 데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말단 구실아치나 노비의 무리라도 반드시 익히고자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알기만 해도 이두를 쓸 수 있사온데,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거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게 되므로,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또한 학문을 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새끼로 매듭을 엮어 쓰는 시대라면 우선 언문을 빌어서 한때의 사용에 이바지하는 데는 오히려 옳을 것입니다. 그래도 바른 의논을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방편으로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먼 훗날의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더욱이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관아의 장부와 문서, 회의 기록 등의 일에 방해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천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
[그린경제=홍사내 기자]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1444) 2월 20일 기사에는 최만리 등이 임금에게 올린 글이 온전히 실려 전한다. 당시 최고위급이자 대유학자인 최만리를 으뜸으로 하여 유학자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이 새로운 글자 창제의 부당함을 임금에게 아뢴 상소문 내용은 훈민정음에 기록된 서문과 해례 이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소란 신하로서 임금에게 문제점과 잘못, 또는 태도와 자세 따위를 지적하여 개선코자 할 때 올리는 글로서, 학문적 바탕을 총동원하여 글을 써야 하고, 근거와 타당성을 갖추어야 했으니, 목숨을 건 글쓰기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종이 언문을 창제하였다고 발표하자 두 달이 지나서 올린 이 상소의 내용으로 우리는 당시 국내외 정세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되고, 학자들의 문제제기와 그들이 이해하는 글자의 장단점을 보면서 객관적 안목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이 상소문이 없었다면, 세종이 이런 논의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 왕권으로 밀어붙인 것이 되고, 강압적인 정책으로 새 글자의 사용은 빠르게 확대되었겠지만 여러 반대론자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며, 세종의 위대함은 그
[그린경제=홍사내 기자] 하루. ▲ 세종실록 103권, 26년(1444) 2월 20일기사,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뢴 내용 한글의 최초 이름은 언문(諺文)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03권,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기사에 이 새로운 글자가 처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두 달 뒤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이 의견을 모아 언문을 창제하는 것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 중국 문헌이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언(諺)이란 글자는 자주 쓰던 글자였는데, 이를 토대로 언문의 뜻을 정리하면 성인의 말이나 전(傳)해 내려오는 교훈적인 말을 그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 말을 적으면 바로 글이 되는 문자. 말소리를 적는 글자. 입말 글자의 뜻이다. 그리고 3년 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이름을 붙였으며, 줄여서 정음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 500여 년 동안 대중들은 훈민정음이란 말 보다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이 글자를 즐겨 써 왔는데(그러므로 언문이란 세종대왕께서 만든 글자를 업신여기거
[그린경제=홍사내 기자] 녘이란 ① 어떤 쪽이나 가. ② 어떤 무렵을 이르는 말이다.(한글학회 우리말 큰사전(어문각, 1992)) 이 말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많이 쓰는 말인데, 지금은 쪽, 무렵, 가, 때, 편 따위의 말을 쓰면서 차츰 사라져가는 형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말 사전에서도 그 쓰임새를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다. 또 띄어쓰기도 달라서 올려진 낱말은 붙여 쓰고, 올려지지 않은 낱말은 띄어 써야 하므로, 전체적으로 보면 체계를 잡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많이 써서 열심히 살려내야 할 낱말이라 생각한다. (2013. 8. 9. Ⓒ홍사내)
[그린경제=홍사내 기자] 몇 년 전 주몽이라는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면서 우리 역사의 처음 때 말과 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있었다. 서양 기원(예수 기원)으로 본다면 기원전 이야기인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이상국집≫, ≪동국사략≫, ≪삼국사절요≫, ≪세종실록 지리지≫등 우리 역사책에 흩어져 나타나는 기록에서마저 자세히 알 수 없는 신화시대를 저렇게 현실감 나게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2006년 방영되었던 MBC 드라마 주몽의 한 장면 그래서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정말 우리 역사도 제대로 모르는구나. 나 자신 그리스․로마신화나 알지 우리 조상의 신화나 역사를 너무도 모르고 있구나 하는 미안함 마저 들었다. 우선 신화 속 인물로 알고 있는 주몽이 저렇게 내 앞에 나타나 우리 조상의 삶을 말하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지고 보면 문화나 문명은 말의 힘이면서 글자의 힘이다. 이집트의 문자 유적은 기원전 3000년, 중국의 한자 유적은 기원전 1400년, 기독교 헤브라이어 구약성경은 기원전 1000년, 그리스신화는 호메로스에 의해 기원전 600년, 석가모니의 말씀은 기원전 6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