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로 불렸던 발해는 늘 미지의 영역이었다. 학교 역사 시간에도 삼국 시대에 이어 잠깐 다루고 넘어가는 정도가 전부였다. 무언가 거대하고 융성했던 나라의 위용을 풍기면서도, 몇 줄로 급히 정리하고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이현 글, 경혜원 그림의 이 책, 《해동성국 발해》는 아이에게는 발해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려주고, 어른에게는 아스라한 발해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 주는 그림책이다. ‘나의 첫 역사책’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우리 역사를 흥미진진한 그림과 다정한 말투로 알기 쉽게 풀어준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을 노예로 끌고 갔고, 랴오허강 서쪽의 영주 땅까지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다. 영주는 당나라에 나라를 빼앗긴 고구려, 말갈, 거란 유민이 골고루 모인 땅이었다. 나라 잃은 설움은 언제나 같은가보다. 당나라 치하의 노예 생활은 참혹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당나라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사람 손만영이 먼저 나섰다. 당나라군을 무찌르고 영주를 차지한 그는 당나라 황제가 있는 장안성을 노렸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다스리는 당나라는 강했다. 그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고조선, 고구려 시대 우리의 활동 무대였던 구이원(九夷原) - 캄차카반도에서 곤륜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 –을 잃어버린 것은 애석하나 고향을 잃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경계하며 옛 선조의 기상과 포부를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집필하게 되었다.” 이는 고조선 역사대하소설 《구이원(九夷原)》 서문에 나오는 작가 무곡성의 집필 의도다. 얼마 전 신문사로 소설 《구이원(九夷原)》 제1권에서 5권까지 5권이 배달되어왔었다. 사실 나는 소설을 서평의 대상으로 쓴 적이 없고, 더구나 한꺼번에 5권이라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조선 역사대하소설’이란 장르에 나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고, 별로 어렵지 않게 5권 읽기를 끝냈다. 소설의 시작에는 “하늘이 처음 열리고”란 서곡 같은 글이 있었다. 여기엔 “그동안 구이원의 주인 배달국, 조선은 수천 년 동안 은성하며 태평성대를 누리었고 가달의 무리는 전혀 보이질 않아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러나 마도의 무리는 절대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무리가 불어나 죽은 가달마황을 신으로 받드는 가달마교를 조직하여 세상 사람들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한 나라가 망하고, 또 그 궁궐은 동물원이 되고… 불과 백여 년 전 우리 역사에 일어났던 일이다. 지금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이런 슬픈 역사 속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김명희가 글을 쓰고, 백대승이 그림을 그린 이 책, 《동물원이 된 궁궐, 창경궁》은 창경궁이 품고 있는 슬픈 ‘창경원’의 역사를 모르는 어린이들이 읽기 좋은 그림책이다. 일제는 궁궐에 있던 소나무를 모두 베고 곳곳에 벚나무를 잔뜩 심었다. 그리고 광복이 되고 나서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창경원은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책의 앞부분에는 부모님과 창경원에 놀러 간 한 소녀의 이야기가, 책의 뒷부분에는 창경궁의 역사와 주요 건물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재미와 정보를 함께 얻을 수 있다. 창경궁을 한 번쯤 가보거나 들어는 봤어도,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견주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창경궁은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쪽에 지은 ‘수강궁’을 성종이 증축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성종은 정희왕후, 안순왕후, 소혜왕후 세 대비를 편안히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지었고, 그래서 나랏일을 돌보는 ‘외전’보다 생활공간인 ‘내전'에 더욱 신경을 썼다. 세종이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4) 문묘에서 세 왕께 예를 드리니 동궁과 성균관에 봄이 왔구나. 술 단지를 받든 모습이 엄숙하고 자리에 올라 글 읽는 소리가 새롭다. 나이 따라 양보하는 것은 주나라의 선비요 둘러앉아 듣는 이는 한나라의 빈객이라. 나는 직함을 가지고 태만히 한 일이 부끄럽지만 축하를 드리는 소리가 궁궐 안에 가득하네. 이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입학식에 관리로 참석했던 이만수(李晩秀)가 쓴 시다. 효명세자의 입학식은 1817년 3월 11일, 성균관 명륜당에서 무척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날 입학식에는 세자를 교육하는 시강원의 관리들과 성균관에 소속된 유생들은 물론이고, 수천 명의 백성들이 길가로 몰려나와 “목을 길게 늘이고 손을 모아 송축하며” 구경했다. 이렇듯 왕세자의 입학례는 조선왕실의 기쁨이자 나라의 ‘경사’였다. 조선왕실의 공식 후계자가 학교에 갈 만큼 장성해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예식이니, 그 위상과 중요함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김문식의 이 책, 《왕세자의 입학식-조선의 국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이런 왕세자의 입학식을 세세히 살펴보며 조선왕조가 후계자 교육에 얼마나 열성을 쏟았는지, 입학식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91) “지금의 명나라가 있기 전, 그러니까 당나라보다 더 훨씬 앞선 시기인 초나라에 영왕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 영왕이 사랑했던 여인이 허리가 가늘고 아름다웠다고 하더구나. 그 이후부터 사람들은 허리가 가늘고 아름다운 여인을 가리켜 초요(楚腰)라 불렀단다. …(줄임)… 그래서 나는 마지막 글자는 미녀 갱(妔) 자를 써서 초요갱이라 지었다.” 허리가 가는 초나라의 미녀를 닮은, 조선 전기 한양을 떠들썩하게 한 으뜸 기녀 초요갱은 그렇게 탄생했다. 허구와 사실을 절묘하게 섞어 쓴 이 소설, 박지영이 쓴 《초요갱》에서 주인공 ‘다래’의 첫 정인(情人)인 평원대군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그 이름을 지어 주었다. 실제 역사 속 초요갱은 어마어마한 ‘화제의 인물’이었다. 세종의 세 아들, 평원대군, 계양군, 화의군이 모두 그녀에게 반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만한 ‘조선 왕자 삼각관계’가 실제 역사에 펼쳐진 것이다. 황진이도 한 줄 나오지 않는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열여섯 번이나 기록이 실렸으니, 한 시대를 풍미한 으뜸 예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처음 초요갱의 마음을 얻은 이는 세종의 7남, 평원대군이었다. 소설 전반부에서는 평원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나라에서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치고 ‘오은선’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예! 세계 여성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 고봉 14좌를 전부 오른 분이지요. 그리고 조금 더 아신다는 분이면 국내 여성 처음으로 세계 7대륙의 최고봉을 오른 인물이라는 것도 알 것입니다. 그 오은선 씨가 자신의 등정기를 《오은선의 한 걸음》이라는 책으로 냈습니다. 저는 2011년도에 오은선 씨와 불암산을 함께 산행하면서 나눈 이야기를 월간중앙에 ‘오은선 대장과 불암산을!’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은선 씨가 책을 냈다기에 반가운 마음에 읽어보았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14좌를 오르는 오은선 씨의 거친 숨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하였습니다. 은선 씨는 너무 힘들어 어떤 때는 그냥 한 걸음만 절벽 쪽으로 내딛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었답니다. 그러면 1,000m 이상을 미끄러지며 그대로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오죽하면 절벽 쪽으로 한 걸음을 내딛고 싶었을까? 그 극한적인 상황을 떠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합니다. 은선 씨가 오른 산 가운데 제일 힘들었던 산은 어떤 산일까요? 머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조선의 도읍, 한양.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도읍지로 오랜 세월을 품어낸 한양은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보고다. 수많은 이들이 오고가고, 살다간 땅의 역사는 풍부하고 깊을 수밖에 없다. 이 책 《한양 왕의 집 내집처럼 드나들기》의 지은이 이용재는 건축평론가로 한양 땅을 종횡무진 누볐다. 일요일만 되면 딸과 함께 서울 답사를 다니곤 했다. 5년 동안 함께 전국을 세 바퀴 돌았고, 서울 땅에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됐다. 이 책은 한양 도성 안에 있던 조선 시대 건축과 일제 강점기 전의 문화유적 가운데 19곳을 가려 뽑아 우리역사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는 책이다. 서울에 오래 살았어도 무심코 지나쳤거나, 보았더라도 그 뜻은 자세히 몰랐을 문화유적을 쉽고도 재밌게 알려준다. 가령, 창덕궁 연경당이 지어진 내막을 이렇게 설명한다. (p.60) 벼슬을 하면 대부, 벼슬 안 하고 초야에 묻혀 살면 사. 이 둘을 합쳐 사대부라고 하는 거죠. 1827년 순조 기자회견. “건강 때문에 여러 해 정사를 소홀히 하고 지체시켰다. 이제 세자가 총명하고 영리하니 대리청정을 시켜라.” 대리청정을 명할 때 효명세자는 19살, 순조는 38살. 효명세자는 창덕궁에 1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는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가 나오고 지방자치단체들이 우리나라의 국화라면서 무궁화를 심고 무궁화공원을 만들곤 하는 것이 이상스럽기만 했다. 특히 우리 역사서와 문학 그리고 그림에도 등장하지 않는 무궁화가 어찌 갑자기 국화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러다가 최근 강효백 교수의 책 《두 얼굴의 무궁화》와 《한국 진달래 오라》을 읽고 그 궁금증이 확연히 풀렸다. 강 교수는 먼저 머리말에서 ‘우리나라 옛시조 3,355수 중 단 한 수라도 무궁화를 노래했더라면’, ‘약 4,965만 자의 조선왕조실록에 무궁화가 단 번이라도 나왔더라면’, ‘화훼식물이 등장하는 조선시대 그림 154점 가운데 무궁화 그림을 단 한 점이라도 볼 수 있었더라면’, 구한말 이전 옛 민요 2,585곡 중에 무궁화를 노래한 민요를 단 한 절이라도 들을 수 있었더라면‘, ’무궁화 재배 가능지가 황해도 이남이 아니고 북한과 만주까지였더라면‘ 등을 제시하면서 무궁화는 우리의 국화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뿐만 아니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정말 한반도의 무궁화를 뿌리채 뽑고 불살라버리는 등 탄압했더라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은행권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286)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네 이불 속 눈물은 얼음장을 흐르는 물과 같아 밤낮으로 흘려도 그 누가 알아주나 - 여인의 정(閨情) - 이옥봉(李玉峰). 허난설헌이나 신사임당을 들어본 이는 많아도, 이옥봉은 퍽 낯선 이름일 것이다. 조선 천재 여류시인 이옥봉은 승지 조원의 첩실로만 살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었다. 조선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서녀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훨씬 더 행복했을지도 모를 비운의 인물, 이옥봉. 장정희가 쓴 이 책 《옥봉》은 그녀의 신산했던 삶을 한 폭의 그림처럼, 유려한 문체로 그려낸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소설적 허구와 사실을 절묘하게 섞어 쓴 작가의 필력이 책장을 술술 넘기게 한다. 이야기는 바야흐로 1630년(인조 8년), 사신단 일행으로 명나라를 찾은 조희일이 명나라 대신의 집에 초대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명나라 대신은 손때로 반질반질해진 책 한 권을 꺼내온다. 바로 《옥봉 시집》이었다. 아버지 조원의 첩실이었던 그녀가 평소 시를 즐겨 쓰는 것을 모르지 않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0)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마라. 일할 때는 공적인 일이 아니면 마루로 내려가지 마라. 규장각에서 공부하는 학자가 아니면 아무리 높은 관리라 하더라도 규장각에 올라갈 수 없다. 일할 때는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해라.’ 조선 후기의 명군, 정조가 왕실도서관 규장각에서 일하는 관원들에게 내린 지침이다. 쓱 훑어봐도 정조가 규장각 관원들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뒤 창덕궁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답고 한적한 곳에 2층 건물, 규장각을 지었다. 정조는 24년 동안 재위하면서 규장각 학자들과 151종류, 3,960권의 책을 펴냈다. 직접 펴낸 책 말고도 중국이나 외국의 희귀한 책을 구해와 보관하기도 했다. 책이 귀했던 시절, 규장각은 모든 종류의 책을 모아놓은 ‘조선의 보물창고’였다. 이 책, 신병주 교수가 이혜숙 작가와 함께 펴낸 《왕실도서관 규장각에서 조선의 보물찾기》는 규장각에 소장된 책들 가운데 잘 모를 법하거나 관심을 가질만한 책들을 가려 뽑았다. 옛 규장각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각종 국보와 보물, 옛 책과 문서, 지도, 정부 기록물 26만여 점 가운데 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