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대체로 여자의 마음을 비유하자면, 꽃은 피지만 덩굴이 뒤틀린 등나무와 같다. 소년은 가시가 있지만 처음 핀 매화꽃처럼 형언할 수 없는 깊은 향기가 있다. 그러므로 이런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여자를 버리고 남자에게 가야 할 것이다. 남색도(男色道)의 심오함을 홍법대사(弘法大師, 774-835)가 널리 퍼트리지 않은 것은 인간의 씨가 마르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말세의 남색을 내다보셨기 때문이다. 한창때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찌하여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의 남자주인공은 많은 금과 은을 여러 여자에게 써 버렸을까? 진정한 유흥은 남색(男色)뿐이다. 다양한 남색을 이 책 《남색대감(男色大鑑)》에 빠짐없이 기록하기 위해서 나니와만(難波灣)의 해초를 채취하듯 많은 소재의 글을 수집하였다” -제1권 1화 가운데- 이는 이하라 사이카쿠의 저서인 《남색대감(男色大鑑)》의 제1권 1화 끝에 나오는 남색(男色) 예찬(?) 글의 일부다.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1642-1693)는 《남색대감(男色大鑑)》 외에도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 등을 써서 에도시대(1603-1868)의 인기도서 작가로 등극한 인물이다. 《남색대감》은 불가(佛家)나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부산의 경서도 소리꾼, 하인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난해 상주(尙州) <전국민요경창대회>에 출전, 대상(대통령상)에 올랐다는 이야기, 여러 사람 앞에서 소리를 하거나, 발표회, 경연대회를 치를 때에는 누구나 긴장하게 마련이어서 실력 발휘가 어려운 법인데, 연습과정이 탄탄하여 무난히 목표점에 도달했으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그가 부른 곡명들은 수심가 토리인 <공명가-孔明歌>, <초한가-楚漢歌>, 그리고 <산(山)염불>이었다. <경 토리>를 비롯하여 <수심가>, <육자배기>, <메나리> 등등, 각각의 소리제에는 오랜 세월을 그 지역에서 살아 온 토착민들의 감정이 녹아 있기에 기쁨과 슬픔의 대조적인 표현 등이 노래 속에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서도지방의 수심가토리가 어떻게 남쪽에서 확산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 궁굼하다. 서도소리의 특징적인 선율형이나 창법, 또는 다양한 표현법 등이 독특하여 명창들의 소리를 통해, 또는 음반을 통해 호감이 가게 되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지금 인천 월미도의 한국이민사박물관(관장 김상열)에서는 <역경을 딛고 우뚝 선 조선인, 자이니치, 다시 재일동포> 전이 열리고 있다. 재일동포, 재미동포, 재프랑스동포와 같은 낱말은 한국인이 해당 나라에 가서 둥지를 틀고 사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지만 ‘재(在)’ 자를 붙인다고 해서 다 같은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특히 재일동포와 재중동포(조선족) 등은 오늘날 이민 형식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은 ‘재미동포’ 등과는 출발부터 다르다고 봐야 한다. “82만여 명의 재일동포(在日同胞)가 일본에 살고 있습니다. 재일동포의 궤적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가운데 줄임) 해방 이후 일본에 남은 조선인은 제도적, 민족적 차별과 싸우며 스스로 ‘자이니치(在日)’라 부르며 일본 사회에 자리매김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정상 국가를 꿈꾸는 모국에 무한한 사랑을 보냈던 이들을 우리는 ‘재일동포’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동포인 재일동포. 그들을 알고자 하지 않았던 우리. 이번 전시를 통해 모국과 함께 해왔던 이들이 누구보다도 가까운 동포임을 느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는 <역경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기와이기, 주막, 새참, 무동, 씨름, 쟁기질, 서당, 대장간, 점보기, 윷놀이, 그림 감상, 타작, 편자 박기, 활쏘기, 담배 썰기, 자리 짜기, 신행, 행상, 나룻배, 우물가, 길쌈, 고기잡이, 노상풍정(路上風情), 장터길, 빨래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단원 김홍도(1745~ ?)가 그린 《단원풍속도첩》 속 스물다섯 점의 그림들입니다. 이 그림들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이미지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으로, 서민들의 노동, 놀이, 남녀 사이에 오고 가는 은근한 감정 등 삶의 여러 모습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조금 더 상세하게 보자면, 그림의 소재는 농업, 상업, 어업 등 일상에서의 노동부터 노동 뒤의 휴식, 서민들의 놀이와 선비들의 고상한 취미생활까지, 그 주인공은 젖먹이 아기부터 노인까지, 서민부터 양반까지입니다. 그려진 소재와 대상이 다채롭고 생생하여 조선시대의 한 때, 어떤 곳에 다녀온 기분인데, 이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을 하나의 화첩에 모아 그린 예는 풍속화가 유행했던 조선 후기에서도 많지 않습니다. 스케치풍의 그림 : 최소화된 묘사와 채색 가로, 세로 30여 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서도소리 대부분은 수심가(愁心歌)의 창법이나 표현법을 기본으로 하기에 <수심가조>라고 한다는 점, 하인철은 10년 이상 부산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소리 공부를 하러 다녔다는 점, 이동시간 동안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들으며 경서도 소리를 익혔다고 하였다. 제2의 고향, 부산에서의 생활은 노래만으로는 살기 힘든 상황이어서 수리기술도 익혔고, 풀빵 장사도 했으나, 무슨 일을 해도 서도소리 부르기와 명창의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연습을 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근처의 민요학원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곳이 바로 국가무형문화재 제19호 경기민요 이수자 강숙희 명창이 운영하는 소리 학원이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당시 민요 부르기를 처음 시작한 것은 매우 단순한 이유였어요. 트로트의 맛을 내야 하는데, 꺾기의 발성이 잘되지 않아서 그것을 해결하려는 방법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우리 소리는 참 묘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트로트보다 경기민요와 서도민요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런데 정작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하게 되는 발표회 무대나 경연대회에 출전할 때는 정말 많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서도의 토속소리, <투전풀이>란 상가(喪家)에서 망자(亡者)와 그 집안 식구들을 위로하기 위해, 또는 밤샘하는 사람들이 졸음을 이기기 위해, 벌이는 일종의 놀이 형식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원래 투전(鬪牋)이란 돈 놀음으로 그림이나 문자를 그린, 종이조각을 가지고 승부를 가리는 성인남자들의 방안놀이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는 돈 놀음보다는 소리가 중심이 되기에 남의 눈을 피해 가며 거액을 잃고, 따는 금지된 거래와는 그 성격과 규모가 다르다. 유지숙이 부른 <투전풀이>는 노랫말 9종, 박기종의 《서도소리 명곡대전》에는 <투전타령>이란 이름으로 40종의 노랫말을 소개하고 있으나, 즉흥적으로 둘러대는 사설치레가 재미를 더하고 있다. 이번 주에는 부산에서 서도소리와 경기소리를 중심으로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지도하고 있는, 그러면서 공연활동도 나름대로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 남성소리꾼, 하인철 명창을 소개한다. 경기지방의 소리도 그렇고, 더더욱 서도지방의 소리를 이어가고 있는 전반적인 소리꾼들이 점차 줄어들고 현실에서 하인철과 같은 남성 소리꾼이 활동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는 사실은 크게 격려해 줄 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편지가 왔다네> 와 <농부가>, 그리고 퉁소를 소개하였다. 함경도 지방에서는 각 마을의 최고 퉁소잽이들이 모여 겨루기 한마당이 열려 왔다는 점, 연변의 조선족 사회에서도 함경도에서 옮겨 온 동포들이 <퉁소예술절>을 열어 오고 있을 정도라는 점, <편지가 왔다네>는 사설 내용이 재미있거니와 다른 지역의 농부들이 농사 관련 농요를 부르듯, 함경도 지방에서도 관련 농요들을 불러왔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번 주에는 <투전풀이> 또는 <투전타령>이라 해서 노름을 하며 부르는 노래들을 소개해 본다. 투전(鬪牋)이란 돈 놀음이다. 그림이나 문자를 넣어 끗수를 표시한 종잇조각을 가지고 승부를 가리는 성인남자들의 방안놀이를 말함인데, 심심풀이의 수준을 넘어 거액의 돈을 잃거나 해서 신세를 망친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자주 들어왔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노래로 소개하는 <투전풀이>, 또는 <투전타령>이라는 소리는 놀음판에서 불리는, 곧 투전하며 부르는 소리이긴 하되 놀음이 위주가 아니라, 소리가 중심을 이루는 말이 되겠다. 다시 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 겨레의 큰 명절 ‘한가위’가 채 20일도 남지 않았다. 곳곳에서는 벌써 명절 잔치가 시작된 듯하고 각 기업체는 명절맞이 선물 광고에 한창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는 ‘한가위’라 쓰고 누구는 ‘추석’이라고 쓴다. 심지어 추석은 ‘秋夕’이라고 한자로 써 놓기도 한다. 혼란스럽다. 도대체 명절을 두고도 왜 각기 다른 말을 쓰는 것일까? 먼저 ‘추석’과 ‘한가위’의 말밑(어원)을 살펴본다. 먼저 중국에서는 가을을 셋으로 나눠 음력 7월을 맹추(孟秋), 8월을 중추(仲秋), 9월을 계추(季秋)라고 불렀는데 그에 따라 8월 보름을 중추라 했다. 그래서 우리도 예전 ‘중추절’이라 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추석’이라는 말은 5세기 송나라 학자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에 나온 “추석월(秋夕月)”이란 말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추석월”은 천자가 가을 저녁에 달에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명절과 잘 맞지 않는 말이란 생각이다. 더구나 중국 사람들조차 이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에 견주면 ‘한가위’는 뜻과 유래가 분명한 우리 토박이말이다. “한가위”는 ‘크다’라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박물관을 찾은 많은 분들이 스치듯 지나가는 전시실이 있습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인 ‘구석기실’입니다. 심지어 일부 관람객은 “전시실에 누가 자갈돌을 가져다 놓았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관람객의 관찰이 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갈돌로 만들어진 점이 우리나라 구석기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 처음 확인되어 이제는 전국에서 출토되는 주먹도끼는 자갈돌을 재료로 삼았습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자갈돌을 깨뜨려 다듬어서 주먹도끼를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두들겨 치거나 깨뜨리는 타격 기술은 인류 첫 돌연장인 찍개에서부터 이용되었습니다. 진열된 주먹도끼나 찍개는 크기도 하고 모양이라도 있으니 도구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구석기실 마지막 장을 차지하는 작고 길쭉길쭉한 돌날은 도대체 어떻게 쓰였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단박에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앞선 시기의 주먹도끼와는 견줄 수가 없을 정도로 작고 약하게 생겼습니다. 이것은 대체로 길이는 5㎝ 이하이고, 너비는 0.5㎝ 안팎으로, 길이가 너비의 2배를 넘습니다. 그래서 ‘작은 돌날’이라 부르며, 세석인(細石刃)ㆍ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 이야기한 북녘땅의 다양한 토속소리에는 함경도 지방의 <애원성(哀怨聲)>이나, <아스랑가>, <전갑섬타령> 등도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또한, <신고산타령>이나 <궁초댕기>로 대표되는 함경도의 통속 민요와는 달리, <애원성(哀怨聲)>은 지역의 특성을 그대로 안고 있는 토속민요로 현재는 이북5도청 내의 함경도 무형자산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이야기, <전갑섬타령>에 나오는 해안 퉁소란 말에서 퉁소는 통소(洞簫)라 쓰고, 퉁소라 읽는데, 단소와 같이 세로로 부는 대나무 악기의 이름이란 이야기와 단소보다는 굵고 길며 그 음색이 거칠면서도 애잔하여 듣는 이의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 악기라고 하였다. 퉁소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함경도는 마을마다 퉁소를 즐겨 불 정도로 일반화 되어 있었는데, 예를 들어, 각 마을을 대표하는 으뜸 퉁소잽이들이 모여 겨루기 마당이 열리곤 했다. 그날의 열기는 대단했었고, 심지어 멀리 다른 지방까지 가서 명인들을 초빙해 올 정도였다고 한다. 중국의 연변 조선족 사회만 해도 퉁소에 대한 애정은 특별한 편이어서 자체적으로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