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스펀지>라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재미나는 구경을 했다. 돼지 다섯 마리를 새로 만든 우리에 넣고 돼지가 똥오줌과 잠자리를 가릴지 못 가릴지를 알아보려고, 다섯 사람이 한 마리씩 맡아서 밤을 새우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한 놈이 구석에다 오줌을 누었다. 그러자 다른 놈들도 모두 똥이나 오줌을 그 구석에만 가서 잘 가려 누었다. 그런데 지켜보는 사람들은 돼지가 오줌이나 똥을 눌 때마다 한결같이 “쌌습니다! 쌌습니다!” 했다. 박문희 선생님이 유치원 아이들과 살면서 겪은 그대로였다. ‘똥오줌을 눈다’와 ‘똥오줌을 싼다’를 가려 쓰지 않고 그냥 ‘싼다’로 써 버립니다. ‘똥오줌을 눈다’는 말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변기에 눈 건지 바지에 싼 건지를 가려 쓰지 않으니 가려듣지 못합니다. 이러니 생활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분명히 ‘똥을 눈다, 똥을 싼다’는 말을 가려 써 왔습니다. - 박문희, 《우리말 우리얼》 46호 ‘누다’와 ‘싸다’는 다스림으로 가려진다. ‘누다’는 똥이든 오줌이든 스스로 잘 다스려서 내보내는 것이고, ‘싸다’는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그냥 내보내는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국립국악원》의 기획공연에서 황해도 지역, 민천식의 춤 방에서 전래해 오던 춤들이 현대에 와서 되살아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이야기하였다. 민천식(閔千植, 1898∼1967)은 어린 시절부터 탈춤, 특히 봉산탈춤을 배웠으며, 월남 이후에는 <아악부(雅樂部)>에 다니며 궁중무용의 강습 과정을 수료하였다는 점, ‘화관무(花冠舞)’, ‘기본 춤’, ‘수건춤’ 등이 그의 대표적인 춤이란 점, 그는 봉산(鳳山)탈춤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당시, 김진옥(金辰玉) 등과 함께 고증자로 활동하였다는 점을 말했다. 또 이 탈춤은 20세기 초, 이춘강ㆍ임재현ㆍ정순조ㆍ김봉학 등으로부터 1930년대에는 이동벽ㆍ김경석 등에게, 월남한 뒤에는 김진옥ㆍ민천식ㆍ이근성ㆍ이용익ㆍ양소운 등에 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점, 등을 이야기하였다. ‘수건춤’은 ‘손목 사위’, ‘수건 뿌림’, ‘발놀림’이 독특하다는 점이며, ‘기본 춤’은 타령 춤의 양식을 굿거리 음악에 입혀 재구성하였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이번 주에는 화관무(花冠舞)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화관무란 글자의 뜻, 그대로 꽃으로 만든 화려한 관을 쓰고, 추는 춤이라고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일하다’와 짝을 이루는 ‘놀다’는 일제의 침략을 만나서 갑자기 서러운 푸대접을 받았다. 저들은 우리네 피를 남김없이 빨아먹으려고 ‘부지런히 일하기[근로]’만을 값진 삶의 길이라 외치며 ‘노는 것’을 삶에서 몰아냈다. 일제를 몰아내고 분단과 전쟁과 산업화로 이어진 세월에서는 목숨 지키는 일조차 버거워서 ‘놀다’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놀다’는 ‘일하다’를 돕고 북돋우고 들어 올리는 노릇이고, ‘일하다’에 짓눌린 사람을 풀어 주고 살려 주고 끌어올려 주는 노릇이며, ‘일하다’로서는 닿을 수 없는 저 너머 다함 없는 세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데려다주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네 삶에서 밀려난 ‘놀다’를 다시 불러들여 제대로 가꾸는 일에 슬기를 모아야 하는 것이다. ‘놀다’는 네 가지 이름씨 낱말로 우리네 삶 안에 살아 있다. 움직씨 ‘놀다’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놀기’, ‘놀이’, ‘놀음’, ‘노름’이 그것들이다. 그러니까 움직씨 ‘놀다’가 ‘놀기’라는 이름씨로 탈바꿈하여 벌어져 나오면, ‘놀이’를 거치고 ‘놀음’에 닿았다가 마침내 ‘노름’까지 가지를 치며 나아가는 것이다. ‘놀기’는 ‘놀다’를 이름씨로 바꾸어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때에는 계층이라 할 수도 없는 계급적 사회였다. 신분적으로는 하민, 소민에서 정착못하는 란민(亂民, 무리를 지어 다니며 안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백성), 난민(難民, 전쟁이나 재난으로 곤경에 빠진 사람), 부민(浮民,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백성), 류민(流民,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도는 백성), 유민(遊民, 직업이 없이 놀며 지내는 사람) 등이 있고,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궁민(생활이 어렵고 궁한 백성), 빈민, 소민(小民, 상사람), 하민(下民, 서민) 등이 있고, 떠돌이 부랑민, 천민(賤民, 지체가 낮고 천한 사람)등의 부류가 있고, 정신적으로는 무지한 우민, 평민, 서민, 소민, 시기적으로는 휼민, 요민(饒民, 살림이 넉넉한 백성), 되살려야 할 화민(化民, 일반 백성) 등이 있다. 이런 모든 부류의 백성을 교육해 ‘자각하는 생민(生民)’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ㆍ 백성[民]에서 생민으로 병이(秉彝) : “내가 생각건대, 하늘이 준 바른 덕과 진심 그리고 의젓하게 타고난 천성은 생민이 똑같이 받은 것이라, 인륜을 도타이 하여 풍속을 이루게 하는 것은 나라를 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국립국악원>의 기획공연에서 황해도 지역의 권번(券番)에서 추던 민천식의 춤방과 양소운 춤방이 재현되었다는 이야기, 이들은 오랜 전통을 지닌 이북, 황해도 지역의 춤들이 현대에 와서 되살아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점, 민천식(閔千植, 1898∼1967) 명인은 황해도 사리원 출신으로 7살 때부터 탈춤을 배우기 시작, 성장하면서 이윤화ㆍ박천만 등에게 봉산탈춤을 배웠고, 월남해서는 인천에서 살면서 인천국악원을 운영한 것에 관해 얘기했다. 또 그의 작품들은 현재 이북5도청 황해도 지방의 ‘화관무(花冠舞)’, ‘기본춤’, ‘수건춤’ 등이라는 점, 봉산탈춤(鳳山─)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할 당시, 김진옥(金辰玉) 등과 함께 주요 고증자로 활동하였다는 점, 봉산탈춤은 20세기 초, 이춘강을 비롯한 임재현ㆍ정순조ㆍ김봉학 등이 활동하였고, 1930년대에는 이동벽ㆍ김경석 등에게 전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6·25 때 월남한 김진옥ㆍ민천식ㆍ이근성ㆍ이용익ㆍ양소운 등에 의해 오늘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날, 발표된 수건춤은 민천식의 계승자인 김나연과 차지언이 무대에 나와 ‘손목 사위’, ‘수건 뿌림’, 경쾌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758년 아름다운 비례를 지닌 쌍탑이 김천 갈항사(葛項寺)의 경내에 세워졌습니다. 발원자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의 어머니인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와 그녀의 오라버니,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간절한 염원을 담아 탑을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탑을 세우 뒤 27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계오부인은 황태후가 되었고 그 이후 발원자였던 세 사람은 탑에 기록되었습니다. 석가탑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비례미 신라의 삼국통일은 석탑의 모습에도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기존 신라와 백제로 대표되던 각기 다른 양식의 석탑이 하나의 모습으로 재창조되었습니다. 7세기 말 무렵, 경주의 감은사(感恩寺)와 고선사(高仙寺)에 세워진 삼층석탑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탑들은 마치 통일 왕조의 권위와 위용을 상징하는 듯, 안정적이면서도 압도하는 웅장함이 돋보입니다. 초층 탑신석 상단 중앙까지는 밑변이 긴 삼각형 구도로 안정감을 더하였고 층간의 높이와 지붕의 비례를 일정하게 체감시켜서 그러한 시각적 효과를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 초기 석탑의 안정감과 웅장함은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발전과 변화를 거듭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봄비처럼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제주, 거기에 바람까지 불어대는 게 음산하기 짝이 없다. 출발하는 날부터 궂은 날씨는 이삼 일간 계속 흐린다는 비 예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주에 올 때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대정이다. 공항에서 차로 1시간가량 걸리는 대정에는 추사유배지가 있는 곳으로 지금은 추사기념관이 번듯하게 들어섰지만 기념관 뒤편 초가집으로 발길이 먼저 가는 것은 왜일까? 대문을 들어서면 ㄷ자로 배치된 초가집 가운데 문간 오른쪽, 채 한 평이 될까말까한 좁은 방안에 밀랍 인형 둘이 앉아있는데 이들은 추사와 초의선사다. 차를 마시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다보고 있자니 이들이 살던 18세기의 한 끝자락을 보는 듯 가슴이 아련해온다. 고향의 가족과 공적인 업무에서 배제된 채 유배(流配)의 삶을 살아야했던 당시 선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쇠처럼 단단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추사와 초의 친구사이의 매우 두터운 우정을 '금란지교' 라 한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와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의 우정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1815년 처음 만난 추사와 초의 이후 추사는 초의에게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그림씨(형용사) 낱말은 본디 느낌을 드러내는 것이라, 뜻을 두부모 자르듯이 가려내는 노릇이 어렵다. 게다가 그림씨 낱말은 뜻덩이로 이루어진 한자말이 잡아먹을 수가 없어서 푸짐하게 살아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세기 백 년 동안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선조들이 물려준 이런 토박이말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뒤죽박죽 헷갈려 쓰는 바람에 힘센 낱말이 힘 여린 낱말을 밀어내고 혼자 판을 치게 되니, 고요히 저만의 뜻과 느낌을 지니고 살아가던 낱말들이 터전을 빼앗기고 적잖이 밀려났다. ‘날래다’와 ‘이르다’ 같은 낱말들도 6·25 전쟁 즈음부터 ‘빠르다’에 밀리면서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날래다’와 ‘이르다’가 ‘빠르다’에 자리를 내주고 자취를 감출 듯하다. 우리네 정신의 삶터가 그만큼 비좁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빠르다’는 무슨 일이나 어떤 움직임의 처음에서 끝까지 걸리는 시간의 길이가 짧다는 뜻이다. 일이나 움직임에 걸리는 시간의 길이가 길다는 뜻으로 쓰이는 ‘더디다’와 서로 거꾸로 짝을 이룬다. ‘날래다’는 사람이나 짐승의 동작에 걸리는 시간의 길이가 몹시 짧다는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서한범의 우리음악이야기’는 판소리 <심청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젊은 소리꾼, “어연경의 심청가 발표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고 성창순(成昌順) 명창의 판소리 사랑 이야기, 그리고 판소리로 듣고 부르는 <심청가>는 슬픈 애심감자(哀心感者)의 소리로 계면소리라는 이야기, 까마귀의 반포지은(反哺之恩)이야기와 새벽을 알리는 반야진관에 있던 맹상군 이야기, 돛을 단 배가 넓은 바다 위로 유유히 떠가는 범피중류(泛彼中流) 이야기를 해 왔다. 소리 자체도 힘들고 어려운 것이 판소리라고 하지만, 대목마다 어려운 사설의 내용이 또한 많은 공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판소리의 유익한 감상을 위해서는 사설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심청가>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이번 주에는 지난해 10월 26일, 서초동 국립국악원에서 기획공연으로 열린 ‘일이관지(一以貫之)’ 이야기를 한다, 일이관지의 딸림 제목은 ‘조선 춤방’인데, 여기서 하는 공연 곧 조선 8도에서 춤 방의 맥을 이어 온 작품들이 선을 보이는 기획된 공연이었다. 당일의 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보 <청자 참외모양 병>은 고려청자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병입니다. 제17대 임금인 인종의 장릉(長陵)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황통육년(皇統六年)'(1146)이라는 정확한 연대가 있는 시책과 함께 전해져 고려왕실의 청자에 대한 심미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려의 비색을 대표하는 병 여덟 잎의 꽃 모양으로 만들어진 주둥이(구연)와 긴 목, 여성의 치마 주름처럼 생긴 높은 굽다리, 농익은 참외 형태로 만든 병의 몸통이 유려하면서도 우아합니다. 참외 모양의 몸통은 상하 수직선으로 눌러 오목하게 골을 표현하였고, 각각의 곡면에는 팽팽한 양감이 드러나 있습니다. 높직한 굽의 예리한 직선과 몸통의 곡선이 대치를 보이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어 긴장감과 함께 경쾌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줍니다. 몸통을 중심으로 목과 굽다리의 연결부위에서 확인되는 돌대는 금속기에서 빌린 듯하며, 병목에 가로선이 세줄 오목새김(음각)되어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찾아볼 수 없지만 오직 형태와 유색으로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굽바닥에는 유약을 닦아내고 내화토 받침을 일곱 곳에 받쳐서 구운 흔적이 있습니다. 전