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고수의 길로 들어선 송원조가 당시 이리국악원 총무직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고법(鼓法)을 익히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의 북 실력이 점점 향상되면서 무대공연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익산에서 열린 판소리 대회, 북 부문에서도 장원에 올랐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고수(鼓手)의 임무나 그 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소리꾼은 긴 이야기를 소리와 장단, 그리고 다양한 대사와 동작, 등으로 소리판을 끌어 나가는 역할을 하기에 매우 힘든 역할이고, 상대적으로 고수는 한 자리에 앉아서 소리에 맞추어 북을 치기 때문에 쉬운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첫째가 고수, 둘째가 명창이란 말, 곧 ‘일고수 이명창(一鼓手二名唱)’이란 말이 널리 회자(膾炙)하는 것도 그만큼 고수의 역할이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글쓴이는 대학신문에 “추임새, 에너지의 보충원(補充原)”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이 글에서 고수가 얼마나 어려운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추임새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 하는 점을 피력했다, 비단 판소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지난 3월 3일은, 일본 풍습으로 히나마츠리날(ひな祭り)이었다. 히나마츠리란 딸아이를 위한 잔칫날로 히나인형을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딸아이가 태어나면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건강하고 예쁘게 크라’는 뜻에서 히나 인형을 선물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부터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이 풍습은 혹시 딸에게 닥칠 나쁜 액운을 없애기 위해 시작한 인형 장식 풍습인데 이때 쓰는 인형이 “히나인형(ひな人形)”이다. 히나마츠리를 다른 말로 “모모노셋쿠(桃の節句)” 곧 “복숭아꽃 잔치”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복숭아꽃이 필 무렵의 행사를 뜻하는 것으로 예전에는 히나마츠리를 음력 3월 3일에 치렀지만 지금은 다른 명절처럼 양력으로 지낸다. 히나인형은 원래 3월 3일 이전에 집안에 장식해 두었다가 3월 3일을 넘기지 않고 치우는 게 보통이다. 3월 3일이 지나서 인형을 치우면 딸이 시집을 늦게 간다는 말도 있어서 그런지 인형 장식은 이 날을 넘기지 않고 상자에 잘 포장했다가 이듬해 꺼내서 장식하는 집도 꽤 있다. 그러나 히나나가시(雛流し)라고 해서 인형을 냇물에 띄워 흘려보냄으로서 아이에게 닥칠 나쁜 액운을 해서 미리 막는 풍습도 있다. 히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광복 뒤로 얼마 동안은, 초등학교 운동회 때에 “달려라! 달려라! 우리 백군 달려라!” 하는 응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을 지나고, 언제부터인가부터, 그것이 “뛰어라! 뛰어라! 우리 백군 뛰어라!” 하는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즘은 온 나라 젊은이가 너나없이 ‘뛰다’와 ‘달리다’를 올바로 가려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아예 두 낱말의 뜻이 본디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게 되어 버린 듯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국어사전들이 이들 두 낱말의 본디 뜻을 그런대로 밝혀 놓았다는 사실이다. 국어사전들은 ‘뛰다’를 “있던 자리로부터 몸을 높이 솟구쳐 오르다.”, “몸이 솟구쳐 오르다.”라고 풀이해 놓았고, ‘달리다’를 “‘닫다’의 사동사.” “달음질쳐 빨리 가거나 오다.” “빨리 가게 하다.” “뛰어서 가다.”라고 풀이해 놓았다. 두 낱말의 뜻이 헷갈릴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달리다’를 “뛰어서 가다.”라고 풀이해서 ‘달리다’와 ‘뛰다’가 서로 헷갈릴 빌미를 남겨 두었다. ‘뛰다’는 본디 제자리에서 몸을 솟구쳐 오르는 것이고, ‘달리다’는 본디 빠르게 앞으로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판소리 고법의 서울시 문화재’인 송원조 명인은 처음 최광렬에게 소리를 배웠으나, 소리보다는 북 치는 법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고법(高法), 곧 북가락이나 자세, 북에 대한 이론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북을 잘 치기 위해서는 소리 길도 반드시 알아야 하므로 송원조는 판소리를 배우면서 고수의 길, 고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소리를 배우고 북을 배우던 시기는 당시 4.19학생운동, 5.16군사혁명 등, 나라 안팎의 정세가 평온치 않았던 시기였다. 그 영향일까? 그가 나가고 있던 <이리국악원> 사범들도 여러 사정으로 인해 자주 바뀌었으나, 최광렬을 비롯하여 강종철, 김동준, 주봉신, 이성근 등에게 소리와 북을 열심히 배웠다고 했다. 평소 송원조의 성실함이나 책임감을 간파한 국악원장 강점상이 하루는 그에게 국악원 총무 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총무가 되면 수업료를 내지 않고, 소리와 북을 배울 수 있었고, 게다가 국악원 내에서 살 수 있게 되는 이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수강생이 아니라, 일정 부분 책임도 따르는 국악원의 간부가 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 가운데서 뽑혔다는 점에서 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개항 초기 20대 초에 인천으로 건너와 40여 년을 이곳에서 지냈고, 지금도 인천에 잠들고 있는 여성, ‘하나 글래버 베넷'. 해방 후 ‘나비부인의 딸’로 오인당한 그녀 삶의 진상, 인천 영국영사관 건물의 구조 등 베일에 가려져 왔던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전시회가 막을 올린다.(아래 줄임)” 이는 2주 전쯤 인천관동갤러리 도다 이쿠코 관장으로부터 받은 ‘전시회 안내’ 보도자료 글 가운데 일부다. 인천관동갤러리에서는 다른 갤러리들과는 달리 역사성 있는 사진전이라든가 문화, 문학, 민속을 아우르는 전시를 자주 열고 있는 곳이라 종종 취재했지만, 솔직히 이번에 보내온 <인천 영국영사관과 하나 글래버 베넷 전(展, The Incheon British Consulate and Hana Glover Bennett)>이라는 보도자료는 몇 번을 읽어봐도 전시 내용의 의미 파악이 안 되는 데다가 전시 주제로 내세운 영국인 여성 ‘하나 글래버 베넷’과 개항기 인천의 ‘영국영사관 건물’에 대해 솔직히 말하자면 별 흥미를 못 느꼈다. 전시 개막식 날짜로 알려 온 25일(일요일) 낮 3시는 마침 청탁받은 원고 마감까지 겹쳐 내심, 이번 개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조선 후기 문화를 꽃피웠던 인물입니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비명에 간 사도세자를 아버지로 두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 끝없는 연민을 느끼게 하는 임금이지만 실제 그가 남긴 여러 자취를 통해 볼 때 그는 권력의 정점에서 치밀하게 왕권을 강화해 나간 인물입니다. 정조는 정치적 현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여러 신하에게 비밀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들이 수신자의 집안에 대대로 보존되어 지금까지 많은 양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정조가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와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들입니다. 이 편지들은 용의주도하게 정국을 운영해 가는 개혁군주 정조의 모습과 고뇌하는 정조의 인간적인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자료입니다.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와 외삼촌 홍낙임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두 종류의 정조 임금 편지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정조의 신하인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첩(정조신한-正祖宸翰 첩과 두루마리 30건)이고 다른 하나는 정조의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첩입니다. 보낸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수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땅’과 ‘흙’을 가려 쓰지 못하고 헷갈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뜻을 가려서 이야기해 보라면 망설일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하다. 뜻은 잘 가려 쓸 수 있으면서 그것을 제대로 풀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아는 사람들이 이런 우리말을 버리고 남의 말을 뽐내며 즐겨 쓰느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다는 사람들이 가르치지 않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배우겠는가? 공부하고 글 읽어 안다는 사람들은 우리말 ‘땅’과 ‘흙’을 버리고 남의 말 ‘토지’니 ‘영토’니 ‘토양’이니, ‘대지’니 하는 것들을 빌어다 쓰면서 새로운 세상이라도 찾은 듯이 우쭐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똑똑하고 환하게 알고 있던 세상을 내버리고, 알 듯 모를 듯 어름어름한 세상으로 끌려 들어간 것일 뿐이었음을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땅’은 우리가 뿌리내려 살아가는 터전을 뜻한다. 우리는 땅을 닦고 터를 다듬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땅을 헤집고 논밭을 일구어 먹거리를 얻어서 살아간다. 삶의 터전인 땅에서 온갖 목숨이 태어나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다. 세상 온갖 목숨을 낳고 기르는 어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任賢使能(임현사능) :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일 시키다.(《세종실록》 14/4/28) ... 이것은 대체로 엎드려 〈성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신성(神聖)하신 우리 임금께서는 문(文)도 마땅하게 하시고 무(武)도 마땅하게 하시는 나라의 큰 법과 기율을 세우시어 태평성대(泰平盛代)의 기초를 더할 수 없이 높였으며,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부리시어 널리 문무를 겸하여 걷어 들이시는 길을 열었습니다. (《세종실록》 14/4/28) 任賢使能, 廣開兼收之路。 급제한 문과 김길통, 무과 조석강 등이 사은의 전문을 올리는 데서 나온 말이다. 여러 기록을 보면 대략 세종 11년부터 ‘오곡(五穀)이 모두 풍년이고 온 백성이 함께 즐거워합니다.’ 등 ‘태평성세(太平盛世)의 모습’(《세종실록》 11/8/24) 나오고, 14년경부터는 안정된 승평(昇平, 나라가 태평함) 그리고 30년에는 융평(隆平, 갈등 없이평온함)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조선왕조실록》 원문 기록 건수 (세종/전체). 균평(均平) 6/98, 승평(昇平) 90/1227, 태평(太平) 100여/375, 풍평(豊平) 5/7, 융평(隆平)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까지는 화관무(花冠舞)라는 춤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화관무란 글자 그대로 꽃으로 만든 화려한 관을 쓰고, 추는 춤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하한 서도의 춤 사범, 민천식은 황해도 해주 지역 기녀들이 추어오던 화관무라는 춤에 탈춤과 교방무(敎坊舞)의 양식을 더해 완성도 높은 춤으로 재탄생시켰다, 그것은 호방한 한삼의 뿌림이라든가, 유연한 몸놀림 등, 궁중무의 절제된 ‘규칙’이라든가 민속춤의 ‘자유로움’을 갖추고 있으며 서도의 삼현육각(三絃六角)으로 반주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춤이라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최승희, 김정순, 배뱅이굿의 이은관, 재담의 김뻑국, 김실자, 김나연, 외 수많은 춤꾼, 소리꾼 등이 그에게 춤과 노래를 배웠다. 민천식은 화관무 말고도 봉산탈춤을 세상에 알려서 동 종목이 국가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로 지정받는 데 크게 이바지하여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인정서를 받는 당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예인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 김나연(현, 화관무 명예보유자)은 말한다. 선생은 “춤을 가르치면서도 늘 애국심을 강조해 주셨어요. 화관무는 태평성대를 소원하는 춤이라는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돕다’와 ‘거들다’ 같은 낱말도 요즘은 거의 뜻가림을 하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쓴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들여다보면 그 까닭을 알 만하다. · 돕다 : 남이 하는 일이 잘되도록 거들거나 힘을 보태다. · 거들다 : 남이 하는 일을 함께 하면서 돕다. 《표준국어대사전》 이러니 사람들이 ‘돕다’와 ‘거들다’를 뒤죽박죽 헷갈려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 두 낱말은 서로 비슷한 뜻을 지녀서 얼마쯤 겹치는 구석이 있게 마련이지만, 여러 가지 잣대에서 쓰임새와 뜻이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도 ‘돕다’는 사람을 겨냥하여 쓰는 낱말이고, ‘거들다’는 일을 겨냥하여 쓰는 낱말이다. 앞을 못 보거나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을 돕고, 배고픔과 헐벗음에 허덕이는 사람을 돕고, 힘겨운 일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사람을 돕는다. 한편, 힘에 부쳐서 이겨 내지 못하는 일을 거들고, 너무 많고 벅차서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거들고, 정한 시간에 마무리를 못 해서 허덕이는 일을 거든다. 이처럼 사람을 돕고 일을 거든다고 하면 쓰임새가 옳지만, 일을 돕고 사람을 거든다고 하면 쓰임새가 틀리는 것이다. 그리고 ‘돕다’는 몸과 마음으로 주는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