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5년 전, 아직 봄추위가 가시지 않은 5월의 어느 날, 그날도 나는 엄마를 모시고 목욕탕에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때 엄마가 일흔 아홉이었지만 워낙 몸 관리를 잘한 덕에 퍽 젊어 보였다. 그날도 나는 엄마네 아파트 앞에 차를 대기시키고 엄마를 기다렸다. 이윽고 아파트에서 내려오신 엄마는 항상 앉던 앞좌석이 아니라 왠지 뒷좌석에 오르셨다. "엄마, 오늘은 왜 뒤에 앉으세요?" "응, 오늘은 여기가 편한 것 같다." 수다를 모르는 어머니인지라 더 묻지 않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한 마디 하셨다. "내일시간 되니?" "무슨 일이 있어요?" "래일 나와 함께 병원에 가볼래?" 엄마는 언제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지 않고 늘 요점만 추려서 얘기를 했다. 그러기에 엄마의 얘기면 꼭 리유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래일의 스케줄을 고려할 사이도 없이 얼른 “예”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을 해놓고 보니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엄마 어디 아파?” "응 감이 안 좋다." "엄마 몹시 아픈 것 맞구나. 어디가 안 좋은 거요?” 내가 급히 다잡아 묻자 엄마는 감이 안 좋다는 얘기만 반복할 뿐 더 이상 입을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어느 때부터 남편이 미안한 눈길을 보내더니 올해 한가위는 오빠와 함께 내 친정아버지의 산소에 가보자고 청들었다.(그동안 오빠와 형님 수고했어요! 해마다 잊지 않고 아빠의 산소를 찾아주셔서… 이 못난 동생을 용서해주세요!) 해마다 찾아오는 아빠의 산소지만 올해 따라 낫질하기 바쁠 정도로 이렇게 풀이 컸는가고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오빠가 낫부터 꺼내든다. "아빠, 막내딸 왔어요. 아빤 그래도 이 막내딸 알아볼 수 있죠? 어릴 적 오빠와 엄마의 꽁무니를 따라 아빠의 산소를 찾아 뵌 뒤로, 시집간 딸은 친정집 산소를 찾아뵈면 나쁘다는 봉건의식에 30여년이 되도록 여태껏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뵙지 못했어요. 제가 '못 된 딸년' 맞죠?"하고 내가 입으로 주절주절 댄다. 오늘따라 아빠의 무덤 위에 꺼칠하게 자란 저 풀이 마치 길게 자란 아빠의 머리 같아 보여 오빠의 손에 쥐였던 낫을 빼앗으며 "불효한 딸"의 감투를 벗어보려고 나는 아빠의 "머리"를 다듬어본다. 그동안 아빠가 많이 노여워 했나보다. "머리"가 이렇게 더부룩할 정도로 자랐으니… 올해 따라 하늘에서 물함지가 륙속 터지는 바람에1 억세게 자란 저 풀~ 그동안 아빠가 이 막내딸 와주길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신랑 없는 집은 휑뎅그렝한 게 텅 빈집 같다. 왜서인지 애들도 아빠만 없으면 완전 군대기율로 얌전해진다. 찰칵찰칵 시계소리가 고요한 집안의 적막을 깨뜨리고 가슴을 허비며 또렷이 들려온다. 집에 있을 때는 별로 못 느끼던 신랑의 빈구석이 그가 밖에만 나가면 이렇게 너무나도 크게 안겨온다. 나는 애들이 잠든 깊은 밤에 초조히 창가에 서서 애들 아빠가 또 어디선가 과음하지나 않는지 괜한 근심만 하고 있다. 세월이 참 빠르다. 어느덧 신랑이랑 같이 살아온 지도 거의 20년 세월이 된다. 신랑은 나한테 참으로 고맙고 귀인 같은 사람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사람이 옆에 있어야만 반짝반짝 빛을 뿌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지금도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20년 전의 그 그림이,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중 2학년에서 자퇴한 나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던 어느 날 마음씨 좋은 이웃의 소개로 지금 시댁에서 하는 쇼핑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 여직 내가 살던 세상이랑 너무 다른 환경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돈을 이렇게 많이 벌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큰 장사가 아니었지만 당시 돈 없어 대학시험도 못 치고 중학교를 중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지금 회계일은 보통 계산기로 하지만 나는 오랜 습관으로 주산으로 하는 것이 편하다. 나는 퇴직 전까지 향병원의 회계업무를 주산으로 했는데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주산은 바로 남편이 향진재정소일 그만두면서 나에게 물려준 것이다. 이 주산은 어찌 보면 남편이 순박한 사업심을 물려받은 것 같아서 남편이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주산이다. 남편이 땀과 노력 정직함과 성실함이 숨어있는 이 주산은 늘 내 곁을 지켜주었다. 퇴직하고 초빙 받은 새 회사에서 회계업무를 할 때도 이 주산으로 매달 수입, 지출, 재무분석 등 업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하여 회사 일을 항상 제집 살림처럼 알뜰히 했고 회사운영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요즈음 문학공부를 하면서 이것저것 뒤지다 서랍 속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이 주산을 보게 되었다. 남편이 떠나고 나서 혹시 이 주산을 보게 되면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 아픈 추억이 되살아날 것 같아 서랍 속에 깊숙이 넣어두었던 것이다. 이 주산은 남편이 청춘을 그려볼 수 있고 남편의 손때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유일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주산을 마주하고 보니 잊은 줄 알고 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이모!"정겨운 시골집이 한눈에 들어오자 애들처럼 목청껏 웨치는 내 부름소리에 이모와 이모부가 부엌문을 왈칵 열고 급히 달려 나오신다. 어쩌다 찾아간 시골 이모네 댁, 삼십여 호되던 마을은 이제 달랑 세집뿐이다. 뜨락을 감싸고 있는 헐렁한 널바자*는 이제 조금씩 구부정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모부가 힘이 딸려 대충 해놓은 듯한 창문의 문풍지는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채 제 구실이나 하나 싶게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 밑에는 가쯘하게* 패 놓은 장작들이 차곡차곡 곱게 쌓여져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에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의 환호소리와 그 구경에 신이 난 강아지와 병아리들의 요란스런 동참으로 조용하던 시골집 뜨락은 삽시간에 왁짝 끓어번졌다*. 동년시절, 대부분 방학시간을 나는 이곳 큰이모댁에서 보냈다. 이모네는 위로 아들 둘 아래로 딸 하나로 슬하에 이남일녀를 두셨다. 열한 살에 아버지를 여읜 내가 혹 주눅이라도 들까봐 이모는 나를 각별히 아껴 주셨다. 나보다 한 살 더 먹은 사촌언니가 엄청 질투할 정도로… 열두 살쯤 될 때의 일로 기억된다. 마을에 보따리옷장수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그 시절농촌에는 현금이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연길로 이사 온 나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어느 날 나는 집식구들과 함께 시장을 돌아보았다. 시장골목에서 사과를 보던 아들이 “엄마! 사과 사줘!”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농촌에서 가져온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생활을 안배하다보니 돈을 아껴 써야 했다. 아들애가 먹겠다고 하니 사과 한 알을 사서 두 쪼각을 만들어 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과일을 팔면 어떨까? 애들도 원 없이 먹이고 생계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굴리면서 다음날 나는 시장에 가서 다른 사람이 과일 파는 걸 한참 지켜보았는데 잘 팔렸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2000원을 투자하여 시장에 매대를 산후 장사를 시작했다. 남들이 장사하는 걸 보고 쉬운 줄만 알았는데 이 일을 어쩐담? 꿈에도 생각 못하던 장사를 시작한 나는 고객이 나보고 말을 건네면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면서 대답을 겨우 했다. 나는 자신에게 “제발 정신 차려! 너는 두 아이의 엄마야!”라고 수없이 타일렀으나 소용없었다. 련속 며칠째 수입은커녕 본전도 못하자 나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상황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우리 부부가 결혼한지도 어언간 27년이란 시간이 지나왔다. 서로 아끼기도 하고 서로 다투기도 하면서 꿈같이 흘러간 세월, 지금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간 이국땅에서 겪었던 그 고난의 시간들이 우리 부부, 우리 가정으로 하여금 더욱 튼실한 하나로 되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된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들이 있다. 금방 결혼하여 우리는 자그마한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였다. 시집의 가정형편과 서로간 생활습관의 차이, 그리고 남편이 단위일과 친구들 만남으로 매일 술과 동무하다 보니 우리 사이에는 충돌이 그칠 줄 몰랐다. 집에는 화약냄새로 가득하였고 다투기를 밥 먹듯 하였다. 나는 출근하면서 혼자서 애를 돌보는 형편이라 늦게 돌아오는 남편이 야속하여 집문을 잠근 채로 열어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탕, 탕…” 아무리 두드려도 안 되는지라 술김에 화가 잔뜩 난 남편이 발로 문을 걷어찬 탓에 집문이 망가지기도 하였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법원의 문턱까지 가기도 하였다. 지루한 결혼생활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에서였던지 아니면 셋방살이를 면하고 남부럽지 않은 가정생활을 갈망해서였던지 병원에서 주원부주임 겸 의무과 과장직까지 맡아하며 잘 나가던 남편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집에 들어서는 순간 고소한 음식냄새가 솔솔 풍겨온다. 신발을 벗기 바쁘게 허둥지둥 주방에 들어가 보니 그릇에 수북하게 담겨져 있는 만두가 아직도 따끈따끈하다. 그제야 동지날 팥죽 먹는 것이 전통적인 민속습관이지만 올해는 애동지(음력으로 초순에 드는 동지)라서 만두도 먹어야 된다고 하시던 엄마의 말씀이 떠오른다. 명절이나 기념일이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우리 집 식탁에까지 놓고 가시는 우렁각시는 다름 아닌 우리 엄마다. 그 어떤 산해진미와도 비길 수 없는 엄마가 정성들여 만드신 만두를 나는 볼이 미여지게 집어먹는다. 그러면서 불혹의 나이에도 부모님 사랑을 넘치게 받고 있다는 현실에 나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남실거린다. 명절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유래에 따라서 지정된 음식을 먹으면 무조건 액운을 쫓고 만사형통하다는 말이 물론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엄마는 그것을 어기면 마치 큰일이나 나듯이 늘 잊지 않고 챙겨주신다. 매년 음력설이 지나서부터 엄마는 정월대보름에는 꼭 부럼을 깨먹어야 부스럼이 나지 않고 일년 동안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말씀해주신다. 귀띔해주시고도 혹시 지나쳐 버릴까봐 엄마는 오곡밥에다가 땅콩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이불장을 펼치면 아롱다롱 꽃이불들이 나를 보고 해시시 웃는다. 그렇다. 지금은 집집마다 이블장이 넘쳐나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철철이 자기 이불이 따로 있고 폭신폭신한 꽃이불 속에서 모두들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쪼들리게 가난했던 지난 세기 50년대 그 시절 우리집 농짝위에는 이불 두 채가 횡뎅그레 올라 앉아있었는데 이 허름한 이불 두 채가 우리 온 집안의 큰 재산이었다. 엄마는 31살에 내가 돌도 안 되던 해에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시고 “밥그릇 하나라도 줄이라”는 삼촌의 뜻에 쫓아 언니를 일찍 시집보내곤 철모르는 우리 3남매를 데리고 시골에서 아글타글 고된 일을 하시면서 눈물겨운 나날을 보내었다. 세월이 흘러 1957년 큰 오빠가 연변1중에 입학하였다. 학비와 숙사비도 마련해야 했지만 이불도 큰 문제꺼리였다. 우리집 형편에서 새 이불을 해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엄마는 말없이 이불 한 채를 뜯어 씻고 끓이고 바래워* 다듬질하였다. 방치돌*에 두드리고 대명대*에 담아 다듬은 덕분인지 눈같이 하얀 이불은 웃었다. 오빠는 엄마의 정성이 슴배인* 이불짐을 지고 도시로 떠났다. 집에는 이불 한 채만 달랑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엄마! 무지개가 비꼈어요! 빨리 와봐요! 빨리빨리!” 아들의 다급한 외침소리에 나는 신나게 해대던 칼질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동녘하늘에 칠색무지개가 곱게 걸려있었다. 참 간만에 보는 무지개라 너무나도 반가웠다. “무지개의 끝에는 보물이 묻혀있단다.” 아들과 함께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뜩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들, 저 무지개의 끝에 보물이 묻혀있대.” “와! 정말요?” “그래, 엄마가 어릴 적에 너의 증조할머니께서 그렇게 알려주셨거든.” “무지개의 끝에 층집이 있는데… 그럼 층집 밑을 파봐야 하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아들의 말에 나는 해일(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아들, 엄마랑 보물 찾으러 갈래?” 나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는 아들을 차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그래, 어디든 쫓아가보는 거야.) 아들애와 함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덩달아 신났다. 비가 온 뒤라 거리는 유달리 깨끗해보였다. 하늘에 걸린 무지개 덕분인지 지나가는 행인들의 얼굴마다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한참을 달려 드디어 아까 우리 집 창문으로 내다본 그 층집아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